설화

음성의 설화(說話)


현재까지 음성 지역에서 전해 오는 설화들은 『내고장 전통가꾸기-음성군-』과 『음성군지』, 『민담 민요집』, 『전설지』, 『음성의 구비문학』 등에 채록되어 있다. 그러나 위의 문헌들에 수록된 설화들은 편집자에 의해 윤색된 자료들로서, 구전 당시의 상황이나 제보자에 의한 각색 등은 드러나지 않는다.


음성 지역 설화에 대한 연구 문헌으로는 서원대학교 호서문화연구소에서 발간한 『음성지역 설화 연구』를 들 수 있다. 『음성지역 설화 연구』에서는 음성 지역의 설화를 전설과 민담으로 구분한 후, 전설을 다시 지명·유물·민간신앙·인물로 하위 분류하였다.


현재까지 채록되어 각종 문헌에 수록된 음성 지역의 설화를 살펴보면 크게 유래담과 인물담, 민담 등으로 구분된다. 유래담은 마을이나 산하·바위·유물 등에 대한 이야기로, 명명된 연유에 이야기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인물담은 역사적 인물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어사 박문수·숙종·효자 손순·임경업·김삿갓·임거정 등의 인물과 음성과 관련한 옹몽진과 자린고비 조륵·권제·정한철·윤기진·정석오·박순·김순·정운영·채신보 등에 관한 이야기가 채록 수록되어 있다. 민담의 경우 전설에 비해 많이 채록되지 못했는데, 이 때문인지 지역적 특성이 현저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음성읍>

가섭산 설화(迦葉山 說話)

감로정(甘露井)

공기바위 전설(공기바위 傳說)

까치섬 전설(까치섬 傳說)

멱바위

명의 염두경(名醫 廉斗璥)

음성 초대현감 옹몽진(陰城 初代縣監 邕夢辰)

이신과 충효문(李信과 忠孝門)

흔행이고개


<금왕읍>

꾸어준 돈 백냥(꾸어준 돈 百냥)

민발의 묘(閔發의 墓)

민정현의 천근지효(閔鼎顯의 天根之孝)

바람부처

애 업은 바위

예순티고개 설화(예순티고개 說話)

이광하의 효(李光夏의 孝)

자린고비 조륵 이야기(자린고비 趙勒 이야기)


<소이면>

각시무덤

도깝보(도깝洑)

돌갓을 쓴 관속(돌갓을 쓴 官屬)

말무덤

삼고심이(三顧心이)

생바위(笙바위)

어래산 설화(御來山 說話)


<원남면>

남극년과 호랑이(南極年과 호랑이)

남취오의 묘(南聚五의 墓)

맹골리(孟골里)

민동량과 호랑이(閔東亮과 호랑이)

박주헌과 도깨비(朴周憲과 도깨비)

반광섬의 신필(潘光暹의 神筆)

백마산 설화(白馬山 說話)

보천장의 유래(甫川場의 由來)

불우손님 할아버지

자라바우

장공의 전사를 알려준 애마(張公의 戰死를 알려준 愛馬)

정한철과 호랑이(鄭漢澈과 호랑이)

진정한 우정(眞情한 友情)

채수와 그의 손자(蔡壽와 그의 孫子)

채신보의 묘와 호환(蔡申保의 墓와 虎患)

청주고씨와 운명(淸州高氏와 殞命)

화암바위(華巖바위)

화암사 약수(華巖寺 藥水)


<맹동면>

꼬부랑 할머니

새빨간 거짓말

정석오의 혼(鄭錫五의 魂)

통골마을의 모기

효자 김순의 칠지지효(孝子 金(石+舜)의 七指之孝)


<대소면>

유상재의 역사전(柳尙宰의 力士傳)

함흥차사 박순 일화(咸興差使 朴淳 逸話)

효자 박정규 이야기(孝子 朴廷珪 이야기)


<삼성면>

김정샘(金井샘)

덕다리 전설(德多里 傳說)

백운산(白雲山)

용당의 전설(龍堂의 傳說)

유월샘(六月샘)

이양골 이야기

이이첨의 지견(李爾瞻의 知見)

청룡뿌리(靑龍뿌리)

팔장사 샘(八壯士 샘)

하석환의 절개(河錫煥의 節槪)

효자 권국화(孝子 權國華)

효자 정운영 이야기(孝子 鄭運永 이야기)


<생극면>

김선경의 처 성주이씨 이야기(金善慶의 妻 星州李氏 이야기)

김성간의 과거(金成簡의 科擧)

김세필의 일화(金世弼의 逸話)

말마리 전설(말마리 傳說)

생극의 유래(笙極의 由來)

세조와 권람 이야기(世祖와 權擥 이야기)

수리산 못(修理山 못)

양촌 권근 이야기(陽村 權近 이야기)

여기소 설화(麗妓沼 說話)

장자봉 설화(長者峰 說話)

태종과 권제 이야기(太宗과 權踶 이야기)


<감곡면>

거일바위(巨日바위)

골상촌 가사바위(골桑村 袈裟바위)

금구몰니형과 거먹소의 간(금구몰니形과 거먹소의 肝)

돌마람 나비혈 이야기(돌마람 나비穴 이야기)

망가리고개(亡家里고개)

벼락바위

비석돌(碑石돌)

신선바위(神仙바위)

아치내 개울

앵무새의 집

용머리 설화(龍머리 說話)

윤기손·기진 형제의 효(尹起巽·起辰 兄弟의 孝)

이완 일화(李浣 逸話)

자점보(自點洑)

지네굴(지네窟)

집은골 이야기

쫓겨난 민망나니(쫓겨난 閔망나니)

한씨 부인과 오갑산(韓氏 夫人과 梧甲山)


음성읍

<가섭산 설화(迦葉山 說話)>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용산리에서 가섭산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음성읍에서 북쪽으로 중원군 신니면과 접경을 이루는 곳에 해발 710m의 가섭산이 있는데, 옛날 가섭산으로 불리기 전 이 산의 중턱에는 조그만 암자가 하나 있었다. 이름도 없는 암자에는 스님이 한 명 머물고 있었다. 스님은 물욕이 없어 번민하는 마음이 없었으며, 불도를 행하는 데 항상 청결하고 단정하여 암자를 찾는 이들이 절로 고개를 숙일 정도였다. 그리하여 세월이 흐르자 그곳을 찾는 사람들은 스님을 생불 대하듯 하였으나, 스님은 조금도 교만하지 않고 겸허하게 찾아오는 신도들을 대하였다.


어느 날 스님은 마을 사람들에게 입적할 날이 다가왔으니 더이상 찾아오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스님이 열반에 들 것이라는 소문이 나자 이른 새벽부터 근동 사람들이 암자로 몰려갔으나 스님은 이미 입적을 한 후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죽은 스님의 몸을 싱싱한 잎사귀가 붙은 보리수나무 가지들이 덮고 있었다. 사람들은 부처님이 스님을 인도해 간 것이 분명하다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암자가 있는 산을 가섭산(迦葉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가섭존자(迦葉尊者)는 석가모니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으로, 부처가 죽자 손수 다비식을 집행한 인물이다. 그후 가섭존자는 부처가 살아생전 죽림정사로 가는 도중에 입었던 가사(袈裟)를 지닌 채 중인도 마가타국에 있는 계족산을 반으로 갈라 그 사이로 들어가,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이 나타나면 전하기 위해 수행 정진하고 있다고 한다.


미륵신앙이란, 가섭존자가 기다리고 있는 미륵불이 이 땅에 왕림하여 전쟁과 가난이 없는 극락세상을 만들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충청북도 지역은 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에 걸쳐 특히 미륵사상이 강력한 신앙 기반을 형성했는데, 이는 삼국시대 충청북도 지역이 고구려·신라·백제의 각축장이었다는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삼국의 각축장이었던 이 지역에 전쟁이 없는 평화 염원의 갈구가 고려 전기 지명으로까지 나타난 것이다.


<감로정(甘露井)>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용산리의 가섭사에 있는 우물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가섭산 마루턱에 있는 가섭사는 본래 초라한 암자였다가 고려 후기인 공민왕(1352~1374) 때 나옹화상 혜근(惠勤)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감로정>은 아무리 많은 사람이 먹어도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가섭사의 우물이다.


가섭사에는 오랜 옛날부터 돌 틈에서 솟아나오는 차고 감미로운 우물이 있는데, 주변 사람들은 이것을 감로정(甘露井)이라고 부른다. ‘부처님 오신 날’에 이곳을 찾아오는 수백 명의 신도들이 하나밖에 없는 이곳 감로정에 의존하고 있으나 물이 부족해서 곤란을 겪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감로정은 특이하게도 나라에 변고가 생기면 갑자기 물이 줄어들거나 고갈되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1945년 8월 15일 나라가 해방되던 해에 갑자기 물이 나오지 않더니, 5년 후인 1950년 6·25전쟁 때에는 약 일 주일 정도 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후 이곳 사람들은 감로정의 수량을 보고 나라의 중대한 변화를 짐작한다고 한다.


<공기바위 전설(공기바위 傳說)>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평곡리에서 시루산 정상에 있는 바위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음성군에서 동쪽으로 약 700m 지점에 해발 393m의 수정산이 있다. 그리고 이 수정산에서 남쪽으로 마주보이는 곳에 속칭 시루산이라고도 하는 증산이 서 있다. 이 시루산 정상에는 직경이 3m 정도 되는 바위가 있는데, 사람들은 이 바위를 공기바위, 또는 장수바위·시루바위 등으로 부른다.


오랜 옛날 수정산 정상에서 한 장수가 따뜻한 봄볕을 받으며 사방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천둥이라도 치는 듯 큰 소리가 들려왔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남쪽으로 약 20리쯤 떨어져 있는 증산에서 웬 장대한 사나이가 낮잠을 자면서 내는 콧소리였다. 수정산 장수는 시끄러운 소리를 잠재우려고 조그마한 돌을 던져 증산 장수의 발을 맞추었다.


증산 장수는 달콤한 낮잠을 깨운 게 누군가 하고 사방을 둘러보다 수정산 장수를 발견하고는, 옆에 있는 직경이 3m 정도 되는 바위를 집어 수정산으로 던졌다. 이것을 본 수정산 장수는 흡사 공깃돌이라도 되는 듯 거대한 바위를 가볍게 받아서 다시 증산으로 되던졌다. 거대한 바위가 바람을 가르면서 수정산과 증산 사이를 오가자 고을 사람들은 엄청난 힘을 가진 두 장수의 괴력에 탄복을 금치 못했다.


그후로 두 장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바위를 던지고 받으며 힘을 기르고 정기를 다듬었는데, 어느 해인가 갑자기 증산에 바위를 놓아 둔 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풍설에 의하면 두 장수는 땅 속에서 5백 년, 물 속에서 5백 년, 불 속에서 5백 년, 합해서 천오백 년 동안 수행을 한 뒤 서천으로 들어가, 천지개벽을 하는 날 이 땅에 나와 천하를 다스릴 것이라고 한다.


<까치섬 전설(까치섬 傳說)>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평곡리에서 전해 내려오는 까치섬에 얽힌 지명 전설이다.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음성천을 따라 남쪽 원남면 보천리 방면으로 약 1㎞ 떨어진 지점에 오리정교와 구안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곳의 평야에 흡사 뭍에 있는 섬처럼 둥그런 모양을 한 구릉지를 볼 수 있다. 이곳은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평곡리와 신천리, 그리고 원남면 하노리의 3개 리가 접하는 곳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음성평야에 섬처럼 둥그렇게 솟아 있는 이곳에는 소나무가 많아 사시사철 어느 때나 까마귀와 까치가 모여들어 사람의 눈길을 끌어 왔다. 이것으로 인해서 이 고장 사람들은 이곳을 까치섬[鵲島]이라 불러오고 있다.


조선 전기에 음성현에서 궁중으로 진상하는 진상물(進上物)은 대체로 약재였다. 그런데 어느 해 현리가 진공물(進貢物)을 챙겨 들고 지정된 창고에 들어가 고지기[庫直吏]로부터 물품 확인을 받게 되었다. 고지기가 장부를 살피다가 음성에 해산(현재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석인리와 평곡리 경계 지점에 있는 소지명 ‘바다뫼들’)과 작도(鵲島)가 있으니 해변의 고을이냐고 물었다.


이때 현리는 음성은 해변 고을이 아니라 내륙 고을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고지기는 ‘바다 해(海)’ 자와 ‘섬 도(島)’ 자가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에 현리는 토지가 바다와 같이 넓고 비옥하므로 ‘바다 해(海)’ 자를 쓰고 까치가 잘 모여드는 뫼가 섬처럼 평야 가운데 있기 때문에 ‘작도’라 부르고 있다고 대답을 하였다. 그런데도 고지기는 그럴 리가 없으니 내년부터는 진상 물목(物木에) 굴비를 첨가하여 진공하라고 하였다. 현리는 고지기가 농담을 하는 줄 알고 우습게 여기면서 돌아왔다.


그런데 다음 해 음성현리가 지정 진공 물목인 한약 건재를 가지고 올라가서 물목을 검사받았는데 고지기가 장기를 펼치며 확인을 하다가 음성현 진공물 목록에 굴비가 있는데 어째서 진상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이에 현리가 음성은 바다가 없는 내륙 지역이므로 굴비가 생산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지기는 장기에 굴비가 엄연히 물목으로 적혀 있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고 호통을 쳤다. 음성현리는 난처해서 지난해 고지기와의 대화를 되풀이하여 설명했으나 지리 사정에 어둡고 문서에만 의존하는 고지기는 이해하지 못하고 당장 굴비를 진공하라고 힐책을 했다. 현리는 하는 수 없이 서해안으로 사람을 보내어 굴비를 사서 진상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일이 소문이 나자 사람들은 중앙 관서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었고 충청도 사람들의 온순함을 말하였다.


이와 같은 터무니없는 굴비 진상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 뒤 진공물을 총괄하는 관리가 진공 물목을 살피다가 음성현에서 굴비가 들어왔음을 보고 고지기를 크게 꾸짖어 그 무식함을 책하고 당장 중지시키도록 하였다. 이로써 궁중 고지기의 웃지 못할 무식이 자아낸 음성현의 굴비 진상 사건은 3년 만에 종결되었다.


<멱바위>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평곡리 음성천 변에 있는 멱바위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음성천 냇가에 있는 바위로, 이 바위 주변 냇가에서 미역을 채취했다는 전설이 있어 미역바위라 하다가 멱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멱바위는 선비들이 한가로이 놀다가 바위에 ‘용암(龍巖)’이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다 하여 용암이라고도 한다.


옛날에 한 현감이 자기가 죽으면 ‘용’자가 든 곳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하였는데, 그 현감의 상여가 멱바위에 이르러 꼼짝도 하지 않자 멱바위에 묻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명의 염두경(名醫 廉斗璥)>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전해 내려오는 명의 염두경에 관한 이야기이다.


염두경은 고려 말의 명재상 염제신의 17세손이다.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깨달음이 빠르고 학문에 전심하는 끈기가 있어 지식이 일취월장하였으나 과거를 보아 출세하는 데는 뜻을 두지 않고 질병에 허덕이는 만민을 구하겠다는 높은 뜻을 간직하고 의술을 익히는 데 정진하였다.


모든 의서(醫書)를 통독하여 그 기술에 통달하게 되니 자기 나름대로 신기로운 치료법과 생약 투여법을 개척하게 되었다. 당시 환자들은 생계를 꾸려 나가기 위해 자기 나름대로 집안에서 구하기 쉬운 사제약(私製藥)으로 치료하다가 병이 더욱 악화되면 인근 약방을 찾아 그럭저럭 치료하였으며, 더욱 악화되어야 비로소 전문의를 찾아갔다.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던 염두경은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생약재나 값싸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치료하여 환자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는 인술(仁術)을 개척하였다. 이렇게 되니 염두경을 찾는 환자는 계속 늘어났으며,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중환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염두경은 명의라는 소문이 자자해졌다.


한번은 음성현감 박종영이 풍화병(風化病)에 걸려 종기의 형상으로 머리가 빠지는 증상이 심해져서 생명이 위독하였다. 염두경이 진찰하여 율무죽 미음을 장복하게 한 결과 신통하게 효과를 얻어서 얼마 후에 완쾌되었다 한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충주 가금면에 살던 정판서는 오랫동안의 고질병인 두통을 앓다 못하여 당시는 한다하는 세도재상인지라 맏아들 정운하를 염공의 약방에 보내어 명약을 구해오도록 하였다. 자기 집 세도를 등에 업은 정운하는 염두경을 만나자 평인사(平人事)도 제대로 하지 않고 오만불손하였다.


이에 불쾌해진 염두경은 “나는 본래 빈한하기 때문에 약재도 없거니와 약방문(藥方文)을 쓸 종이조차 없노라, 그렇게 병이 위급하거든 도포자락이라도 펼쳐 놓아라.” 하였다. 정운하는 속으로는 불쾌하였지만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 할 수 없이 도포자락을 내놓고 간청하였다.


염두경은 유유히 붓을 들어 정운하의 옷자락 한 면에 보기 싫도록 약방문을 가득히 써 주었다. 이리하여 돌아간 정운하는 아버지 정판서에게 사실 일체를 복명하니 정판서는 크게 노하여 아들을 책망하였다. 정판서는 “아비의 병이 중하다고 알면 선생 앞에 절하는 것쯤이 무엇이 문제냐! 더구나 선생이 노인이라면 경로(敬老)의 예절쯤은 지킬 줄 알았어야지, 그런 불손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이냐!” 하고 크게 꾸짖었다 한다.


후에, 염두경의 처방대로 약을 구하여 복용하자 정판서는 금방 오랜 고질병이었던 두통을 낫게 되었다. 이에 고맙기도 하거니와 불손한 자신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인술을 펴 준 데 대해 감격한 정운하는 그 길로 염두경을 찾아가 자신의 결례를 백배사죄하고 융숭하게 염두경을 대접하였다. 이후 두 집안은 서로 도와 가며 매우 우의 깊게 지냈다고 한다.


<음성 초대현감 옹몽진(陰城 初代縣監 邕夢辰)>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전해 내려오는 초대 음성현감 이야기이다.


‘음성 초대현감 옹몽진’은 음성현의 초대 현감으로 선정을 베풀어 지역민의 존경을 받았던 옹몽진(邕夢唇)과 관련하여 전해 오는 이야기이다. 옹몽진은 조선 중기 명종 때의 사람으로 순창옹씨 시조이기도 하다.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음성향교 앞뜰에는 역대 현감과 군수, 읍면장들의 공덕비가 열을 지어 서 있는데, 그중에 가장 오래된 비가 바로 초대 음성현감 옹몽진의 선정을 기린 유애비(遺愛碑)이다.


옹몽진은 어려서부터 착하고 부지런하였다. 어느 날 향교 앞을 지나가는데, 학동과 선비들이 글을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람이 세상에 났다가 까막눈이 되어서는 안 되지. 무언가 많이 배워서 입신은 못하더라도 저 향교에서 공부하는 선비들처럼 글을 알아야 사람구실을 할 수 있으리라.’ 하고는 글 배우기를 결심하였다.


그날부터 옹몽진은 향교에 들어가서 낮에는 향교에 딸린 논밭일을 하고 밤에는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혼자 공부하다 모르는 것이 나오면 표시해 두었다가 선비나 학동들에게 물어서 배우니 학문이 일취월장이었다. 그렇게 공부하기를 얼마 후, 한다 하는 선비들도 감탄하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시험삼아 향시에 응시하여 쉽게 급제하고 이어 복시에도 합격한 뒤 문과에도 급제한 옹몽진은 향교의 고직일을 맡아 보면서 관직이 제수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도록 조정에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기다리다 못해 다시 중과시를 보았는데 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관직은 제수되지 않았다.


하루는 봄철이라 고직녀와 밭을 갈고 있는데, 한양에서 남쪽 보은으로 부임하는 신임 사또의 행차가 지나간다. 앞서가는 길라잡이가 “이리 비켜라! 저리 비켜라! 사또님 행차시다!” 벽제 소리도 요란하니 위세가 당당하였다. 옹몽진이 보고 있자니 배알이 틀렸다. 고직녀를 불러서는, “가서 신임 사또한테 신임하례를 들이게 하라.” 하였다.


고직녀가 그 뜻을 전하니 신임 사또가, “나는 중시에 급제한 사람이니 그럴 수 없다고 일러라.” 한다. 옹몽진은 그 말에, “중시에 급제한 사람이 어찌 사또뿐이랴. 나는 중증시에 급제하였으니 어서 신례를 들이도록 일러라.” 하였다. 그 말이 사또에게 다시 전해지자, “나도 중증시에 급제했으니 그럴 수 없다고 여쭈어라.”한다.


일이 이쯤 되니 옹몽진은 좀더 화가 올라서, “허, 중증시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먼저이니 어서 신례를 드리라 일러라.” 하였다. 이 말에 신임 사또는 깜짝 놀라서 멍석과 차일을 펴게 하고 옹몽진을 상석에 모신 뒤 엎드려 절하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며 시와 학문을 논하니, 금방 시간이 지나갔다. 마침내 신임 사또가 떠날 시간이 되었다. 신임 하례를 받았으니 답례를 해야 할 텐데, 들판 한가운데에 있다 보니 줄 만한 것이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는데 조금전까지 밭을 갈던 황소가 쟁기줄에 매어 있다. 옹몽진은 옳다 싶어서, “내가 신례를 받았으나 답례할 것이 마땅치 않아 이 황소를 드리니 팔아서 비용에 쓰시오.” 하고 아낌없이 선사하였다. 그 후 두 해 뒤에, 그때의 보은군수는 내직으로 들어가 승정원 승지일을 맡아 보게 되었다. 어느 날, 임금이 승정원에 납시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외직에 있던 일을 하문받자 옛 보은군수는 문득 옹몽진과의 일이 생각나, 옹몽진의 인물 됨됨이와 박학다재한 학문을 칭찬하며 그의 불우한 처지를 자세하게 이야기하였다.


임금은 옹몽진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곧 기별을 넣어 옹몽진에게 상경하도록 명을 내렸다. 옹몽진은 갑작스런 명에 부랴부랴 차비를 하고 4~5일 길을 재촉해서 대궐문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수문장이 보아하니, 옷은 남루한데다 말씨도 촌스럽고 부들부들 떠는지라 잡상인이라 생각하고 소리를 꽥 질러 쫓아 버렸다.


옹몽진은 저만큼 쫓겨났다가 정신을 가다듬고는, ‘상경하라’는 임금의 증표를 수문장한테 내보였다. 그제야 수문장이 깜짝 놀라면서, “아니, 왜 진작 증표를 보이지 않고 떨고만 있었소.” 하면서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하여 임금 앞에 부복하고 배알하니, “네 소원이 무엇인고?” 하고 하문하였다. 생전 처음 임금 앞에 나아간지라 부들부들 떨렸으나 워낙 우직한 성품인지라, “소인은 평생 음성향교의 고직이오니 그리 하렴하여 주사이다.” 하니, 주위에 있던 신하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임금은 옹몽진의 순박하고 꾸밈없는 마음씀과 재질을 귀중하게 생각하여 음성현감을 제수하였다. 그리고 옹몽진에게만은 임기를 적용하지 말고 죽을 때까지 현감을 하도록 특명을 내렸다. 그러고는 당시에는 음성에 고을이 설치되지 않았을 때여서, 충주목에 명하여 동면과 서면·남면을 떼어 음성현을 설치토록 하고 초대 현감으로 옹몽진을 앉혔다.


그때 군내의 부역이 심하고 빈민이 많아서 민심을 수습하고 군정을 정돈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옹몽진 현감은 군내의 유력한 인사인 유눌(柳訥)을 불러서 군행정의 방법을 상의하고 손수 선두에 서서 선정을 베푸는 데 힘을 썼다. 무엇보다 무거운 세금을 줄이고 백성의 뜻에 따라 시책을 하나씩 시행해 나가니 백성들이 안심하고 부지런히 생업에 힘써 곡식이 창고에 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농민은 격양가를 부르고 글방에서는 글소리가 높으니 군민 중에 옹현감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고, 옹현감을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마침내 옹현감이 나이 들어 죽자, 그 덕을 기리기 위하여 군민의 이름으로 유애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신과 충효문(李信과 忠孝門)>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감우리에서 전해 내려오는 효자 이신 이야기이다.


조선 중기 음성읍 감우리에는 홀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이신이란 사람이 있었다. 성정이 바르고 효성이 지극했던 이신은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온 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약과 치료 방법을 배워서 정성껏 병간호를 하였으나 아버지의 병은 점점 더 위독해져 갔다.


이신은 돌아가신 어머니처럼 아버지도 세상을 뜰까 봐 노심초사 어쩔 줄 몰라했다. 그리하여 밤마다 장독 위에 정화수를 길어다 놓고 신령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신아, 동네 앞 연못 깊은 곳에 잉어가 있으니 그것을 잡아다 고아 드리면 아버지 병이 나을 것이다.” 하였다.


이신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뒤 곧 연못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한겨울에 두껍게 언 연못은 도끼로 내리쳐도 깨어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이신은 웃옷을 벗고 자신의 체온으로 얼음을 녹이기로 작정하였다. 이윽고 얼음이 녹기 시작했으나 반대로 이신은 정신을 읽고 말았다.


그때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신아, 어서 일어나 잉어를 잡아라.” 하고 일러주었다. 놀라서 정신을 차리니, 자신의 체온으로 녹은 구멍 속에서 잉어가 입을 내밀고 뻐끔거리고 있었다. 얼른 잉어를 잡아서 집으로 가져와 아버지께 고아 드리니 바로 쾌차하였다. 이신은 산신령께 감사기도를 올리고 잉어에게도 고마운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이신은 군대에 들어가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이 소식을 들은 동네 어른들이 이신이 잉어를 잡은 소가 있는 언덕 위에 충효문을 세우고 잔치를 열어 이신의 효행을 칭찬해 주었다.


<흔행이고개>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에서 전해 내려오는 흔행이고개의 지명 전설이다.


조선시대 형장이면서 풍장을 하던 장소가 시대가 흐르면서 지명이 되었다. 흔행이고개는 흉한 일이 행해지던 고개라는 뜻을 지닌 흉행이고개[兇行峙]가 음전되어 불리는 지명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조선시대 헌종 때 음성현감이 죄수를 잡아 사형을 집행하던 장소라고 하며, 전염병에 걸려 죽은 시체를 더금뫼(仮葬法: 풍장제의 일종)하던 곳이라고 한다.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역말에서 신천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예로부터 흔행이고개라고 한다. 조선 중엽 어느 장사치 한 사람이 돈이 가득 담긴 전대를 허리에 차고 이 곳 고개를 넘는데 별안간 산적떼를 만나게 되었다. 도적들은 손에 칼을 들고 몸에 지니고 있는 돈을 모두 내놓으라고 협박을 했다.


그러자 장사치는 몸에 지닌 돈이 하나도 없다고 했고, 도적들은 장사치를 엎어놓고 허리를 뒤지어 전대를 풀러냈다. 그리고 돈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반항을 하는 장사치를 고개에서 참살하고 말았다. 그 후부터 이 고개에서 흉측한 참사가 자꾸 일어났다.


그래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 곳 고개에는 썩어가는 시체의 흉한 모습과 참을 수 없는 냄새로 코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러자 조선 헌종 때에 이르러서는 음성현에서 죄수를 참수하는 장소로 이용했고,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몰래 이곳에 시체를 버리기도 했다. 그래서 흉측한 고개라고 해서 고개 이름을 ‘흉행을 하는 고개[兇行峙]’라고 불러온 것이 오늘날 흔행이고개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전해오고 있다.


금왕읍

<꾸어준 돈 백냥(꾸어준 돈 百냥)>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에서 전해 내려오는, 인색한 친구 골려 준 이야기이다.


배포 좋기로 소문난 한량이, 친구의 소실한테 은근히 눈독을 들여 오다 조용한 기회를 타서 수작을 걸었다. 원래 기생이었던 이 여자는 사내의 유혹에 마음이 끌리면서도 이왕이면 꿩 먹고 알 먹자는 심산으로, “비단 옷 한 벌을 장만해야겠는데 영감이 지독한 노랭이라 말을 꺼낼 수가 있어야지요. 한 백 냥만 있으면 그럭저럭 허름한 것 하나는 해 입으련만.” 하면서 은근히 다짐을 두었다.


한량은 액수가 많은데 놀라긴 했으나, 이내 한 꾀가 생각나는지라 내일 해주마 약속하였다. 그 길로 한량은, 큰마누라 집에 있는 친구, 즉 인색하기로 근동에 소문이 자자한 소실의 남편을 찾아가서 내일 주겠다고 약속하고는 떼를 쓰다시피 하여 돈 백 냥을 꾸어다 계집에게 주고 정을 통하였다. 며칠 후 돈을 꿔준 친구가, “여보게, 일전에 꾸어준 백 냥은 어떻게 되었나? 바로 돌려준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거 급한 돈일세.” 하고 재촉하였다. 그러자 한량은, “아니, 그건 그 이튿날 자네 소실에게 가져다 주었네. 아무 말 안하던가?” 하였단다.


<민발의 묘(閔發의 墓)>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급 유촌리 능골에 전해 내려오는 민발에 관한 이야기이다.


금왕읍 소재지 남쪽 진천 방향으로 5㎞ 위치에 유촌리 윗가래들이 있고, 이곳에서 남북으로 뻗은 차도를 따라 아래가래들로 들어가는 곳에 유촌리 능골이 있는데, 이곳에 조선 전기의 공신 민발(閔發)의 묘가 있다.


민발이 세상을 떠난 후 백여 년이 지난 어느 해, 후손이 묘제를 지내게 되었다. 그 때 산지기가 제수용 벼를 멍석에 말리는데, 어디선가 날아온 참새가 멍석 위에 있던 벼를 쪼아 먹고는 모두 그 자리에서 떼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이를 괴이하게 여긴 산지기는 얼른 그 사실을 민발의 후손들에게 알렸다.


후손들이 달려와 현장을 확인하고는 다시 한 번 민발의 혼령이 영덕(靈德)하고 위엄 있음에 모두들 탄복했다. 이로부터는 민발의 묘제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모두 목욕재계하고 마음가짐을 단정히 하며, 말과 행동을 신중히 하여 제를 모시는 데 예를 다했다고 한다.

 

<민정현의 천근지효(閔鼎顯의 天根之孝)>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신평리에 전해 내려오는 민정현의 효행에 관한 이야기이다.


선조 대의 효자 집안에서 태어난 민정현은 가풍의 영향을 받은 것도 있겠지만, 그의 효행은 철부지 어린 시절부터 특이하고 탁월하였기 때문에 ‘천근지효(天根之孝)’로 표현되었다.


태어난 지 7일 밖에 되지 않는 아기가 너무 지나치게 울고 야단이자, 그 외조부가 하도 기가 막혀 하는 말이 “얘! 너는 너무 우는구나. 끝내 그렇게 울다가는 네 어미도 고생깨나 하겠구나.” 하고 무심중에 얘기를 했더니 아기가 울음을 딱 그치고 다시 울지 않았다고 한다.


또 어머니 젖을 빨 때 어쩌다가 어머니 젖을 깨무는 때가 있었는데, 그때 어머니가 “아이 아파!” 하고 깜짝 놀라 소리를 치며 아기의 머리를 한번 딱 때리자, 다음부터는 일체 어머니 젖꼭지를 깨무는 예가 없었다 한다.


민정현이 4살 때 부모가 아파서 누워 있으면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들지 않았고, 8살에 아버지 병이 위중하여 간호하는데 어른처럼 하였으며, 더욱 아버지 병이 위중하니 손가락을 잘라 단지 수혈함은 보통이었다. 아버지 병환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너무 울어 눈이 붓고 충혈이 되어 의사가 그의 안질을 염려하자, “나의 눈병 따위가 무슨 염려입니까? 내 아버지 병만 고치면 나는 금시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한다.


스무 살 즈음에 아버지 병이 다시 위중해지니 민정현은 매일 저녁 소리 죽여 울면서 천지신명에게 빌었다. 또 아버지가 신선한 생선을 먹고 싶다고 하자 엄동설한에 구할 길이 없어 애태우고 있는데, 우연히 어떤 사람이 찾아와 생선 10마리를 주고 갔다. 이것이 모두 하늘이 시킨 일이며 또 하늘에서 낸 효자이기 때문이라고 이웃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민정현은 자신의 사망 날짜를 예언한 얼마 뒤, 2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향당(鄕黨)의 동지인(同知人) 400여 명이 모여 조정에 그의 효행을 알렸고, 조정에서는 정문을 내렸다.

 

<바람부처>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용계리에 전해 내려오는 바람부처에 관한 이야기이다.


금왕읍 소재지인 무극리에서 남쪽의 맹동면 방면으로 약 5㎞ 이르는 곳에 오향골이 있다.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소속리산(432m)이 있고, 소속리산에서 동쪽으로 능선을 넘어 상촌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는데, 이곳을 꽃너미재라고 한다. ‘바람부처’는 꽃너미재에 있던 꽃너미절에 관한 이야기이다.


꽃너미재에 있던 꽃너미절이 폐사되자 누군가가 꽃너미절에 봉안했던 석불을 병풍바위 굴에 가져다 놓았다. 석불의 높이는 약 30㎝ 정도이고, 화강암 단석으로 다듬어진 좌불상이다. 그런데 용계리 사람들이 소속리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불상을 만지거나 굴 밖으로 내놓으면 이상하게도 그날 하루는 산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산에서 바람이 불게 되면 앞나무짐을 지는 데 많은 고생을 하게 될 뿐만 아니라 나뭇짐을 지고 하산할 때 중심을 잡을 수가 없어서 잘못하면 넘어지는 경우까지 있어 나무꾼들은 산바람에 몹시 겁을 낸다. 그래서 용계리 사람들은 혹시 철없는 아이들이 불상을 만지지나 않을까 몹시 걱정을 하게 되었다.


이처럼 신기한 일이 생기면서부터 사람들은 불상을 가리켜 ‘꽃너미절의 바람부처’라고 부르게 되었다. 불상은 오랫동안 병풍바위 굴속에 안치되어 있었는데, 1934년경 어떤 무당이 그 불상을 가져갔다고 하며, 이후 그 불상은 자취를 감추었다고 전한다.


<애 업은 바위>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쌍봉리에 전해오는 애 업은 바위에 관한 설화이다.

(우등산 전경)

 


금왕읍 쌍봉리 동쪽에 해발 266m의 우등산이 있는데, 그 우등산으로 향하는 계곡 산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바위가 하나 있다. 그 바위의 모양이 흡사 여인이 어린 아기를 업고 있는 듯하여 사람들은 이 바위를 ‘애 업은 바위’ 혹은 ‘아기 업은 바위’라고 부른다.


옛날 우등산 기슭에 큰 마을이 있었는데, 마을 어귀에서 조금 떨어진 넓은 터에 고대광실 같은 집을 짓고 살아온 장자(長者)가 있었다. 처음에는 제법 인간미가 있었으나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마음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깔보고 업신여기며 항상 교만하였다. 그의 몰인정하고 오만한 성격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그를 경원하는 마을 사람들은 점차 장자 집일을 거들어 주기를 꺼려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장자 집 대문 앞에서 노승이 시주할 것을 청했다. 때마침 외양간에서 오물을 쳐내고 있던 장자는 노승을 힐끗 바라보더니 노승이 가지고 있는 발(鉢)에 오물을 한 바가지 퍼부었다. 그리고 이것으로 농사를 지어먹는 것이니 쌀보다도 더 귀중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늙어 일을 못하게 되니까 공연히 발이나 들고 다니면서 구걸 행각을 벌인다고 매도하였다.


봉변을 당한 노승은 눈을 감고 잠시 대문간에 서 있다가 결국 장자에게 쫓겨나고 말았다. 밖에서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노승은 어떤 일을 결심한 듯 조용히 우등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동구 밖 어귀 느티나무 있는 곳에 이르자 한 여인이 쌀 한 되를 들고 노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노승이 사연을 물으니 그 여인은 장자의 며느리로 시아버지가 노승에게 불손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시아버지 몰래 쌀 한 되를 퍼 들고 나와 이곳에서 스님을 기다렸노라하며 시아버지의 무례함을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자 노승은 집에 젖먹이 아이가 있느냐고 물었다. 여인이 아기가 있다고 말하자 산에 올라가 할 말이 있으니 속히 집으로 돌아가 아기를 업고 나오라고 했다. 이에 며느리가 급히 집으로 달려가 아기를 업고 나오자, 노승은 그녀를 데리고 우등산 계곡으로 들어가면서 뒤에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돌아보지 말라고 하였다. 여인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서 노승의 뒤를 따라 계곡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뒤에서 뇌성벽력이 치는 소리와 함께 굉음이 들려왔다.


그러자 며느리는 노승의 말을 깜박 잊고 그만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그런데 그녀의 눈에 비친 모습은 너무나도 처참한 광경이었다. 장자가 살고 있던 집 자리가 커다란 방죽으로 변하면서 그녀의 시아버지가 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지붕에 올라앉아 필사적으로 구원을 청하고 있었다.


여인이 무심코 “아버님!”하고 소리를 쳤으나 입이 굳어져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점차 온 몸이 굳어지면서 아기를 업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화석이 되어 버렸다. 그 후 이 곳 사람들은 마을 어귀에 생긴 호수를 ‘장자방죽’이라 하고, 우등산 계곡에 화석이 된 모자(母子) 바위를 ‘애 업은 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


<예순티고개 설화(예순티고개 說話)>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육령리에 전해오는 예순티고개에 관한 설화이다.


예순티고개는 부용산의 한 고개로 예순 사람 이상이 함께 가야 봉변을 면할 수 있다 하여 예순티고개라 부른다. 육령1리의 자연 마을인 예순터의 지명 역시 여기서 비롯되었다.


예순티에서 능말로 넘어가는 고개로 옛날에는 인가도 없고 수목이 우거져 산적떼가 이곳에 은거해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고개를 넘다가 산적들에게 봉변을 당하는 일이 많았는데, 산적들에게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 예순 사람 이상이 모여서 함께 고개를 넘어 갔다고 한다. 그 후 이 고개를 넘으려면 60명이 있어야 한다는 뜻에서 ‘예순티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예부터 수목이 우거진 고개에는 사고가 많아서 해가 저물거나 혼자 길을 떠나면 큰일을 당할 염려가 많았다. 그래서 적게는 서너 명, 많게는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고개를 넘었다. 이 이야기 역시 산적에 의한 봉변을 막기 위해 많은 인원이 모여서 화를 막고자 하는 이야기이며, 그러한 행동이 지명으로 쓰이게 되었다. 예순티라는 지명에서 육령리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많은 조사가 필요하다.


<이광하의 효(李光夏의 孝)>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행제리에서 전해 내려오는 효자 이광하 이야기이다.


음성군 금왕읍 행제리에는 1893년(고종 30) 이광하에게 내린 효자정문이 세워져 있다. 당시 조정에서는 이광하의 지극한 효성을 치하하여 이조참의를 증직하고 정문을 내렸다고 전한다.


이광하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효성으로 부모를 봉양하여, 인근에 효자로 자자하게 소문이 났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병환으로 드러눕자 이광하는 어머니의 변을 맛보아 병세를 확인하며 지성으로 기도를 드렸다. 한번은 병중에 있던 어머니가 생선이 먹고 싶다고 하였으나 구할 길이 없어 근심하던 차에, 우연히 손님이 생선 몇 마리를 갖고 방문하여 정성껏 해드리니 어머니의 병이 나았다.


그후 또 어머니가 병중에 꿩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이광하는 바로 뒷산으로 올라가 꿩을 잡으려고 하였으나 어림없었다. 하루 종일 산을 헤매어도 잡을 수 없자 무릎을 꿇고 울면서 산신께 빌었더니, 난데없이 꿩 몇 마리가 무릎 앞에 떨어졌다. 산신께 감사하며 어머니께 고아 드리니 병이 다 나았다. 이런 일이 세상에 알려져 나라에서도 큰 상을 내리고 칭찬하였다.


<자린고비 조륵 이야기(자린고비 趙勒 이야기)>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삼봉리에서 전해 내려오는 자린고비 조륵의 인물 이야기이다.


자린고비는 예부터 ‘구두쇠’, ‘지독하게 인색한 사람’, ‘지독하게 절약하는 사람’ 등의 뜻으로 통한다. 한때 조선 제일의 자린고비로 불렸던 조륵(1649~1714)은 음성군 금왕읍 삼봉리 사람으로, 근검절약하여 큰 부자가 된 뒤 어려운 백성들을 많이 도와 가자(加資: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를 올리는 일)까지 받았다고 한다.


조륵이 얼마나 구두쇠였나면, 쉬파리가 장독에 앉았다가 날아가자 다리에 묻은 장이 아깝다고 “저 장도둑놈 잡아라.” 하고 외치며 단양 장벽루까지 파리를 쫓아갔다. 무더운 여름철이 되어 어쩌다 부채를 하나 장만한 조륵은, 부채가 닳을까 봐 부채를 벽에 매달아 놓고 그 앞에서 가서 머리만 흔들었다.


어느 날은 동네 사람이 어쩌나 보려고 생선 한 마리를 조륵의 집 마당으로 던졌는데, 이것을 발견한 조륵이 “밥도둑놈이 들어왔다!” 하고 법석을 떨면서 냉큼 집어 문밖으로 내던졌다. 조륵은 일 년에 딱 한 번 고기 한 마리를 사는데, 다름 아닌 제사상에 놓을 굴비였다. 그리하여 제사를 지내고는 굴비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 밥 한 숟가락 뜨고 굴비 한 번 보고, 또 밥 한 숟가락 뜨고 굴비를 보았다.


식구들이 어쩌다 두 번 이상 보면, “얘, 너무 짜다. 물 먹어라.” 하고 소리쳤다. 어느 날은 장모가 놀러왔다가 인절미 조금 남은 것을 싸갔는데, 나중에 알고는 기어코 쫓아가 다시 빼앗아 왔다. 이렇게 일전 한 푼도 남에게 주거나 빌려주는 일이 없고, 인정도 사정도 눈물도 없이 모으고 또 모으다 보니 근동에서는 둘도 없는 큰 부자가 되었다.


그렇게 자린고비로 방방곡곡 소문이 날 대로 난 어느 날, 전라도에서 유명한 자린고비가 찾아와서 “조선생, 나도 전라도에서는 소문난 구두쇠인데, 어느 정도 구두쇠여야 큰 부자가 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조륵은 전라도 구두쇠가 묻는 말에 쓰다 달다는 말도 없이 한참을 있다가, “그러면 나와 같이 나갑시다.” 하고는 전라도 구두쇠를 데리고 충주 탄금대까지 갔다. 가는 길에 전라도 구두쇠는 신발을 아낀다고 교대로 한짝은 신고 한짝은 들고 가는데, 조륵은 아예 신발 두 짝을 모두 들고 갔다. 그것만 봐도 조륵이 한 등급 높은 자린고비가 분명했다.


조륵은 탄금대에 오르자 전라도 구두쇠한테, 시퍼런 강물이 굽이쳐 흐르는 강물 쪽으로 뻗은 소나무가지에 매달리라고 하였다. 전라도 구두쇠는 영문을 몰랐지만, 큰 부자가 되고 싶은 일념에 소나무가지에 매달렸다. 그러자 조륵이, “이제 한쪽 팔을 놓으시오.” 하였다. 그대로 따라했더니 한참 후에, “됐소. 이젠 한쪽 팔도 놓으시오.” 한다. 전라도 구두쇠는 시퍼렇게 질려서, “아니, 그러면 저 강물에 빠져죽지 않습니까?” 하고 소리쳤다.


아니나 다를까, 몇십 길 되는 낭떨어지 밑에는 시퍼런 강물이 굽이치며 혀를 낼름거리고 있었다. 전라도 구두쇠는 얼른 두 손으로 나뭇가지를 붙들더니 죽을 상이 되어 벌벌 떨었다. 그제야 조륵은, “그러면 이제 올라오시오.” 하고는, 전라도 구두쇠가 땀을 뻘뻘 흘리며 나뭇가지에서 벗어나자, “큰 부자가 되려면 예사로운 구두쇠 정도로는 안 됩니다. 방금 전 나뭇가지에 매달려 죽게 되었을 때의 순간을 잊지 마시오. 만사를 죽기를 각오하고 실행한다면 목적한 일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오.” 하고 말했다. 전라도 구두쇠는 조륵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전라도 구두쇠는 조륵의 사랑방에서 자게 되었는데, 몇 년을 내버려두었는지 창구멍이 뚫어져서 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전라도 구두쇠는 주머니에 들어 있던 창호지 조각을 꺼내어 저녁밥을 먹을 때 남긴 밥풀 몇 알을 붙여서 대강 창구멍을 가리고 잤다. 그러고는 아침에 조륵의 집을 나서면서, “조공! 문에 발랐던 종이는 내 것이니 뜯어 가렵니다.” 하였다. 조륵은 눈빛 하나 변하지 않으면서, “암요, 떼어 가시오.” 하였다.


그리하여 전라도 구두쇠가 많은 것을 배웠다는 기쁨에 활개를 치며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와 무슨 일인가 하고 돌아보니 조륵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전라도 구두쇠 앞으로 온 조륵은 턱에 받친 목소리로, “그 창호지는 손님 것이니 가져가도 좋지만, 종이에 묻은 밥풀은 우리집 것이니 떼어놓고 가야 마땅하지 않소.” 한다. 전라도 구두쇠가 할 수 없이 창호지를 내어주자, 조륵은 준비해 온 목침 위에다 종이를 펼쳐 놓더니, 칼로 밥풀자리를 박박 긁어내어 주머니에 담아 가지고 갔다. 전라도 구두쇠는 “과연! 과연!” 하고 탄복하며 고향집으로 갔다.


이렇듯 지독한 자린고비 행색이 마침내 조정에까지 알려졌는데, 조정에서는 조륵의 이러한 행위가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판단하고는, 정확한 사실 여부를 알기 위해 암행어사를 파견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씨 성을 가진 암행어사가 과객 차림을 하고 조륵의 집에 가서 며칠 묵으며 사정을 알아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암행어사가 며칠 묵는 동안 보아하니, 조륵은 한양에서 소문으로 듣던 그 자린고비 조륵이 아니었다. 암행어사라고 눈치챈 것 같지는 않은데 식사때마다 진수성찬에 술까지 대접하고, 그야말로 칙사대접이 따로 없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어서 수소문해 보니, 조륵이 환갑이 되는 해부터 누구에게나 후하게 대하고, 어려운 이웃을 보면 불러다가 돈도 주고 쌀도 주는 등 아주 딴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암행어사가 사정을 알고 그만 떠나려고 인사를 하자 조륵은, “아니, 이삼 일만 더 있으면 내 환갑이니, 기왕이면 좀더 쉬다가 잔치나 보고 가시오.” 하였다. 그리하여 못 이기는 체하며 잔칫날까지 묵게 되었는데, 그날 조륵은 잔치에 모인 사람들에게, “여러분, 그 동안 나는 나 혼자 잘 살려고 구두쇠 노릇을 한 게 아니오. 오늘 찾아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도움이 되고자 한평생을 근검절약하며 재산을 모았소. 환갑날인 오늘부로 내 일은 모두 끝났소.” 하면서 전재산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암행어사는 임금께 조륵의 이러한 선행을 자세하게 고하였고, 임금도 기특하게 생각하게 친히 가자를 내리고 칭찬하였다. 그 후 조륵에게 도움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조륵을 ‘자린고비’가 아닌 ‘자인고비’라고 부르며 칭찬하였는데, 여기에서 ‘고’자는 “나를 낳아준 어버이”란 뜻이라고 한다.


소이면

<각시무덤>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의 모래재에 있는 묘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사람들이 ‘각시무덤’이라고 부르는 무덤은 소이면의 소재지인 대장리에서 서북쪽으로 1㎞ 떨어진 모래재라는 고개 중턱에 있다. 이 무덤은 조선 중기 음성군 원남면 마송리에 살던 청주고씨 집안의 고이후(高以厚)와 혼인을 앞두고 죽은 고흥유씨 처녀가 묻힌 곳이라고 전한다.


조선 중기인 인조 초에 소이면 후미리에 사는 유참봉에게는 용모가 단정하고 마음씨도 착해서 마을 사람들의 칭찬과 귀여움을 한몸에 받는 딸이 한 명 있었다. 유참봉 딸의 소문은 인근에 자자해서, 혼기가 차자마자 근동에서 제법 산다는 집안에서 혼담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유참봉 눈에는 어떤 집안의 총각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혼담이 들어오는 족족 퇴짜를 놓다 보니, 어느새 유참봉의 딸은 스물한 살이 되었다. 당시의 사회 풍조로는 노처녀 소리를 들을 나이였다.


그런데 때마침 유참봉과 친분이 있는 신씨가 중매를 하여, 원남면 마송리에 살고 있는 고흥유씨 집안과 연이 닿게 되었다. 신씨가 주선한 신랑될 사람은 훈련원주부를 지낸 고응연의 열여덟살 된 손자로 이름은 고이후였는데, 기상이 늠름하고 체구가 당당하며 대장부다운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내 양가의 합의에 따라 사주택일을 한 뒤 혼사 준비에 여념이 없던 어느 날, 유씨 처녀가 심한 열병을 앓다가 죽고 말았다. 결국 두 집안사람들과 중매를 섰던 신씨가 상의하여 유씨 처녀의 장사를 청주고씨 집안에서 지내기로 하였다.


후미리를 떠난 상여가 비산리 모래재에 와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출발하려고 할 때였다. 상여꾼들이 아무리 힘을 써도 상여가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상주인 고총각이 상여를 어루만지며, “천명을 다하고 이제 시집으로 가는데 어찌 발길을 떼지 않으시오. 앉은자리가 명당이라면 그 대답으로 발길을 떠보시오.” 하니까 비로소 상여가 움직였다.


유씨 처녀의 뜻을 알게 된 고총각은 집안어른들과 상의하여 상여가 멎었던 자리에 무덤을 마련하여 주었는데, 알고 보니 신묘하게도 그자리가 명당자리였다. 그후 상을 마친 삼 년 뒤 고이후는 성균관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이어서 세마(洗馬)에 추천되었으나 사관에 응하지 않고 향리에 머물며 공부를 계속하여 그를 따르는 선비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고이후는 평생을 두고 유씨 처녀를 생각하며 즐거운 감정을 외부에 표현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고씨 문중에서는 유씨 처녀의 묘를 벌초하는 등 관리하고 있다고 하며, 근처 마을 사람들은 비록 혼인을 치르고 죽지는 않았지만 고씨 집안과의 인연을 생각하며 이 무덤을 ‘각시무덤’이라 부른다고 한다.

 

<도깝보(도깝洑)>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금고리에 있는 도깝보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옛날 음성군 소이면 금고리에는 도깨비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하루는 마을에서 보(洑)를 만들기 위해 70여 명의 마을 장정들이 수멍돌(보에 물을 가두어 두기 위해 막아 놓는 돌)을 얹으려고 하는데, 돌이 너무 무거워 얹지를 못하고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놀랍게도 도깨비들이 그 무거운 수멍돌을 옮겨 보를 완성해 놓았다고 한다. 그 후부터는 이 보를 ‘도깨비가 쌓은 보’라고 해서 ‘도깨비보’라고 하였으며, 도깨비보가 줄어 ‘도깝보’가 되었다고 한다.


도깨비는 자연을 다스리고 액운을 막아 주는 상상물이자 수호신으로서 우리 문화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외적의 끊임없는 침입으로 억압과 고통 속에서 살아온 우리 민족의 염원이 도깨비 이야기를 통하여 고스란히 전해져 온 것이다.


<돌갓을 쓴 관속(돌갓을 쓴 官屬)>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충도리에서 지혜로운 원님에 관하여 전해 내려오는 민담이다.


아주 오랜 옛날 어느 곳에 스무 살의 젊은 나이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있었다. 몇 해 후 그는 한 고을의 원님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어떠한 원님이 올지 몹시 궁금히 여기던 고을의 백성들은 나이 어린 원님을 보고는 모두들 깜짝 놀랐다. 저렇게 어린 원님이 어떻게 고을을 다스릴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관아의 나이 든 관속(官屬)들은 관속들대로 젊디젊은 원님을 모신다는 것에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러니 자연 관속들은 원님이 시키는 일에 시큰둥하며 말을 잘 듣지 않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원님은 석수장이를 불러놓고 마당 한 구석에 있던 커다란 돌덩이를 가리키며 명하였다. “그 돌로 사람이 쓰는 갓을 여러 개 만들어라!” 이 말을 들은 석수장이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사또나리, 지금까지 돌을 가지고 사람이 쓰는 갓을 만들어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자 원님은 큰 소리로 호통을 치며 “만들라면 만들지 무슨 잔말이 그리 많으냐? 만일 만들지 못한다면 내 큰 벌을 내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석수장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자리에서 물러났고, 그 소식을 전해 들은 고을 사람들은 모두들 어린 사또라 별 수 없다며, 원님이 내린 명령을 비웃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석수장이는 원님의 명대로 여러 개의 돌갓을 만들어 왔다. 그러자 원님은 관속들에게 일일이 돌갓을 나누어 주며, “관아에서는 꼭 이 돌갓을 머리에 쓰고 일을 보도록 하라. 만일 그것을 어길 시에는 큰 벌을 내릴 것이다!”라고 엄히 명하였다.


머리에 무거운 돌갓을 쓰고 일을 보자니 관속들에게는 여간 큰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목이 똑 부러져 나갈 것만 같아 견딜 수 없었지만 감히 벗어 놓을 수도 없었다. 그제서야 관속들은 원님의 깊은 뜻을 알아차렸다. 그리고는 모두들 원님 앞에 꿇어 앉아 “사또나리 부디 저희들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고는 용서를 빌었다.


이에 어린 원님은 허허 웃으며 “돌갓을 씌운 것은 너희들의 오만한 마음을 고쳐 주려고 한 것이니, 지금이라도 잘못을 깨달았으면 돌갓을 벗어도 좋다!”라고 점잖게 말하였다. 겨우 무거운 돌갓에서 벗어난 관속들은 이후 진심으로 어린 원님을 존경하며 선정을 베풀도록 잘 모셨다고 전해진다.


<말무덤>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갑산리에 있는 무덤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갑산리 살구고개에서 남쪽으로 600m 쯤 떨어진 너치살이라고 불리는 산마루에 무덤 하나가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무덤을 말무덤(馬塚)이라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권길(權吉)은 경상도 상주판관으로 있었다. 상주에서 왜군과 치열한 접전을 치루고 있던 권길은 사태가 위급해지자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그 옷에 혈서로 유서를 남겼다.


내용은 ‘나라가 왜적에게 수모를 당하여 국운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것을 눈앞에 보게 되니, 이 나라에서 삶을 이어받아 조상의 넋을 이어받고 살아오던 내가 분통하고 억울한 마음 이를 데 없어 바야흐로 앞날이 캄캄하도다. 이에 나는 받은 국록의 대가를 다하려 이곳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죽고자 한다. 내가 죽으면 시체를 찾기 어려울 것이니 이 옷을 가지고 장사를 지내라’는 것이었다.


권길은 유서를 적은 옷을 말의 입에 물린 후, 채찍으로 한 번 후려치며 본가로 달리라고 호령하였다. 이에 말은 허공을 향해 크게 한 번 두 발을 올리고 난 후, 당시 권길의 사저가 있던 음성군 소이면 동역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조선군의 진중에서 입에 무언가를 물고 달려 나오는 말 한 필을 본 왜적들은 청군을 요청하는 전령 말이 틀림없다고 짐작하고, 말을 향해 일제히 조총을 쏘아댔다. 몇 발이나 총탄을 맞아 피를 흘렸으나 말은 질풍처럼 권길의 집을 향해 내달렸다.


권길의 말이 피투성이가 된 채 입에 옷을 물고 권길의 집으로 들어오자 이를 본 하인이 깜짝 놀라며 말의 입에서 옷을 빼내려 했으나 말은 고개를 옆으로 저으며 건네주려 하지 않았다. 이에 권길의 부인 창원박씨가 앞치마를 펼치고 말 앞에 들이대니 말은 비로소 물고 있던 옷을 앞치마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신음 소리를 내며 산기슭으로 달려가 그곳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유족들은 갑산리에서 충도리 윗볕돈[上陽錢]으로 넘어가는 덕고개[德峴] 오른쪽 양지바른 산마루에 정좌(丁坐)하여 권길의 시신 대신 혈서 적힌 옷을 장사 지냈다. 이와 함께 유족과 마을 사람들은 주인의 유서와 유물을 본가에 전하고 죽어간 충성스런 말을 기리기 위하여 말이 쓰러진 자리에 말을 묻어 주었다. 이 무덤을 일컬어 ‘말무덤’이라고 하며, 권길의 후손들은 해마다 벌초를 해오고 있다.


<삼고심이(三顧心이)>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금고리에 전해오는 지명 설화이다.


삼고심이는 김장골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1335~1408]가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삼방리로 배극렴(裵克廉)[1325~1392]을 찾아갈 때 이곳을 지나다가 세 번 돌아보고 갔다는 전설에 의해 석 삼(三), 돌아볼 고(顧), 마음 심(心), 마을 리(里) 자를 써서 ‘삼고심리’라 이름 붙여진 곳이다.


배극렴은 고려 말 왜구 토벌에 공을 세우고, 이성계의 휘하에서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도와주고, 한양 궁궐의 조성, 이성계의 병권 장악 등에 일익을 담당하며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과 함께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의 건국 과정에 중요한 소임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생바위(笙바위)>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에 전해오는 생바위에 관한 설화이다.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대장리에서 남북으로 약 4㎞ 지점에 비선거리가 있고 그 북쪽으로 충주시 신니면 화안리와의 군경에 해발 400m의 비산이 있다. 주봉인 가섭산의 줄기가 동쪽으로 내리뻗어 오다가 이곳에 이르러 주춤하면서 크게 뭉쳐 거대한 바위가 이루어졌는데 이 바위를 속칭 ‘생바위’ 또는 ‘생황암(笙篁岩)’이라 한다.


고려 중기 이 곳 화상골 절(미타사)에는 10여 명의 승려가 기거하고 있었다. 이곳 주지인 노승은 매우 시기심이 강하였고 겉보기만 중일 뿐 승려가 지녀야 할 자질은 조금도 갖추지 못한 인물이었다. 어느 해 봄날 노승은 절을 찾아와 공양을 올리는 어느 불제자의 관상을 보더니 그가 머지않아 득도견성(得道見性)할 인물임을 알아채고는 지병처럼 지니고 있는 시기심이 발작을 했다.


노승은 자신은 아직 도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한낱 공양주에 지나지 않는 불신도의 주제로 도를 얻는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그 공양주의 얼굴을 볼 때마다 오장이 뒤틀리고 참을 수 없는 증오심이 불 타 올랐다. 마침내 노승은 공양주를 해칠 것을 결심하고 그를 불러 생바위에서 몸과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좌염불(正坐念佛)을 하면 곧 등천할 것이니 그렇게 하라고 일렀다. 노승은 그가 생바위에 앉아 염불에 열중하고 있을 때 뒤에서 10여 길이나 되는 절벽 아래로 떠밀어 죽일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양주는 등천한다는 것은 도를 얻어 신선이 된다는 뜻인데, 자신은 도저히 그럴 만한 수양이 없는 처지라고 말하며 겸손하게 노승의 권유를 사양했다. 그러나 노승은 내가 이르는 말이 즉 부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니 거역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공양주의 도리라고 수차례 끈질기게 권고했다.


이에 공양주는 부처님 뜻을 저버린다는 것은 그를 거역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노승이 말하는 대로 목욕재계를 한 후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는 생바위에 정좌하였다. 그리고 정신을 통일하고 기를 터득하는 데 온 정열을 쏟아 마침내 정좌염불한 지 7일 만에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도달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 노승은 때를 놓치지 않고 그의 뒤로 접근해서 있는 힘을 다해 공양주를 발로 걷어차 벼랑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 순간 하늘에서 우아한 풍악소리가 울리면서 한 줄기 황금빛이 솟아나며 벼랑으로 떨어진 줄 알았던 공양주가 연꽃을 타고 공중에 앉아 있었다.


절 안에서 수행하던 중들이 생바위 쪽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와 사람 살리라는 구원의 소리를 듣고 황급히 밖으로 나와 보니 생바위 하늘에는 공양주가 영롱한 무지개로 몸을 감은 채 여러 선녀들의 호위를 받으며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윽고 서천을 향해 사라졌는데 그 때 공양주는 눈을 지그시 감고 생황(笙篁: 아악에 쓰이는 관악기 일종)을 불고 있었다. 그 소리가 너무나 아름다워 듣는 이들은 모두 황홀경과 포근함에 빠져들었다.


승려들이 이렇게 넋을 잃고 있을 무렵 벼랑 아래서 노승의 비명이 들려왔다. 승려들이 깜짝 놀라 절벽 아래로 달려 내려가 보니 거기에는 피를 토하며 쓰러져 죽어가는 노승이 있었다. 노승은 중들이 달려오는 것을 보며 마침내 죄악의 씨를 거두고 말았다.


이 광경을 보고 난 승려들은 법의를 걸친 승려들이 갖추어야 할 몸과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 바위는 죽이려고 바위에 앉힌 사람이 도리어 ‘살게 된 바위’라 해서 ‘생바위’, 또는 공양주가 생황을 불며 등천했다고 해서 ‘생황바위[笙篁岩]’라고 불리며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어래산 설화(御來山 說話)>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에 전해지는 어래산(御來山)에 관한 설화이다.


어래산은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浮石面)과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下東面),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永春面)의 경계에 있으며, 높이는 1,064m이다. 설화의 주인공인 배극렴(裵克廉 1325~1392)은 조선조의 개국공신으로,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진주, 상주의 목사를 역임하고 이후 이성계와 함께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하였다.


고려 공민왕으로부터 총애를 받던 배극렴은 왕의 시역 사건이 일어나자 정사에 뜻을 버리고 부인과 함께 충주 고을로 낙향하였다. 배극렴은 어래산 동굴로 찾아 들어가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기로 다짐하고 머루, 다래 등을 따먹으며 살았다.


그런데 당시 좌우군도총사였던 이성계가 왕실을 한 손에 휘어잡게 되고, 자신의 정권을 위한 명분으로 고려 중신이었던 우현보(禹玄寶),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배극렴과 같은 사람들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변함없는 마음으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을 고집하자 우현보와 이색은 하옥하였고, 정몽주는 격살하였다.


이성계는 배극렴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팔도 수령 방백에게 찾아내도록 명령을 내렸다. 우연히 배극렴이 충주 고을에서 은거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직접 배극렴을 찾아갔으나 첫 번째도 만나지 못하고 두 번째도 만나지 못하고 세 번째 가서야 동굴 속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배극렴을 만날 수 있었다. 배극렴을 만난 이성계는 앞으로의 집권 계획을 밝히고 협조해 줄 것을 간청하였고, 이를 들은 배극렴은 다시 정사에 나서서 개국공신으로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다.


그 후 사람들은 이성계가 친히 세 번씩이나 이곳을 찾아 왔다고 해서 마을 이름을 ‘삼방리’라 하고, 그 산의 이름을 ‘어래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배극렴이 나무를 하던 골짜기를 ‘배나무골’이라고 부르고, 이성계가 배극렴을 만나 국사를 의논했던 곳을 ‘국사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원남면

<남극년과 호랑이(南極年과 호랑이)>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노리에서 남극년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1664년 원남면 상노리 노악동(노래기)에서 태어난 남극년은 1689년(숙종 15)에 무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라 병조참지까지 지냈다고 한다.


1686년(숙종 12)에 남극년은 부친상을 입자 지금의 음성군 원남면 하당리 맹골에 부친을 안장하고 그 곁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어느 날 저녁, 상식을 올리고 곡을 한 후 묘소를 돌아보고 여막으로 돌아왔는데 그날따라 여막 밖의 일이 궁금했다. 예감이 이상하여 문을 열고 나와 보니 문 앞에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앉아 있다가 남공을 보자 입을 딱 벌렸다.


무인 출신인 남공은 호랑이 한 마리쯤에 겁을 먹을 위인이 아니었다. 여막 밖으로 나가 호랑이의 정면에 떡 버티고 서서는, “나는 선친 묘소에 여막을 짓고 시묘를 하는 중인데 어찌 짐승인 네가 나를 해칠 생각으로 이곳에 찾아와 어리석은 수작을 거느냐?”고 큰 소리로 힐책을 했다. 그런데 호랑이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입만 딱 벌리고 있었다.


남공이 수상하여 가만히 호랑이 눈을 살펴보니, 호랑이의 눈에는 아무런 적의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무엇인가 애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제야 남공은 마음놓고 호랑이가 벌린 입을 살펴보았는데, 목구멍 깊은 곳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얀 물체가 세로로 길게 걸쳐 있었다. 남공은 호랑이가 목에 걸린 것 때문에 고통을 참을 수 없어 구원을 요청한 것이라 생각하고, 팔을 넣어 그것을 끄집어냈다. 그것은 짐승의 커다란 뼈였다. 그제야 호랑이는 몇 번인가 남공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고맙다는 표시를 하고서 숲속으로 돌아갔다.


그후 호랑이는 남공이 삼 년 동안 여막 생활을 하는 동안 줄곧 옆을 지키며 벗 노릇을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후에도 남공이 위험에 빠지거나 곤경에 처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용하게 나타나 구해 주었다. 이런 일을 알게 된 주변 사람들은, 남공의 지극한 효심이 하늘에 닿아 지킴이를 보낸 준 것이라고 칭찬했다 한다.


<남취오의 묘(南聚五의 墓)>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노리에서 전해 내려오는 남취오의 묘에 얽힌 이야기이다.


‘남취오의 묘’는 남취오의 묘에서 흥겨운 소리가 들리면 사흘 뒤에 그 집안에 경사가 생긴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전설이다. 남취오의 묘는 원남면 상노리 아랫말에서 벌가마골로 향하는 중간 지점인 천복동(天卜洞)에 있는데, 근동에서는 드물게 보는 명당자리라고 한다.


어느 해 밤 남취오 집안의 종손 맏며느리가 대청마루로 올라서자 어디선가 우아한 풍악 소리와 함께 경사가 있는 집에서 축하연을 베풀 때처럼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확연하게 들리는데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잔치를 여는 집은 없었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소리가 나는 곳으로 조심조심 가봤더니, 괴이하게도 집 건너편에 있는 남취오의 묘에서 나는 것이었다.


맏며느리는 너무나 이상해서 집안 어른들에게 그와 같은 말을 전했다. 어른들이 이상히 생각하고 곧 대청에 나와 귀를 기울이며 무덤 쪽을 바라보았으나 묘소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집안 어른들은 맏며느리에게 헛것을 듣고 공연히 어른들을 실없이 만든다고 핀잔을 주었다. 다음날 아침 맏며느리는 남몰래 집을 나와 조부의 묘를 찾아가 보았으나 묘에서는 아무런 흔적이나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고 사흘 만에 아들이 문과에 급제했다는 희소식이 전해 왔다. 그러자 문중 사람들은 모여서, “할아버지 영혼이 종손 맏며느리에게만 집안 경사를 알려 준 것이다.”라고 그 뜻을 헤아렸다. 그 후 이러한 일은 번번이 일어났는데, 맏며느리가 남취오의 묘소에서 나오는 풍악 소리만 들으면 그로부터 사흘 후에 반드시 집안에 장원 급제자가 나오거나 영달하는 등 경사가 있었다.


1891년(고종 28)에 남취오의 6대손 남승우가 무과에 급제할 때도 그와 같은 징조가 있었는데, 신기한 일은 꼭 그 맏며느리 귀에만 그와 같은 풍악 소리와 군중의 축하 소음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맏며느리는 그와 같은 일이 있으면 곧 사흘 후에 반드시 집안에 경사가 올 것을 예측하였고, 문중에서는 할아버지가 맏며느리에게만 집안의 경사를 미리 알려 주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맹골리(孟골里)>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하당리에 있는 맹골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옛날 원남면 하당리에는 호랑이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소몰이꾼이 소들을 끌고 가려면 맹골이라는 고개를 거쳐 가야 했는데, 소가 지나갈 때면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소에게 모래를 막 끼얹으며 해를 끼쳤다고 한다.


그중 용감하고 힘이 센 소는 소몰이꾼을 자기 배 밑에 숨겨 놓고 호랑이와 싸움을 했으나, 겁이 많은 소는 맹맹거리며 도망을 쳤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곳을 맹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음성 지역은 예로부터 깊은 산골이 많아 호랑이가 많이 출몰하였고, 이에 따라 자연히 호랑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전승되고 있다.


<민동량과 호랑이(閔東亮과 호랑이)>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하당리에 전해 내려오는 민동량의 효행에 관한 이야기.


민동량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5세 때 글을 읽고 그 뜻을 해독하니 마을 사람들이 “민씨 문중에 신동이 나타났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효행 또한 지극하여 민동량이 8세 때 그의 노모가 병석에 눕자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어머니를 간호하는 데 온 정성을 쏟았다. 그 지극한 효행에 감동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항상 어머니의 곁을 떠나지 않고 아내나 하인이 들 시중마저 민동량 스스로 하는데 정성을 드렸다.


하루는, 문중 어른이 문병을 왔다가 어머니의 시중을 드는 광경을 보고는 “왜 그런 지저분한 일을 하인에게 시키지 않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민동량은 “지저분한 일일수록 남에게 시키지 않아야 정성을 다하는 것이고, 어버이 눈앞에 자식이 있어 보이도록 해야 마음을 안정할 수가 있는 법이니 어찌 그 곁을 떠나며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시중을 들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는 것이었다.


또한, 민동량의 부모가 노환으로 병석에 있을 때, 갑자기 증세가 위독해지자 민동량은 서슴지 않고 단지진혈(斷指進血)하여 왼손의 손가락 네 개가 모두 절단되었다. 이를 보고는 감동하며 눈물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14세 때인 1673년(현종 14), 시세(時歲)로 인해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그 병증이 심상치 않아 노심초사하고 있던 민동량은 괴산읍 내에 있는 한약방에 명약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때는 벌써 초경을 넘겨 밖은 이미 깜깜해진 뒤였다. 그러나 민동량은 행전을 차리고 길 떠날 차비를 갖추었다.


아내 무송윤씨는 나이 어린 신랑이 50리 길을, 더구나 야행을 하게 됨을 걱정스럽게 생각하고는 날이 밝은 뒤에 다녀옴이 어떠냐고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민동량은 “아버님 병환이 경각에 이르러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데 어찌 지체할 수 있겠소?” 하고는 발길을 재촉하여 떠났다.


민동량이 막 당골(하당리) 동구 밖에 이르렀을 때, 앞을 보던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성황당 느티나무 밑에 무시무시한 호랑이가 눈에 등잔불 같은 인광을 켜고 길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에 마음이 급해진 민동량은 큰 소리로 꾸짖으며 “나는 당골에 사는 민동량으로 지금 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해 괴산 땅으로 명약을 얻으러 가는 길이다. 그러니 가는 길을 지체하지 말도록 썩 길을 비켜라!”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호랑이는 민동량 쪽으로 등을 돌려 꼬리로 등을 가리키며 그 위에 올라타라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호랑이 하는 거동을 알아 챈 민동량은 잠시 망설이다가 호랑이 등에 탄 후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귓전에서 바람소리가 일더니 곧 다시 잠잠해졌다.


잠시 후, 눈을 뜬 민동량이 주변을 살펴보니 눈앞에 인가의 등불이 총총하고 바로 곁에 향교가 있어 이곳이 괴산 땅임을 알 수 있었다. 민동량은 황급히 호랑이 등에서 내려 개울을 건너 약방에 들어가 명약을 구한 후 다시 향교 근처에 이르렀다. 그런데 아까의 그 호랑이가 아직도 냇가 모래사장에 가만히 앉아 민동량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민동량이 그 뜻을 알아채고는 이번에는 서슴지 않고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호랑이는 한번 몸을 움직여 솟구쳐 바람을 일으키더니 곧 민동량을 처음 만났던 당골 성황당에 그를 내려놓고는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민동량이 집에 도착했을 무렵은 불과 밥상을 받아 밥 한 그릇을 다 먹고 숭늉을 마실 정도의 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문밖에서 남편의 목소리를 듣고는 깜짝 놀란 아내가 아내는 밖으로 뛰어나가며 물었다. “아니, 서방님. 어찌 길을 떠나지 않고 되돌아오셨어요?” 그러자 민동량은 “자세한 얘기는 이따 할 테니 어서 약을 달여 주시오.” 하며 약 다리는 법을 자세히 일러주었다. 이리하여 그날 밤 무사히 아버지에게 명약을 올릴 수 있었다.


이 이야기가 다시 마을에 펴지자 고을 사람들은 “대효(大孝)에 대호(大虎)가 시중을 들었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후 민동량이 세상을 떠난 지 백년 만인 1806년(순조 6) 민동량의 효행이 상계되어 정려가 내려지고 호조좌랑을 추증하였다. 민동량의 정려는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신평리 석정에 전한다.


<박주헌과 도깨비(朴周憲과 도깨비)>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마송리에 전해 내려오는 박주헌에 관한 이야기이다.


박주헌이 아직 벼슬에 오르지 않고 백수의 몸으로 향리에 있을 때, 나이 30을 전후한 어느 봄날의 일이다. 박주헌은 벗들과 더불어 음성장에서 놀다가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건지봉(乾芝峰) 아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인적도 없는 캄캄한 밤길을 갈지자로 걸어가던 박주헌은 숲거리(현재 용산리 뒷들로 들어가는 어귀)에서 쓰러져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 후, 박주헌은 비몽사몽간에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에 어렴풋이 정신을 차렸다. 몽롱한 눈으로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니 키가 6척이 넘는 거인들이 불이 환히 켜진 숲속에 둘러 앉아 얘기를 주고받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술에 취한 박주헌은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런데, 거인 가운데 한 사람이 박주헌의 곁에 다가와 주의 깊게 살펴보더니 다른 거인들을 향해서 큰소리로 “애들아 여기 음성현감이 취해 계시니 집으로 모셔다 드리자!” 하고 외치는 것이었다. 그러자 불을 에워싸고 있던 거인들이 다가와 박주헌을 등에 업고는 하늘을 나르듯 치달아 숲거리를 빠져나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박주헌의 집 담을 넘은 거인들은 박주헌을 사랑방에 눕혀 놓고는 조용히 밖으로 나오려 하였다. 이때 겨우 눈을 뜬 박주헌이 “너희들은 도대체 누구냐?” 하고 물었다. 그중 한 거인이 “우리는 숲거리에 살고 있는 도깨비인데 음성현감께서 약주가 과하시어 쓰러져 계시므로 우리가 모셔온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제서야 자신의 집임을 깨달은 박주헌은 하인을 불러 “내가 분명 장터에서 술을 마시고 돌아오다 거리에서 쓰러져 잤는데 어찌 우리집 사랑방에 내가 있는 것이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하인은 “조금 전 한 거인이 음성현감이 거리에서 술이 취해 주무시길래 모셔 왔으니 잘 보살펴 드리라며 나갔습니다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직 관로에 오르지 않았던 박주헌은 자신이 음성현감이라고 불린 데 대하여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박주헌은 교하현감(交河縣監)을 시초로 횡성현감 등을 역임한 후 1908년(순종 2) 드디어 음성현감으로 부임하였다. 이미 20년 전 도깨비들은 박주헌이 음성현감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음성현감으로 부임했던 박주헌은 도깨비들이 한 말을 신기하게 여겼다고 한다.


<반광섬의 신필(潘光暹의 神筆)>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보천리에 전해 내려오는 반광섬에 관한 이야기이다.


반광섬이 세상을 떠난 후, 반광섬의 후손들은 그의 글씨를 가보로 간직하기 위해서 책고리에 넣어서 항상 아랫방 시렁 위에 얹어 놓고 귀한 손님들이 찾아오거나 제사를 지내고 난 후, 가족끼리 모여 앉아 반광섬의 필적을 감상하는 것을 보람과 영광으로 삼아 왔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서도가(書道家)나 선비들은 반광섬의 글씨 구경을 꼭 한번씩은 하고 지나가는 것을 상례로 여겨 왔었다.


그러던 어느 해 봄, 식구들이 집을 비우고 없는 사이에 집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들에서 일을 하다가 불길을 보고 달려온 집안사람들이 때마침 강한 서풍을 안고 세차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 아무도 뛰어들지 못하고 그저 타들어 가는 집과 가재 도구를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마을 사람들도 아우성을 치며 발을 구르며 애태웠으나 이미 때는 늦어 어쩔 수 없게 되었다. 이윽고 불이 다 꺼진 후, 뒤처리를 하는데 집안사람들이 언뜻 뒤뜰에 서 있는 감나무를 올려다보다가 그 나뭇가지에 무엇인가 종이 뭉치가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내려 보았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고리 안에 귀중하게 간직해 놓았던 반광섬의 글씨 뭉치였다. 이것을 본 후손들은 망자를 생시에 만난 듯 반가움에 환호성을 올리며 기뻐하였다. 후에 사람들은 반광섬의 글씨가 입신 경지에 도달해서 그 불길 속에서도 책고리는 탔는데 글씨만은 화염을 뚫고 나온 것이라며 탄복하였다.


<백마산 설화(白馬山 說話)>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주봉1리에 있는 백마산에 관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옛날 매바위(지금의 괴산군 사리면)에 한 부부가 살았는데 자식이 없어 늘 근심하다 절에 가서 백일기도를 드렸더니 그 달부터 태기가 있었다. 열 달이 지나 아들이 태어나자 부부는 몹시 기뻐하였다. 그런데 태어난 지 3일째 되는 날 아이가 없어졌다가 닭이 울기 전에 다시 들어왔다.


이상하게 여기고 아이의 몸을 살펴보던 부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이의 양 겨드랑이 밑에 비늘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이를 괴이하게 여긴 부부는 아이가 잠든 틈을 이용하여 몰래 비늘을 떼어냈다. 그러자 아이는 그만 숨이 떨어지고 말았다.


같은 때, 산 동굴에서 태어난 백마가 산에서 뛰어 내려왔다가 부부의 집 마당에서 팔짝팔짝 뛰다가 죽어 버렸다. 아이를 태우러 왔던 백마가 아이가 죽었음을 알고 결국 따라 죽었던 것이었다. 이에 부부는 아이와 백마를 함께 묻어 주었는데, 그 뒤로부터 백마가 나온 산을 백마산이라 하고, 백마가 태어난 동굴을 백마굴이라 부르게 되었다.


<보천장의 유래(甫川場의 由來)>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보천리에 전해 내려오는 보천장에 관한 이야기이다.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보룡리 기자터에 가면 보천장과 관련된 송병표(宋炳豹)의 무덤이 있다. 송병표는 1885년(고종 22) 원남면 보룡리 기자터에서 태어났다. 조상 대대로 재부를 이어받아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던 송병표에게는 보천주막을 나올 때마다 한 가지 불만스러운 것이 있었다. 그것은 보천주막을 중심으로 한 커다란 규모의 시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송병표는 ‘보천주막을 중심으로 시장이 서면 인근에서 수확한 각종 농산물을 유통시키는 데 얼마나 편리할 것이며, 또 거기에서 취할 이득이 얼마일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당시 보천 지방에서는 농산물 매매를 위해 마을 사람들이 시장을 찾아 가는데 청안장이 40리, 괴산장이 50리, 가장 가깝다는 음성장만 해도 25리나 되었다. 장터가 멀다 보니 노자도 많이 필요했고, 밤길을 걷는데 뜻하지 않은 봉변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여러 날 궁리를 하던 송병표는 보천 지방에 장터를 세울 목적으로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함께 보천 지방에 장이 선다는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처음 생각과는 달리 사람들은 쉽사리 모여들지 않았다. 송병표는 행상인들을 붙잡고 술대접을 하면서 보천에서 물건 거래를 해서 장이 서도록 해달라고 부탁하였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2년 동안 술대접으로 많은 재산을 잃고도 얻은 것이 없던 송병표는 1914년 고심 끝에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냈다. 엽전 오십 냥을 둥구미에 챙긴 송병표는 하인과 함께 보천주막으로 들어갔다. 다른 때와 다름없이 행상인들에게 술대접을 하던 송병표는 점심때쯤 되자 갑자기 엽전 둥구미를 들고 주막 지붕에 올라가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부터 내가 여기서 돈을 뿌릴 터이니 모인 사람들은 엽전을 주어 가시오! 주은 엽전은 주은 사람 것이니 그리 알고 가져가시오!” 하고 송병표는 사방으로 엽전을 뿌리기 시작하였다. 공중에서 떨어지는 엽전을 본 행인들은 저마다 엽전을 줍기에 정신이 없었다.


인근 고을에서는 드디어 송병표에 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보천장에 가면 술을 공짜로 마실 수 있다.”, “보천장에 가면 돈을 마음대로 주울 수가 있다.”, “보천장에 가면 횡재를 한다.”, “새터 송부자 댁에서 활인적덕(活人積德)을 하느라 돈을 물 쓰듯 한다.” 등의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후, 보천장은 서서히 활기를 띠기 시작하면서 4일과 9일에 성시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불우손님 할아버지>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하노리에 전해오는 천연두에 관한 설화이다.


숙종 때 원남면 하노리 능모롱이에 살던 윤청이란 자가 천연두를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 후 윤씨 문중에 천연두 환자가 발생했다. 당시 풍습대로 역신(疫神)을 쫓아내기 위해 무녀를 데리고 와서 굿을 했는데, 굿을 하던 중 무녀가 “윤씨댁에는 마마(천연두의 별칭)를 앓다가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계시는데 그 할아버지께 지성을 드리면 곧 완쾌한다”고 하였다.


온 나라 사람들이 행하는 통속적인 일인지라 마마가 유행하면 윤씨 후손들도 이러한 일을 무시할 수 없었다. 몇 해에 한 번씩 찾아드는 마마에 윤씨 문중에서는 무녀의 말대로 윤청의 신주를 모시고 지성을 드렸더니 차차 차도가 있고 마침내 완치되어 거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두고 ‘역신보다 더한 힘을 가진 할아버지가 우리 자손을 보호하고 돌봐 주신다’고 믿었다. 이러한 말은 이웃사람들의 입을 통해 여기저기로 퍼져 나가 “능모롱이 윤씨 댁은 마마에는 아니 죽어도 열병(장질부사의 별칭)에는 죽더라”라고들 했다.


이런 일이 있고 얼마 후에 윤청에게 ‘불우손님 할아버지’라는 별칭이 붙었다. 이 명칭은 ‘부처님보다 더 영검하시고 손님(천연두의 별칭) 역신보다 더 훌륭하신 할아버지’, 즉 천연두에 관해서는 천상이나 지상에서 제일가는 할아버지라는 뜻이다. 윤청의 묘소는 지금도 ‘불우손님 할아버지 산소’라고 불린다. 묘는 잘 보존되고 있으며 상석, 망주(望柱), 묘표(墓表)가 있다.


<자라바우>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마송리에 있는 자라바위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자라바우’에 등장하는 자라바위는 음성군 원남면 마송리 국도변에 자리잡고 있다. 자연석으로 길이가 2.5m, 넓이가 1.5m 정도 되고, 흑빛으로 자라가 목을 움츠리고 있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어 주변 사람들이 자라바위, 또는 자라배라고 부른다.


옛날에 이곳 마송리에는 피도 눈물도 없다고 소문난 부자가 살았다. 하루는 지나가던 도승이 시주를 청하자, 부자는 머슴과 합세하여 “농사진 곡식은 줄 수 없으니 이거나 가져가라.”고 하면서 도승의 바랑 속에 두엄을 퍼부었다. 도승은 말없이 주변의 지형을 살피더니 부잣집 옆에 있던 자라바위의 목을 육환장으로 내리쳤다. 그때 자라의 목이 떨어지면서 피가 났다고 하는데, 그후로 부자는 시나브로 가세가 기울더니 망하고 말았다.


‘자라바우’는 전국에서 전해 오는 광포담의 하나인 ‘장자못 설화’와 풍수 설화의 ‘단맥(斷脈)’ 모티프가 결합된 이야기이다. 장자못 설화는 대개 부자의 집터가 연못으로 변하는 데 비해, ‘자라바우’는 단맥 모티프를 차용하여 부덕한 부자를 망하게 한다.


‘자라바우’에서 부자가 도승에게 두엄을 퍼붓는 내용은 다른 지방의 이야기와 거의 비슷하나, 며느리가 등장하지 않음으로써 결말에서 차이가 나는데, 이렇듯 며느리가 등장하지 않는 유형은 각편에 따라 도승의 징치 방법이 다르게 나타난다.


<장공의 전사를 알려준 애마(張公의 戰死를 알려준 愛馬)>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삼용리에서 조선 중기 의병으로 활동했던 장충범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장충범(?~1597)은 음보로 군자감주부를 지냈는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주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부상을 당하여 향리인 삼생리에 피신하여 치료를 받았다. 그후 1597년에 의병을 모아 구진터(지금의 생극면 생리)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원남면 삼용리에서 살던 장충범은 의병을 일으키기로 마음먹고 종들과 마을 사람들을 규합하였다. 그렇게 모인 사람이 서른 명 정도로, 훈련도 받지 못하고 변변한 무기도 없이 곡갱이와 쇠시랑, 몽둥이들로 무장을 한 터였다. 장충범은 이들을 이끌고 구진터에 진을 치고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당시 왜군은 모두 신식 무기인 조총을 가져서 장충범 일행은 그자리에서 모두 죽고 말았다. 그후 이곳 사람들은 장충범과 민병이 죽은 곳을 ‘패전골’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장충범이 전사하자, 평소 장충범이 타고다니던 말이 그의 옷을 물고 삼생리 집으로 달려와서는 마당을 빙빙 돌며 소리내어 울었다. 말의 울음소리에 집안사람들이 뛰쳐나왔다가 피묻은 옷을 보고 장충범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가족과 친지들은 말이 물고 온 옷으로 장충범의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장충범의 애마를 정성껏 거두고, 명이 다하여 죽은 후에는 장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정한철과 호랑이(鄭漢澈과 호랑이)>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에서 전해 내려오는 효자 정한철 이야기이다.


조선 중기 사람인 정한철은 원래 충청남도 천원군 목천면에서 태어났으나 집이 가난하여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의 외가에서 자랐다. 본래 천성이 착하고 부지런하여 자수성가한 뒤 목천면 고향집의 노부모와 형을 잘 돌보아서 주변의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정한철의 묘소는 현재 조촌리의 야동 효자골에 있다.


어느 해 정한철이 고향집에 갔는데, 때마침 노환으로 병석에 누워 있던 아버지가 갑자기 개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였다. 의원한테 그 말을 전했더니, 노환에는 황구가 좋다고 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근동에서는 황구를 구할 수 없었다.


정한철은 아침 일찍 백 리 길을 걸어서 조촌리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함께 황구 있는 집을 수소문하였다. 그러다 오후가 되어서야 간신히 윗마을 정첨지 집에 황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원래 정첨지 집 황구는 오래전부터 그 집에서 도둑을 지켜온 충견으로 팔 수 있는 개가 아니었으나, 정한철은 노부의 병환이 위태함을 말하고 수차 애원하여 마침내 황구를 살 수 있었다.


어느새 날이 저물었지만 정한철은 개를 삶아 망태에 지고 집을 나섰다. 아내가 밤길을 가다 호환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하느냐며 말렸지만 정한철은, “노부가 병고에 시달리며 드시고 싶어하는 음식을 기다리고 계신데, 어찌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있겠소.” 하고는 기어코 길을 떠났다.


그런데 집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십 리 길인 진천군 초평면 신통리의 갈티고개에 이르렀을 때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어디가 길이고 숲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한참을 길을 찾느라 동분서주하는데, 갑자기 웬 불빛에 주변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이상하다 싶어서 발걸음을 멈추고 불빛이 보이는 것을 바라보니, 고갯마루에 화등잔만한 눈빛을 반짝이며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분명히 개고기 냄새를 맡고 나타난 호랑이 같았다.


그러나 정한철은 호랑이한테 잡아먹히는 한이 있어서 개고기는 뺏길 수 없다는 결심으로 침착하게 호랑이 앞으로 걸어가서는, “나는 음성 고을 사는 정한철이다. 아버님 병환이 위중한데, 황구가 특효라고 하여 마련하여 가는 중이다. 날이 새기 전에 이것을 드려야 하니 딴 생각 말고 길을 비켜라.” 하고 호통을 쳤다.


그런데 호랑이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꼬리를 말아 등을 치면서 넙죽 하고 앞으로 엎드렸다. 정한철이 생각하기에 등에 타라고 하는 것 같아서, 눈을 딱 감고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그 순간, 갑자기 귀에서 바람소리가 이는 듯하더니 곧 멎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눈을 떠보니 바로 아버지가 거처하는 목천집 문 앞이었다. 정한철이 내리자 호랑이는 한 줌 바람을 남긴 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리하여 정한철의 아버지는 그날 밤 개고기를 먹고 신기하게도 병이 차도를 보이더니 며칠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마을 사람들은 한결같이 정한철의 효심을 하늘이 알고 도와준 것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후 정한철의 후대에서도 효자와 효부가 끊이지 않아 가문을 빛내고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진정한 우정(眞情한 友情)>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보천리에서 전해 내려오는 진정한 친구 이야기이다.


옛날 어느 부자가 외아들을 두었는데, 아들이 늘 먹을 것을 주고 다니니 친구들이 잘 따랐다. 그래서 아버지는 틈만 나면, “얘야, 친구는 먹을 것이 아니라 진실한 우정으로 사귀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아들은 늘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와서 먹을 것을 주고 놀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에게 친구가 몇 명이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아들은 “한 삼십 명쯤 됩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다시 “그중에 제일 친한 친구가 몇 명이나 되느냐?” 하고 물었더니, “열 명 정도 되는데, 모두 죽자사자 친한 친구들입니다.” 하였다. 며칠 뒤 한밤중의 일이었다. 갑자기 아버지가 사색이 되어 아들 방에 나타나서는, “얘야, 내가 실수로 사람을 죽이고 말았구나. 이제 조금 있으면 날이 밝을 텐데, 관가에서 찾기 전에 어디 숨길 만한 데가 없겠느냐?” 하고 물었다.


아들이 뜻밖의 사건에 정신이 멍하여 아무 소리도 못하는데 다시 아버지가, “옳지! 너한테는 죽자사자 친한 친구가 많다고 하였으니, 그 친구들한테 부탁해 보자꾸나.” 하였다. 그리하여 아들은 아버지가 멍석에 말아놓은 시체를 지게에 지고 제일 친한 친구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제일 친하다는 친구는, 아들이 시체를 숨기려고 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문부터 닫아걸기에 바빴다. 아들이 통사정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에는 간이라도 내줄 듯이 잘하던 친구들이었지만, 아들이 시체를 숨겨 달라는 말에는 모두 문부터 닫아걸었다.


마지막 친구집에서까지 거절을 당한 아들이 힘없이 돌아서자 아버지는, “이거 큰일이구나. 그렇다고 이렇게 있다가는 꼼짝없이 잡힐 텐데. 아참, 이 근처에 내 친구가 살고 있는데 한 번 가봐야겠다.” 하고는 앞장서서 걸었다. 아버지는 어느 집 대문 앞에 서서 “여보게 친구 있나?” 하고 불렀다. 잠시 후 친구가 나오자 아버지는 사정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자 아버지의 친구는, “어쩌다 그런 일을 저질렀는가? 하여튼 어서 들어오게. 일단 방에 들어가서 생각해 보세.” 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집 안으로 들어가자 아버지 친구는 지게에 올려져 있던 시체를 숨겨 놓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여보게, 자수를 하게. 시체야 얼마든지 감추어 줄 수 있지만 죄 짓고 사는 삶이 편하겠는가.” 하고 설득하였다. 아버지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맞는 말일세.” 하고는 아들에게, “너는 가서 지게를 지고 오너라.” 하였다.


그러자 다시 아버지 친구가, “아닐세. 내가 지고 감세. 밤새도록 지고 다니느라 고단할 거야.” 하고 앞장서서 나가려고 하였다. 그때 아버지가 친구의 손을 잡으며, “그만두게. 사실 그건 시체가 아니라 돼지라네. 내 자식놈에게 진정한 친구란 어떤 건지 보여주려고 부러 꾸민 걸세.” 하였다. 그러고는 아들에게, “진정한 친구란 네가 가진 것이 없을 때도 너를 진정 생각해 주는 사람”이라고 말하고는, 돼지를 잡아 친구와 기분좋게 술을 마셨다.


<채수와 그의 손자(蔡壽와 그의 孫子)>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에서 조선 중기 문신 채수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음성군 출신인 채수가 어린 손자(채무일)를 데리고 살았다. 어느 날 채수가 “孫子夜夜讀書不(손자야야독서불: 손자는 밤마다 글을 읽지 않는구나.)” 하니 손자가, “祖父朝朝飮酒猛(조부조조음주맹: 할아버지는 아침마다 술을 몹시 드신다.)”이라고 대답하였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었다. 눈에 찍힌 발자국을 보면서 채수가 “犬走梅花落(견주매화락: 개가 달아나니 매화가 떨어진다.)”이라고 하였더니 손자가 “鷄行竹葉成(계행죽엽성:닭이 다니니 대나무잎이 되었도다.)”이라고 대구하였다. 후에 손자 채무일도 커서 문과에 급제를 했다고 한다.


<채신보의 묘와 호환(蔡申保의 墓와 虎患)>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삼용리에 있는 채신보의 묘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채신보(1420~1489)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1458년(세조 3)에는 음성현감을 지내기도 하였다. 1482년(성종 13)에 남양도호부사를 지내고 퇴임한 뒤 음성군 삼용리 물언덕에서 여생을 보내다 향년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자손들은 그의 묘소를 이곳 삼용리 뒷산에 마련하였다.


채신보의 아들 채수는 조선왕조 5백 년을 통털어 단 두 명밖에 없다는 삼장장원의 한 사람으로, 대사성과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경상북도 함창에서 여생을 보냈다. 채수는 젊었을 때는 한양에서 벼슬살이를 하느라 자주 성묘를 오지 못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함창과 음성이 너무 멀어서 3,4년에 한 번 정도 문중 사람들과 성묘를 하러 왔다.


그런데 이런 이유 말고도 채신보의 묘소를 자주 찾아오기 어려운 이유가 또 있었다. 그것은 성묫길에 반드시 일행 중 누군가가 호환을 당하기 때문에 문중 사람들이 성묘 오기를 주저하였던 것이다. 어느 해, 길지를 찾아 이곳 삼용리를 찾아온 지관이 채신보의 묘를 보고 탄식하기를, “관운은 자손 백대에 이르겠으나 호환을 막을 수도 없겠구나.” 하였다. 때마침 이 소리를 채씨 문중 사람이 듣고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자 지관은, “채공의 묘는 그 산세형국이 복호형이어서 자손이 성묘를 가면 반드시 호환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대책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리하여 함창채씨들은 그후로 성묘를 할 때는 채신보의 묘소가 마주 보이는 맹동면 통동리와 접경에 있는 도마치에서 멀리 망배만 하고 돌아왔고, 그로부터 호환을 당하는 일도 없었다고 한다.


<청주고씨와 운명(淸州高氏와 殞命)>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하노리에서 전해 내려오는 고씨 부인 이야기이다.


고씨 부인은 1821년(순조 21)에 원남면 마송리에서 고순석의 딸로 태어났다. 열여섯 살 때 윤씨 집으로 출가하여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고종 8년 음력 11월 20일 향년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고씨 부인은 조선 순조 때 원남면에 사는 윤우진에게 시집을 왔다. 시댁은 대식구가 모여 살았는데, 고씨 부인은 항상 웃으며 인자하고 후덕하여 ‘자라바우할머니’로 통했다. 고씨 부인이 태어나고 자란 마송리에 ‘자라바우’가 있어서 그리 불린 듯하다.


고종 8년에 병석에 누웠는데 백약이 무효했다. 그러던 11월 10일에 아들을 보고 “내가 오늘 저세상으로 가니 집안사람들은 멀리 가지 말아라.” 하고 말하였다. 이 말에 따라 두 아들과 집안사람들은 임종을 지키고 있었다.


병석에 누운 고씨는 몇 시가 되었는지 몇 차례 물었는데, 신시초(申時初)가 되자 심호흡을 하였다. 그때 갑자기 서쪽에서 먹구름이 둥둥 뜨면서 번개가 치고 뇌성이 천지를 진동시키며 폭우가 내렸다. 그러다가 커다란 불덩어리가 방안으로 들어오더니 방안이 깜깜해졌다가 얼마 후 다시 환해지더니 고씨 부인이 숨을 거두었다. 그러자 소나기도 멈추었다.


음력 11월 20일경이면 양력으로 12월 말경으로, 이러한 계절에 번개가 치고 뇌성이 울리고 비가 온다는 것도 이상한데, 고씨 부인이 운명하는 순간 불덩어리가 방안으로 들어오니 사람들이 더욱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고씨가 운명하고 어느 해인가, 어느 무녀가 마을에 와서 고씨가 천국에 가서 선녀가 되었다고 일러주었다. 지금도 집안 후손들은, “자라바우할머니 기제사가 대개 동지 전후지만, 몹시 춥다가도 그날만 되면 날이 누그러져서 제수 장만하는 데 물이 찬 줄도 모르고 지낸다.”고 말한다.


<화암바위(華巖바위)>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덕정리 사향산에 있는 화암바위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화암바위는 덕정리 사향산에 있는 화암사터 옆에 있는 바위이다. 옛날부터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사람들이 기우제를 지냈는데, 그 제라는 것이 살아 있는 개를 잡아 피를 바위에 칠하면, 마치 핏물을 닦기라도 하듯 비가 왔다고 한다.


고개 너머 조촌리 사람들이 개를 잡아 기우제를 지내면, 고개를 넘어가기 전에 조촌리 쪽에 비가 내리는 것이 보였다고 전한다.


<화암사 약수(華巖寺 藥水)>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덕정리에 있던 화암사의 샘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덕정리의 사향산에는 예전에 화암사가 있던 절터에 약물로 이름난 샘이 있다. 이 샘은 겨우 한 사람이 떠먹을 정도로 크기가 작으나 수량이 일정하여 가뭄이나 홍수 등의 기상 변화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이 샘 근처에서 담배를 피면 우물이 말라붙거나 흙탕물이 나온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샘 옆에 ‘금연’이라고 써붙이고 보호한다고 한다.


맹동면

<꼬부랑 할머니>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인곡리에서 ‘꼬부랑’이란 어휘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언어 유희를 즐기며 전해 내려오는 형식담의 하나이다.


내용은 등이 굽은 꼬부랑 할머니와 구불구불한 모습의 자연물과 동물 등의 모습을 재미있게 엮어나가고 있다.


옛날 옛적 갓날 갓적,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꼬부랑 살고 있었다. 하루는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지팡이를 짚고 꼬부랑고개를 꼬부랑 꼬부랑 넘는데, 꼬부랑 강아지가 꼬리를 꼬부랑 꼬부랑 흔들며 따라오길래 꼬부랑 길로 돌아가니까, 꼬부랑 바위에 꼬부랑 토끼들이 모여 와서 꼬부랑 꼬부랑 춤을 추는데, 꼬부랑 다람쥐가 꼬부랑 꼬부랑 재주를 넘고, 꼬부랑 황새가 날아와 꼬부랑 나무에 앉아서 꼬부랑 목을 꼬부랑 빼고서 꼬부랑 꼬부랑 노래를 하니까,


꼬부랑 여우가 달려와서 꼬부랑 꼬부랑 캥캥 꼬부랑 짖는데, 꼬부랑 칡덩굴이 꼬부랑 꼬부랑 뻗어나와 꼬부랑 집을 짓고 꼬부랑 떡을 만들어 꼬부랑 상에 차려 놓으니, 꼬부랑 할머니와 꼬부랑 지팡이랑, 꼬부랑 강아지랑, 꼬부랑 토끼랑, 꼬부랑 다람쥐랑, 꼬부랑 황새랑, 꼬부랑 나무랑, 꼬부랑 여우랑, 꼬부랑 칡덩굴이랑 모두 모여 꼬부랑 노래를 꼬부랑 꼬부랑 부르며, 꼬부랑 춤을 꼬부랑 꼬뿌랑 추고, 꼬부랑 떡을 꼬부랑 꼬부랑 아주 맛있게 먹었다.


<새빨간 거짓말>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인곡리에 전해오는 민담으로 지붕이 없는 집은 없고 대통 없는 담뱃대 또한 없으니 이러한 얼토당토한 말들을 늘어놓음으로써 역설적인 상황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지붕 없는 집에 눈 없는 영감이 대통 없는 담뱃대로 담배를 태워 물고, 문살 없는 문을 열고 앞산을 바라보니 나무 없는 앞산에서 다리 없는 멧돼지가 떼를 지어 뛰어가길래 구멍 없는 총으로 한 방 쏘아 잡아서 썩은 새끼줄로 꽁꽁 묶어 지게뿔 없는 지게에 지고 사람 없는 장터에 나가 한 푼 안 받고 팔아서 집으로 오는데 물 없는 강물에 배를 타고 건너가는데 빈 가마니가 둥둥 떠내려 오기에 그것을 건져내어 이리저리 들쳐보니 새빨간 거짓말이 잔뜩 쏟아져 나오더라.


<정석오의 혼(鄭錫五의 魂)>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마산리에서 전해 내려오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고향으로 돌아온 이야기이다.


‘정석오의 혼’에 나오는 정석오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십리보에서 죽었다고 한다. 음성군 맹동면 마산리 뒤편에 정석오의 묘소가 있다.


1748년(영조 24) 영돈녕부사로 동지겸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갔던 정석오가 십리보에서 갑작스레 병사하였다. 서장관 이이장은 슬픔을 누르고 정석오의 시체를 고국으로 운구할 준비를 하였다. 귀국을 앞둔 전날 밤이었다. 이이장의 방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어서 문을 열었더니, 뜻밖에도 세상을 떠난 정석오가 의관을 정제하고 들어왔다.


이이장이 놀라서 맞이하자 정석오가, “이공, 내가 타국에서 죽고 보니, 이대로 있으면 육신은 돌아갈 수 있으나 혼령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될 것 같소. 소상하게 말할 수는 없으나, 내 영혼이 고국으로 돌아가려면 이공의 도움이 꼭 필요하오. 강을 건널 때마다 내 이름을 세 번씩 불러주오. 그러면 나는 이공의 어깨를 타고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소.” 하였다.


이이장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자 정석오는 희색이 만면하여 밖으로 나갔다. 이이장이 배웅을 할 양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눈을 떠보니 꿈이었다. 꿈은 꿈인데 이상하게 생생한지라 이이장은 ‘참 이상한 일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다음날 아침, 이이장은 동행들과 함께 정석오의 관을 마차에 싣고 십리보를 떠났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른 때와는 다르게 어깨가 묵직한 것이 느껴졌다.


그리하여 이이장은 크고 작은 강을 건널 때마다 정석오가 꿈에서 부탁한 대로 하늘을 향해서, “정석오! 정석오! 정석오!” 하고 세 번을 불렀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나 여기 있네.” 하는 정석오의 대답이 들려왔는데, 그 소리는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강을 건널 때마다 이이장은 정석오를 불러서 대답을 들으며 혼령이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의주의 압록강을 건너고 대동강과 임진강을 건너면서부터는 이이장의 어깨가 점점 더 가벼워지더니, 한강을 건너자 “이공, 고맙소. 나 다 왔소.”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가 완전히 가벼워졌다.


이이장은 한양으로 들어온 뒤 조정에 들어가 당시 돈녕부참봉으로 사관하고 있던 상주 정양순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정석오의 혼령이 돌아왔음을 증언하였다. 이 이야기는 항간에 큰 화제가 되었으며, 그후 한산이씨인 이이장의 후손과 정석오의 후손은 서로 통혼하여 우의의 돈독함이 후대까지 이어져 내려온다고 한다.


<통골마을의 모기>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통동리에서 전해 내려오는 모기가 없어진 이유에 대한 전설이다.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통동리를 중심으로 한 마을 일대에는 한여름에도 모기가 없는 것으로 유명해서 이곳을 찾아드는 피서객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


통동리에 모기가 없는 것과 관련하여 내려오는 설화로, 강감찬 장군이 모기 주둥이를 뽑아 놓고 부적을 날렸기 때문에 모기가 없어졌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강감찬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이동 행군을 하다가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통동리 계곡에서 진을 치고 하룻밤 야영 노숙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강감찬은 알랑산 기슭에 있는 중말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그런데 밤이 되면서부터 모기가 날아들기 시작하는데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강감찬이 참다못해서 천막 밖으로 나와 주변을 살펴보니 군사들 천막에서도 모두들 모기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오랜 행군과 오랑캐들과의 싸움에서 피곤을 풀어야 할 군사들이 모기 때문에 잠을 못 이루고 있는 것을 보자 강감찬은 화가 났다.


강감찬은 계곡을 따라 알랑산 남쪽 계곡을 돌아 샘골 있는 곳으로 들어가서 가장 극성을 부리는 바위 사이에 손을 넣어 바위 벽에 붙어 있는 모기를 한주먹 움켜잡은 뒤, 그중 가장 큰 모기를 가려내서 주둥이를 뽑은 뒤에 부하가 들고 온 지필묵을 받아 한 장의 부적을 써서 불에 태워 공중에 날리면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그렇게도 극성을 부리던 모기떼가 점차 활기를 잃고 어디론지 사라져 가고 말았다. 그리고 간혹 남아 있는 모기도 사람을 쏠 기운이 없어서 힘없이 붙어 있다가 떨어져 죽거나 아니면 계곡 쪽으로 겨우 날아가는 정도였다. 이렇게 되자 군사들은 시원한 계곡 물소리를 들으면서 하룻밤을 편히 쉬어 잘 수가 있었다.


<효자 김순의 칠지지효(孝子 金(石+舜)의 七指之孝)>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통동리에서 전해 내려오는 효자 김순의 이야기이다.


김순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님의 말씀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었다. 아침 저녁으로 문안을 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부모님이 잠자리에 드실 때나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침구를 손질해 드리는 등 효행이 지극하여 마을 사람들로부터 효자라는 칭찬을 받아 왔다.


그러던 중 부친이 병석에 눕자 좋다는 약이라면 백방으로 구해다가 썼다. 하루는 약을 구하려고 마을 옆 고개를 넘어가는데 꿩 세 마리가 따라오다가 김순이 들어가는 집 마당으로 날아들었다. 쫓아도 날아가지 않고 빙빙 돌기만 하므로, 잡아서 정성껏 아버지께 드리니 병이 나았다.


이윽고 어느 해 겨울, 부친의 명이 다하여 돌아가지자 앞산에 묘소를 만들고 지극정성으로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매일 풍설을 무릅쓰고 아침 저녁으로 참배하던 중 동상으로 손가락 일곱 개가 빠져 없어졌다. 사람들이 이것을 칠지지효(七指之孝)라고 불렀다. 또한 김순이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에는 낮에는 꿩을 비롯한 새들이 나타나 위로해 주었고, 밤에는 호랑이가 나타나 보호해 주었다고 한다.


대소면

<유상재의 역사전(柳尙宰의 力士傳)>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삼한리에 전해오는 역사(力士) 유상재에 관한 설화이다.


대소면 오산리에서 동쪽으로 약 500m 차도를 따라가면 대소면 삼한리 석막산에 유상재의 묘가 있다. 유상재는 1823년(순조 23) 대소면 삼한리에서 태어났는데 본시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였으나 평소에 그 힘을 아무렇게나 만용하는 일이 없고 겸손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어느 해 가을 메밀 농사가 풍작을 이뤄 추수를 하는데 다른 일꾼들은 메밀을 여러 단씩 지고 다니는데 유상재는 항상 석 단씩만 지고 다녔다. 그래서 일하던 사람들이 그렇게 지고 다니면 등에 털도 눌리지 않는다고 농담을 하자 유상재는 “짐이란 적당히 지고 다녀야 몸이 상하지 않는 법이다. 무리해서 많이 져 나르다가 다치는 날에는 큰일이다”라고 하며 조금도 힘 자랑을 하지 않았다.


또 어느 해인가 삼한리 언덕에 석물을 해 놓은 안동권씨 묘가 있는데 석상 밑에 고여 놓은 수박돌(고임돌)을 마을 개구쟁이들이 빼서 묘 밑으로 굴려 놓았다. 이를 본 유상재는 “남의 조상 묘를 허무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라고 하고는 손자를 등에 업고 한 손으로 수박석을 들어 한쪽 발 나막신 끝으로 석상을 올려 수박돌을 다시 고여 올려놓았다. 그 때 숨소리조차 흐트러지지 않았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이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그의 힘에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어느 해인가 한 마을에 사는 이서방이 농사를 많이 짓는데 벼농사가 잘되어 황소를 동원해서 질마를 걸고 볏단을 날랐다. 그가 볏단을 싣는데 적당히 쌓아올리지 않고 과중하게 실어 소가 몹시 버거워하며 발자국을 떼는 동작이 우둔하였다. 그것도 모르고 이서방은 뒤에서 소 엉덩이를 갈기며 마구 몰아치는 바람에 소가 수렁 안으로 쓰러졌다.


이서방이 크게 당황해서 “소 죽는다!”고 고함을 치며 구원을 청하자 들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모두 늪으로 모여 들었다. 그러나 고작 한다는 것이 볏단을 풀고 질마끈을 끊어냈을 뿐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 겨우 목만 내밀며 허우적대는 황소를 보면서도 구해낼 방도를 몰랐다.


이때 유상재가 이것을 보고 황급히 달려들어 논두렁에 서 있는 미루나무를 뿌리째 뽑아 수렁 양쪽에 걸쳐 발 버틸 곳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양손으로 황소의 두 뿔을 움켜쥐고 몇 번인가 추썩거려 물기를 모아 놓더니 한 번 크게 소리지르며 힘을 쓰니 황소가 수렁에서 논바닥으로 빠져나왔다.


이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그저 입을 딱 벌리고 유상재의 괴력에 감탄할 뿐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와 같이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 힘을 함부로 쓰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겸손하고 의리 있는 사람이라며 존경하였다.


<함흥차사 박순 일화(咸興差使 朴淳 逸話)>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에서 ‘함흥차사’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함흥차사 박순 일화」는 조선 초기 태조에게 문안사로 갔다가 안타깝게 죽은 박순(朴淳)의 일화이다.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 오리골에 박순의 충신문과 부인 장흥임씨의 열녀문이 있다.


조선을 세운 태조는, 태종이 여러 명의 왕자를 죽이고 왕위에 오르자 옥새를 들고 고향인 함흥으로 가서 한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태종은 아홉 번이나 함흥으로 신하들을 보내어 환궁할 것을 탄원했지만, 태조는 함흥으로 오는 신하들을 모두 죽여서 죽음의 사자로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되자 함흥으로 가겠다는 신하가 아무도 없었는데, 어느 날 박순이 태종 앞에 나아가 함흥차사를 자청하였다.


박순은 1388년(고려 우왕 14)의 요동정벌 때 이성계의 휘하에서 종군하는 등 이성계와는 전쟁터에서 이승과 저승을 초월한 전우이자 친구였다. 그리하여 1402년(태종 2) 박순은 태조를 모셔 오기 위해 함흥으로 떠났는데, 보통 사신의 행차 때 타고 가는 가마도 타지 않고 하인도 없이, 오직 새끼가 달린 어미 말 한 필만을 타고 갔다. 이윽고 태조가 머물고 있는 함흥의 행재소(별궁) 앞까지 온 박순은, 강가의 나무에 망아지를 매어놓고는 어미 말을 끌고 행재소 안으로 들어갔다.


박순이 사신으로 오자, 태조는 오랜 벗을 대하듯 즐거워하며 박순을 맞이하였다. 그리하여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밖에서 새끼 말이 어미를 찾느라 시끄럽게 울부짖자 태조가, “허, 아까부터 말 울음소리가 요란하니 괴이하구나. 여봐라! 밖이 왜 이리 소란한지 가서 알아오너라.” 하고 말하였다.


박순은 기다렸다는 듯, “전하! 주의를 시끄럽게 해드려 황송합니다. 저 말 또한 신이 데리고 온 것인데, 아직 새끼인지라 방해가 될까 염려하여 행재소 밖에 묶어놨더니 어미를 찾느라 저리도 울부짖는 모양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서, “아무리 하찮은 축생이라도 지친(至親: 어버이)의 정은 떼지 못하는가 보옵니다.” 하고 말하니 태조의 낯빛이 조금 변하는 듯싶었다.


이때다 싶어서 박순은, “전하, 저같이 말 못하는 하찮은 짐승도 어미와 새끼가 서로 그리운 정을 참을 수 없어 하는데, 서울에 계신 전하께서 어찌 상왕의 용안을 대하고 싶은 어의가 간절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눈물을 흘리며 간곡히 말하였다. 태조는 박순의 말에 감동이 되었는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며칠 놀다 가라며 붙잡았다.


그 후 며칠 뒤였다. 박순과 태조가 장기를 두고 있는데, 갑자기 처마 끝에서 새끼 쥐와 어미 쥐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미 쥐는 바닥으로 떨어질 때 몹시 다친 듯 움직임이 시원찮았으나, 혹시나 새끼나 잘못되지는 않을까 염려하여 새끼를 놓지 않았다. 이것을 본 박순은, 태조를 모시는 무사들이 쥐를 죽이려고 달려들자 죽이지 못하도록 말리면서 태조 앞에 엎드렸다.


“웬일인고?” 하고 태조가 의아해서 묻자 박순은, “황공하옵니다. 전하! 맞아죽을 줄 알면서도 새끼를 두고 도망가지 못하는 어미 쥐의 정경이 몹시 가련하고 갸륵해서이옵니다. 더욱이 어전 앞인지라 하찮은 미물일망정 살생은 금해야겠기에…….”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부자의 정을 탄원하고 한양으로 환궁하기를 빌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태조도 크게 감동하여, “내 수일 안에 한양으로 갈 터이니, 걱정 말고 가서 내 뜻을 전하여라. 아직 감정이 격한 몇몇 신하들을 달래어 내 뒤를 따르마.” 하고 은밀히 환궁의 뜻을 말하였다. 박순은 태조의 낯빛을 보고 비로소 안심한 뒤, 하직인사를 올리고 기쁜 마음으로 한양길을 재촉하였다. 그리하여 홀가분한 마음으로 산천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걸으니 하루 지나 이틀이 되었는데 백 리도 걷지 못하였다.


한편 행재소에서는, 태조가 한양에서 오는 사신은 무조건 죽여서 돌려보내지 못하도록 내린 엄명을 거두고 박순을 살려 보내자 신하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태조가 한양으로 돌아가면 태종이 자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신하들은 지금이라도 박순을 죽여서 한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태조를 공박하였다. 태조는 할 수 없이 하루 이틀 시일을 늦추면서 박순을 살릴 궁리를 하였다.


그리하여 사흘째 되는 날, ‘아무리 못 갔어도 이백 리 길은 갔을 테지.’ 하고는 신하들에게, “너희들이 뜻이 정 그렇다면 할 수 없구나. 만약 용흥강을 건넜으면 놓아주고 못 건넜거든 베어라.” 하고 말했다. 신하들은 날랜 군사들을 보내 박순의 뒤를 쫓았다. 함흥에서 영흥(용흥강)까지는 백 리도 채 못 되는 거리였으나, 박순은 태조의 예상과는 달리 안도감에 천천히 걷느라 그 때까지 용흥강을 건너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이제 막 나룻배에 올라서 배가 움직이려고 할 즈음, 먼발치에서 한 때의 군사들이 말을 달려오며 “멈추시오! 어명이니 멈추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박순은 어명이라는 소리에 배를 띄우지 않고 기다렸다. 그러자 군사들이 서둘러 다가와, “어명이오!” 하고는 칼로 박순의 허리를 베니, 시체의 반은 나룻배 안에, 나머지 반은 강물에 떨어졌다.


박순의 죽음은 함흥의 행재소뿐 아니라 한양의 조정에서도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넉넉히 살아서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던 태조는 대경실색하여 신하들에게, “그래, 죽음에 임하여 무슨 말이 없더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신하 중 한 명이, “ 행재소가 있는 곳을 향하여 흐느껴 울면서 말하기를, 나 하나 죽는 것은 조금도 아깝지 않으나, 원하옵건데 이미 약속하신 회필(환궁)의 뜻은 추호도 고치지 마시옵소서. 하고 말했나이다.” 하였다.


태조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박공은 짐의 좋은 친구이다. 아, 오늘 그가 죽다니! 내가 마침내 전일에 그가 한 말을 저버리지 않으리라.” 하였다. 그리고 박순의 시체를 잘 수습하여 장례를 치르도록 하고는 한양으로 환궁하였다. 한편 태종도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살신성인의 충정에 감동하여 공신으로 봉하고 벼슬을 높여 주었다. 또한 박순의 소식을 듣고 자결한 부인 장흥임씨에게도 묘지를 하사하고 정경부인으로 추증하였다.


<효자 박정규 이야기(孝子 朴廷珪 이야기)>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에서 전해 내려오는 효자 박정규 이야기이다.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에서 태어나 자란 박정규는 1721년(경종 1)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선릉참봉이 되었다. 그후 아산현감으로 부임하였는데, 선정을 베풀어 칭찬이 자자했다.


박정규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청렴 강직하였다. 한번은 친구들과 남의 집 밤나무밭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다. 다른 친구들은 밤을 많이 따기 위해 앞다투어 밤나무에 올라가 흔들며 밤을 따는데, 오직 박정규만은 그대로 서 있었다. 친구가 까닭을 물으니, “나는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크면서 누구보다 효성이 지극했던 박정규는 아버지가 병환으로 눕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 드렸는데, 그것으로 부족하자 배를 갈라 피를 내어 아버지에게 넣어 드려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였다. 이렇듯 극진한 효성이 온 나라에 알려져, 66세를 일기로 죽자 나라에서 효자정문을 내렸다고 한다.


삼성면

<김정샘(金井샘)>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덕정2리에 있는 샘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조선 말기에 정읍목사를 지내던 조씨라는 사람이 한양으로 가다 이곳 덕정리를 지나게 되었다. 다리가 아파서 잠시 쉬었다 가는 중에 마을 안에 있는 샘물을 마시게 되었는데, 그 맛이 어찌나 좋은지 그 자리에서 금(金) 속에서 나오는 물[井]이라 하여 김정(金井)이라 부르게 되었다.


김정샘은 또 춘천샘이라고 불리는데, 여기에는 또다른 이야기가 있다. 가뭄이 극심한 어느 해에 춘천이란 노승이 이곳을 지나다, 주민들의 물이 없어 고통 받는 것을 보고 이곳 샘터를 지적해서 우물을 팠다. 그런데 물맛도 좋을 뿐만 아니라 수량도 풍부하므로 노승의 이름을 따서 춘천샘이라고 불렀다.


<덕다리 전설(德多里 傳說)>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에서 전해 내려오는 덕다리에 관한 지명 전설이다.


500~600여 년 전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한 마을 앞 하천에 다리를 놓아 통행을 했는데 해마다 홍수가 나면 파괴되고 홍수가 없어도 자연 파괴되곤 하였다. 그러므로 해마다 다리를 놓는 일이 큰일이었다. 농민들은 하도 이상하고 괴이하게 여겨 한 해는 술과 고기와 음식을 장만하여 큰굿을 하고서 정성을 다하여 다리를 놓았더니 그 후부터는 홍수에 파괴되지 않고 통행에도 불편함이 없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농민들이 덕을 많이 쌓은 다리라고 하여 ‘큰 덕(德)’ 자, ‘많을 다(多)’ 자 마을이라 칭하여 ‘덕다리’로 불렀다고 하며, 덕을 쌓은 다리라고 하여 덕교(德橋)라고 줄여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백운산(白雲山)>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에 있는 백운산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백운산(白雲山, 345m)은 삼성면 소재인 덕정리의 서쪽 약 4㎞ 지점인 용성리 서쪽에서 상곡리와 경기도 안성시와 도계를 이루고 있는 경계에 있다.


고려 중엽 안성군 이죽면 칠장리 칠장사에 머무르는 한 도승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칠장사 법당에서 동쪽을 바라보니 오색영롱한 구름 한 가닥이 종중에 뻗쳐 황홀하게 비치고 있는 것을 보고 필시 상서로운 일이라 생각하고 상좌를 데리고 영롱한 구름이 뻗쳐 있는 곳을 찾아 나섰다. 동쪽으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허둥지둥 당도하니 서운산(지금의 백운산)이었다.


산이 높은 것도 아니고 웅장한 산도 아닌데, 수목이 울창하니 산새 소리만 간간히 들릴 뿐, 인적은 없는데 흰 구름 같은 서기(瑞氣)가 남쪽에 높이 솟아 햇살에 부딪혀 찬란하기 그지없었다.


도승은 며칠 동안 이 광기에 심취되어 산 밑 마을에서 머물면서 자세히 산세를 살피고 난 뒤 칠장사로 되돌아가 승려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몇 달 후, 서운산 남쪽 중턱에 작은 암자를 세우고 ‘서운암’이라 이름 지었다. 그 후부터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암자의 형세가 날로 번창하였다. 불전에 예불 공양을 하면 소원이 성취되지 않은 것이 없자 서운암의 이름은 세상에 널리 퍼졌다.


이렇게 수백 년을 내려오다가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인근 마을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서운암으로 몰려들었다. 동년 8월 서운암은 왜군들의 목표가 되어 건물은 전소되고 한줌의 재로 변하였다.


서운암이 소실된 지 10년만인 1602년(선조 35) 충주목사 정구(鄭逑)가 이곳 유생들의 진언을 받아들여 서운산 밑에 운곡서원을 창건하고 산 이름도 서운산에서 백운산으로 개칭하였다. 백운산은 중국 주자가 살던 곳에 있는 명산이라 한다. 산명을 서운이라 부르면 불가(佛家)가 흥성할 것이요, 백운이라 부르면 유가(儒家)가 흥성할 것이라 하여 양자의 명칭을 모두 사용하였다.


<용당의 전설(龍堂의 傳說)>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에 전해오는 용당(龍堂)에 관한 설화이다.


용당이라 불리던 곳은 현재 음성군 삼성면에 있는 양덕저수지이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착공하여 8·15해방 후에 준공하였다.


양덕리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양덕저수지에 용이 살고 있다고 한다. 아무리 가뭄이 있어도 물을 모두 뺀 적이 없고, 설계가 막통을 다 열어도 수심이 5~6m는 고여 있으며, 10여 년 전에 별세한 마을 주민이 저수지 한복판에서 물이 용솟음치는 것을 보았다고도 한다. 그래서 양덕리 주민들은 언젠가는 이곳에서 용이 승천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유월샘(六月샘)>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 운곡서원 뒤편에 위치한 있는 인간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샘물에 관한 설화이다.


병에 걸린 아내를 업고 길을 떠나는 한 나그네가 6월 폭염에 기진맥진하여 나무 그늘에 쓰러지듯 누웠다. 병든 아내는 겨우 숨을 연명하는 중병의 환자였다. 그런 아내가 물을 찾았으나 3년의 오랜 가뭄에 어디서도 물을 찾을 수 없었다. 남편은 죽어가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천지신명께 “유월 한 달만이라도 좋으니 물을 주어 목숨을 살려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나뭇가지에서 “정성이 갸륵하여 유월 한 달만 물을 줄 것이다”라는 응답이 들려오더니 발밑이 축축해지면서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남편은 감사하다는 인사를 연발하면서 바위 밑에서 솟아나는 물을 떠서 아내에게 먹였다. 물을 먹은 아내는 차츰 정신을 차리고 어느덧 병이 씻은 듯이 나아 20여 일 동안 그 물을 먹으면서 휴양을 했다.


병이 완쾌되어 떠날 때 물이 솟은 곳에 표시를 하려 했지만 물이 줄어 나오지 않았다. 남편이 날짜를 헤아리니 7월 1일이었다. 그 후 이 샘은 일 년 열두 달 중 6월 한 달만 물이 솟고 그 수량이 가뭄이나 홍수에 관계없이 일정하다고 한다. 이 샘물은 열기(熱氣)의 진정과 위장병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유월샘 이야기는 샘의 이름인 유월에 중점을 두어 내용이 전승되고 있다. 다른 지역의 약샘이 일년 내내 물이 솟는 데 비해 유월샘은 6월 한 달만 물이 솟는다는 특성을 지녀 내용의 변별성을 지닌다.


<이양골 이야기>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에서 효자 권국화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삼성면 소재지인 덕정리의 모래재 사거리에서 남쪽으로 약 2㎞ 떨어진 곳에 용성리 성미가 있다. 성미 앞에는 금강 상류인 미호천 지류가 있는데, 이 미호천을 중심으로 펼쳐진 비옥한 들판을 이곳 사람들은 이양골이라고 부른다.


음성군 삼성면에 권국화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본관이 안동으로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여 이웃 마을 사람들까지 칭찬이 자자하였다. 어느 해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백방으로 약을 구하지 못하다가 지나가는 행인으로부터 장호원에 명약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가 마침 한밤중이었으나 마음이 급하여 고개를 넘어가는데,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고갯마루에 앉아 있다가 권국화를 등에 태우더니 순식간에 오십 리 길을 달려가 내려놓았다. 그리고 약을 지어 가지고 나오자 다시 집 앞까지 태워다 주어 아버지께 달여 드리니 금방 병이 나았다.


그후 어느 날, 다시 병석에 누운 아버지가 갑자기 잉어회가 먹고 싶다고 하였다. 권국화는 잉어를 잡기 위해 마을 옆에 있는 성미저수지로 갔다. 그러나 엄동설한이라 아무리 해도 저수지의 얼음을 깰 수가 없으므로, 얼음판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하늘에 잉어를 점지해 줄 것을 간절히 빌었다.


그러자 갑자기 무릎의 체온으로 얼음이 녹아내리듯 구멍이 뚫리더니, 커다란 잉어 한 마리가 얼음판으로 뛰쳐나왔다. 권국화는 하늘에 감사하며 그 잉어를 잡아다 회를 떠서 부친께 드리니 다시 병이 나았다. 그 일 이후 마을 사람들이 저수지에서 잉어가 올라왔다고 하여 성미저수지가 있는 들판을 이양골이라 불렀다.


그후 권국화는 부친이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나자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했는데, 그를 태우고 장호원까지 왕복해 준 일이 있는 호랑이가 밤마다 움막 앞에 나타나 지켜주었다고 한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권국화의 지극한 효성을 하늘이 알고 지켜 주는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이이첨의 지견(李爾瞻의 知見)>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에서 이이첨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이이첨(李爾瞻 1560~1623)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에서 태어났다. 선조 때 대북파의 영수로서 광해군이 적합함을 주장했고, 광해군 즉위 후 조정에서 소북파를 숙청했다. 영창대군을 죽게 하고 김제남을 사사시킨 뒤 폐모론을 주장하여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가 인조반정 뒤 참형되었다.


이이첨이 소북파를 억누르고 십여 년의 세도를 누리던 말년인 1622년(광해군 14) 어느 여름날이었다. 이이첨의 아들들이 장안에 유명한 맹인 점쟁이가 있다 하여 불러서 아버지의 앞날을 점치게 하였는데, “계해년(1623년) 3월이 되면 반드시 흉한 꼴을 보겠습니다.” 하는 것이 아닌가.


이이첨의 아들들은 노발대발하여 맹인 점쟁이의 옷과 갓을 찢고 욕을 하며 때려서 집 밖으로 쫓아냈다. 마침 공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이이첨이 피투성이가 되어 쫓겨가는 맹인 점쟁이를 보고 무슨 일인지 물었다. 맹인 점쟁이가 울면서 사연을 말하자, 이이첨은 갖은 물품으로 후히 대접하고 또 사과하여 달랜 뒤 하인을 딸려 집까지 잘 보내 주었다. 그러고는 아들들을 불러서 크게 꾸지람을 하였다.


“내가 영화가 넘치고 죄가 많아서 스스로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아는데, 어찌 맹인의 점치는 말을 기다리겠느냐. 너희들이 물으니 맹인은 사실대로 대답한 것뿐인데 무엇이 죄될 것이 있다고 매질을 해서 길에 다니는 사람들까지 놀라게 하느냐. 내가 너희들 아버지가 되었으니 이 일만으로도 더욱 죽어 마땅하구나.” 하고 여러 날이 지나도록 불쾌해했다. 다음해, 점쟁이의 말대로 이이첨은 인조반정으로 죽음을 당하였다.


<청룡뿌리(靑龍뿌리)>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덕다리에 있는 산봉우리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청룡뿌리는 음성군 삼성면 덕다리 뒷산 남쪽 끝에 있는 봉우리 이름이다. 옛날 이 봉우리에 청룡과 황룡이 살았는데, 비가 엄청나게 내리는 날 두 용이 승천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 산의 끝봉을 청룡뿌리라고 부른다고 전한다.


<팔장사 샘(八壯士 샘)>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에 있는 팔장사 샘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지금으로부터 2백여 년 전에 덕정리 덕다리에 샘이 있었는데 수질이 좋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샘을 다시 파려고 자리를 보는데 여간해서 좋은 자리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도승이 찾아와 샘자리를 찾아주면서, 이 샘물을 먹으면 마을에 장사가 여러 명 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도승이 가르쳐 준 자리를 파니 물도 많이 나오고 수질도 좋았다. 그리고 도승의 말대로 마을에서는 그동안 힘센 장사가 여덟 명이나 태어났는데, 보통 사람보다 두 배, 세 배 힘이 센 것은 보통이고, 어떤 장사는 여덟 배나 힘이 세어 “덕다리에 가서는 힘자랑하지 말라”는 속담까지 나왔다. 여덟 명의 장사가 태어났다고 하여 팔장사 샘으로 불리는 샘물은 지금도 맑은 물이 나오고 있는데, 이 때문에 덕다리 사람들은 앞으로도 마을에서 장사가 많이 나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석환의 절개(河錫煥의 節槪)>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덕정리에서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의 효자이며 의인으로 이름난 하석환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하석환(?~1918)은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음성군 삼성면 덕정리에서 살았던 인물이다.


하석환은 어렸을 때부터 효자로 소문이 났는데, 1905년(광무 9)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다. 아버지의 묘를 쓴 곳이 깊은 산중이어서 시묘살이 중에 온갖 짐승들이 괴롭혀서 여간 딱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커다란 호랑이가 찾아와서 신변을 보호해 주었다고 한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하석환은 대문에 “李生家之民 河錫煥(이생가지민 하석환: 이씨왕조의 백성 하석환)”이라는 문패를 달고 두문불출하며 세금 또한 내지 않았다.


그리하여 음성경찰서에서, “너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 천황폐하의 홍은을 감사히 여기지 않으니 고약한 놈이다. 너 같은 놈은 죽어 마땅하다.” 하면서 으름장을 놓고 협박하며 고문까지 하였으나 하석환은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결국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는데, 하석환은 그날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고 단식투쟁을 하였다. 경찰서장은 속으로 ‘제놈이 며칠이나 갈라고.’ 하면서 내버려 두었는데, 하석환은 5~6일이 지나도록 단식을 하더니 큰소리로, “이 도적놈들아!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 더러운 곳에 가두었느냐.” 하면서 소란을 피웠다.


결국 경찰서장은 하석환이 혹시나 유치장에서 죽으면 민심이 동요할 것을 걱정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얼마 후 하석환의 집으로 사람들이 모여드는 등 민심이 예사롭지 않게 돌아가자, 경찰서장은 또다시 하석환을 잡아다 유치장에 가두었다. 그렇다고 일제에 고분고분해질 하석환이 아니었다. 이렇게 두서너 번 가두고 풀어 주던 경찰서장은 결국 하석환을 내버려 두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후 몇 해 뒤인 1918년 결국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효자 권국화(孝子 權國華)>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에서 전해 내려오는 효자 권국화 이야기이다.


권국화는 본래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님 봉양에 지성을 다했다. 한번은 아버지의 병이 위독하여 백방으로 약을 구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어느 날, 권국화가 아버지의 병이 위중한데도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혹시나 병에 쓸 만한 약초가 있을까 하고 뒷산으로 오르던 중이었다.


갑자기 말 한 필이 달려오더니 반갑게 꼬리를 치면서 타라는 신호를 보냈다. 권국화가 무엇에 홀린 듯 성큼 올라타자, 말은 한걸음에 장호원으로 달려가 어느 약국 앞에 멈춰섰다. 그리하여 권국화는 약국으로 들어가 의원에게 아버지의 병세를 자세히 이야기하고 지은 약을 아버지께 드리니 바로 쾌차하였다.


또 한 번은, 한겨울에 아버지가 병석에 누웠는데, 갑자기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였다. 엄동설한 추운 겨울에 꽁꽁 언 방죽으로 나오기는 했으나 막막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잠시 얼음판을 보는 중에 저절로 얼음이 꺼지면서 큼직한 잉어 한 마리가 뛰쳐나왔다. 권국화는 하늘에 감사하며 잉어를 잡아다 아버지께 고아드렸는데, 마치 특효약이라도 되는 듯 저절로 병이 나았다.


그후 노환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권국화는 산소 옆에 묘막을 짓고 삼 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그런데 그 삼 년 동안 하루도 빼지 않고 늙은 호랑이가 저녁마다 나타나 권국화를 보호해 주었다고 전한다. 이에 근동 사람들이 하늘도 효자를 알아본 것이라고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효자 정운영 이야기(孝子 鄭運永 이야기)>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양덕3리에서 전해 내려오는 정운영의 효행에 관한 설화이다.


정운영(鄭運永 1746~1820)의 자는 도숙(度叔),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교리 정창(鄭昌)의 13세손이며 동몽교관(童蒙敎官) 정석휴(鄭錫休)의 아들이다. 1746년(영조 22) 덕다리 외서촌(현재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에서 출생하였으며, 효행이 지극한 인물로 1843년(헌종 9) 정려(旌閭) 은전(恩典)이 내려져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에 효자문을 세웠다.


정운영은 오효(五孝)로 칭한 정국주(鄭國柱)의 후손답게 효자 집안의 가훈을 이어받아 학문에도 뛰어나고 경학에 덕망이 높았으나, 과거로 출사하면 부모를 봉양하기 어렵다고 하여 오직 부모에게 효도하고자 과거를 포기하였다. 어느 해 부친이 병환 중이었으나 여러 가지 약이 모두 효과가 없었다.


그때, 어느 도승이 하는 말이 잉어를 고아 드리면 특별한 효험이 있을 거라고 했으나 때는 12월 말이라 하천이 얼어 잉어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 청미천에 가서 삼 일을 새워 가며 잉어를 잡으려고 하는데, 큰 잉어가 저절로 나와 이것을 고아 드리자 부친의 병이 회복되어 3년을 더 사셨다고 한다.


생극면

<김선경의 처 성주이씨 이야기(金善慶의 妻 星州李氏 이야기)>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차평리에서 전해 내려오는 임진왜란 때 죽음으로 치욕을 씻었던 김선경의 처 성주이씨에 관한 열녀 이야기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성주이씨는 군자감판관으로 있던 남편 김선경이 전쟁터로 나가자 딸을 데리고 피난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생극면 차곡리에 있는 수리산으로 피난했으나, 이곳도 안심할 수 없게 되자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차평리 통산 밑을 지나다가 왜적들과 만나게 되었다. 이씨가 딸을 안고 어쩔 줄 몰라 전전긍긍하는데 왜적이 이리 떼처럼 덤벼들어 이씨를 강제로 끌어안고 가슴을 만지고 손목을 잡아당기며 희롱을 하였다.


이씨 부인은 딸을 껴안고 짐승처럼 덤비는 왜적에 반행했으나 여자의 몸으로 적을 당해 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뜻밖에도 힘센 장사가 나타나 왜적을 쳐부수어 다행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젊은 장사는 당시 주부벼슬을 하고 있던 하진민이라는 사람이었다.


이씨 부인은 백배 사례하고는, 딸을 아내로 삼아 달라고 청한 다음 왜적의 손이 닿았던 젖가슴과 손목을 칼로 잘라 버리고는 그 자리에서 자결을 하였다. 그 순간, 부인이 자결한 자리에 오색영롱한 서기가 수일을 감돌아 세상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였는데, 훗날 이 사실이 나라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고 한다.


<김성간의 과거(金成簡의 科擧)>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에 전해 내려오는 김성간의 과거 시험에 관한 이야기이다.


김성간(金成簡)은 자는 계화(季化), 호는 만재(晩齋)이며,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 말마리 사람이다.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 지천서원에 봉안된 8현(八賢) 중의 한 명인 남곡(南谷) 김의(金疑)의 후손인 김성간은 이 지방의 으뜸가는 학자이며 유학자이자 시인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과거만 보면 번번이 낙방하였다. 김성간이 가르친 제자나, 김성준이 지어 준 글을 받아 간 사람은 과거만 보면 척척 급제를 해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출세도 하고 즐거워하였다. 그러나 웬일인지 자신은 매번 낙방의 고배만 마시자 한 번은 시험장에 나가서 두 사람의 이름으로 시험을 치르고 나왔더니 한꺼번에 모두 장원 급제가 되었다.


그러나 시험관은 그 사실을 밝히고 부정이라 하여 취소 판정을 내렸다. 그러다가 또 과거를 볼 기회가 생겨 서울을 향해 길을 재촉하며 올라가다가 천안 삼거리에서 삼남 지방에서 올라오는 과거꾼 선비들과 만나서 동행을 하게 되었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던 끝에 그동안 과거를 몇 차례나 보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자, 거짓으로 “나는 두 번째인데 이번에는 또 떨어질까 걱정이 되오.” 하였다.


그랬더니 모두 이구동성으로 “이봐요! 생원! 아니 두 번째쯤이면 무슨 걱정이요. 충청도 사는 김성간 같은 사람은 여덟 번 시험 봐서 여덟 번이나 낙방했답니다.” 하였다. “아니 그게 정말이오?”라고 슬쩍 시치미를 떼고 물으니 “아니 여보시오! 생원은 충청도에 산다면서 그것도 모르고 있었단 말이요? 우리 전라도에서는 충청도 김성간이라 하면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다오.”라고 하며 이상스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러자 김성간은 오금이 저려 오고 자기의 과거 행각이 정말로 뉘우쳐지며 생각하기를 “내 이름이 전라도·경상도까지. 그처럼 유명해졌더란 말인가? 에라! 그러면 되돌아가야겠구먼. 돌아가자. 팔자에 없는 과거가 이번이라고 될 리가 없지. 이번에 또 떨어지면 뱃속에 있는 애기에게까지 소문나겠구나. 에라, 되돌아가자!”라고 결심하고 도중에 돌아오고 말았다. 김성간은 그 길로 고향에 돌아와서 자연을 벗 삼고 시를 읊조리며 오직 후배를 기르는 육영 사업에만 전념하였다고 한다.


음사시(音似詩) 1수가 전하는데, “개구리를 논하지 말고 족제비의 덕을 말한다네 고구마는 풀이 아니니 잎사귀엔 물이 없다네(勿論皆求理 言德足知非 背草顧邱馬 無水立沙鷗)”이다.


<김세필의 일화(金世弼의 逸話)>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에서 김세필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김세필(金世弼, 1473~1533)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왔다. 그후 기묘사화 때 조광조가 사사되자 중종의 과오를 규탄하다 유춘역에 장배되었다가 1522년에 풀려난 뒤 고향으로 내려와 후학 교육에 힘썼다. 지천서원에 봉안되어 있다.


김세필은 젊어서부터 독서를 부지런히 하여 닭이 울어도 그칠 줄 몰랐다고 한다. 야간 순찰을 하는 군졸들이 공이 매양 글 읽는 소리를 엿듣고 서로 말하기를, “우리가 멀지 않아 이 댁에 야순을 보고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그렇듯 비상한 노력과 비범한 재질이 있어 대사헌과 이조참판을 거쳐 형조판서까지 오르게 되었다. 성종이 친히 여러 유생을 시험 보일 때 공이 18세로 수석을 하자 기특하게 여기면서, “세필은 비상히 큰 그릇이니 마땅히 그 재주가 노성(老成)함을 기다려서 크게 쓰리라.” 하고 그의 급제 환수를 명하고 특히 많은 상품을 하사하였다.


김세필이 1516년(중종 11년)에 경주목사로 있을 때였다. 임금이 『역학계몽(易學啓蒙)』의 강의를 받다가 해석하기 어려운 곳에 이르러, “누가 이것을 알 수 있느냐?” 하니 공을 말하는 이가 있어, 즉시 명하여 역마를 타고 올라오게 하여 강론을 하게 하였다. 이후 공이 여주에 머물고 김안국이 충주에 있을 때 두 선생의 문하에 많은 학도가 모여들었다.


이때 박상이 충주목사가 되어 매년 봄 친히 여주로 가서 목사 이희보를 찾아 관의 조곡(벼) 2백 석을 받아 배로 운반하여 두 분 선생과 학도들에게 각각 나누고, 가을이 되면 다시 쌀을 싣고 가서 몸소 조곡을 갚기를 해마다 하였지만 자기의 봉록을 직접 주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뇌물을 주었다는 혐의를 멀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두 분 선생 또한 그 뜻에 감동하여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한다.


김세필이 일찍이 왕명을 받들고 영남으로 가다가 지금의 지비천을 지날 때의 일이다. 그때 지비천은 이름도 없는 황막한 들로서 아무도 사는 이가 없었다. 공이 말을 멈추어 한참 동안 둘러보다, “이곳이 가히 살 만하다.” 하고 점찍어 놓았다. 그후에 유춘역에서의 귀양살이가 끝나자 이곳으로 와서 조그마한 초막을 지으려 할 때, 마침 충주목사 박상이 이른바 공자당(工字堂)이라 하는 ‘공(工)’자 형의 집을 지어주었다.


양쪽이 침실로 되어 왼쪽은 김공이 기거하고 오른쪽엔 학자들이 거처하도록 했으며, 가운데는 대청으로 되어 있었다. 이에 후학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뜻맞는 친구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중 박상이 올 때마다 냇가 숲에 말을 매고 먹이를 주었는데, 오래지 않아 이곳에 차차 집이 늘고 마을이 이루어지니 이 마을을 말마리(枺馬里)라고 이름하였다.


공이 기묘사화로 인해 벼슬에서 쫓겨난 것이 마흔아홉 살 때인데, 나이 오십 살에야 49년의 삶이 그릇되었음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행년오십이지사십구년지비(行年五十而知四九年之非)”라 하여 아호를 ‘지비옹’이라 하고, 집 앞을 흐르는 물을 ‘지비천’이라 한 뒤 그곳에서 그릇됨을 아는 공부를 후학에게 가르쳤다.


지비천에 살고 있을 때 김세필은 길에서 설광이라는 중을 만났는데, 설광이 “숲 아래에서 영철(靈澈)을 만나 부끄러우니 벼슬을 버리고 온 것이 아니라 벼슬에서 쫓겨 난 것일세(却慙林下逢靈澈 不是休官是官黜)”라는 시를 짓자, “반생을 뜬이름 따라 뻔뻔스레 달리다가, 흰머리 난 오늘에야 한가한 몸이 되었네만, 산 아래서 중을 만나도 부끄럽기만 하네. 벼슬을 버린 게 아니라 쫓겨났기에 말일세.”라는 시를 써주었다 한다. 조선시대에 그토록 천시되었던 중이 보기에도 부끄러운 당대 선비들의 생리와 전형적인 사유의 행동인 은거의 허점을 스스로 간파하고 지은 시였다.


<말마리 전설(말마리 傳說)>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에서 말마리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1525년(중종 20)을 기점으로 십청헌(十淸軒) 김세필(金世弼)과 눌재(訥齋) 박상(朴祥)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가 근간이 되어 ‘말마리’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으며, 지금도 마을 주민들의 기억 속에 연연히 이어져 오고 있다.


김세필(金世弼, 1473~1533)은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사사한 중종의 과오를 직언하다 음죽현 유춘역에 유배되었다. 그후 1527년(중종 22)에 사면된 김세필은 지비천(知非川)[지금의 생극면 팔성2리]에 은거하며 스스로를 지비옹(知非翁)이라 부르고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이렇게 은둔 생활을 하던 김세필의 충절과 학덕을 높이 평가한 충주목사 박상은 물심양면으로 김세필을 도우며 자주 찾아와 담소를 나누곤 하였다.


박상은 늘 말을 타고 찾아와 시문(詩文)을 읊기도 하고, 정치 현실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는데, 특히 임금의 부름을 받을 때면 항상 김세필을 찾아와 조언을 구하였다. 박상이 김세필을 찾을 때면 항상 지비천가의 무성하게 우거진 숲 아래 말을 매어놓고 김세필을 대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이 언덕을 말마리, 또는 말갯둑이라고 부른다.


<생극의 유래(笙極의 由來)>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생리에서 전해 내려오는 지명 유래 전설이다.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생리에 조 참판의 묘가 있다. 이 묘는 조선 인조 때 참판을 지낸 양반의 묘로 풍수지리상 피리혈이라고 한다. 그런데 묘를 몇 장만 썼어야 하는데 그 후손이 밑에다 자꾸 묘를 써서 피리 소리가 나는 곳을 막아 버렸다.


그 후부터 후손이 번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처음 피리혈에다 묘를 썼을 때는 잘되었는데 자꾸 내려 묘를 쓰다 보니 피리 구멍을 막아 망한 것이라 하였다. 그 후 이곳을 피리혈이 있는 곳이라 하여 생극이라 부르게 되었다.


<세조와 권람 이야기(世祖와 權擥 이야기)>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권람과 세조에 관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권람(權擥 1416~1465)은 1453년의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한명회와 같이 공을 세워 일등공신으로 이조참판이 되고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진봉된 뒤 좌의정의 벼슬까지 지냈다. 죽은 뒤에는 세조묘(世祖廟)에 배향되었는데, 권람의 묘소가 생극면 방축리에 있다.


권람은 젊을 때부터 대가집 자제답게 글 읽기를 좋아하여 책을 지고 명산 고적을 찾아서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반드시 한명회와 더불어 함께 다녔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이르는 곳마다 글을 읽으며 문장을 지어서 회포를 풀었으나 벼슬길에는 마음이 없었다. 하루는 어떤 친구가 과거를 보라고 권하였다. 부질없이 새삼스레 무슨 과거냐고 일축하다가 생각을 고쳐 과거를 보기로 했다.


권람은 그해 사헌부감찰을 제수받고 이듬해 집현전교리가 되었는데, 그때 수양대군(세조)과 함께 『역대병요(歷代兵要)』 음주(音註)를 편찬하면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후의 일이었는지 그전의 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일설에는 권람이 한명회를 세조에게 소개했다고도 하고, 또 한명회가 권람을 세조에게 소개했다고도 한다. 어찌됐든 수양대군이 권람과 한명회와 더불어 계유정난을 일으켜 집권에 성공한 것만은 사실이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 뒤 권람은 그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되면서 성공가도를 달렸다.


권람이 정승으로 있던 어느 해 어머니를 위해서 잔치를 벌였는데, 지체 높은 손님들이 끊이지 않아 초헌과 일산이 문을 메우고 학발(鶴髮: 학의 털)이 마루 위를 뒤덮을 정도였다. 세조 역시 찾아와 친히 권람의 어머니께 헌수했다고 전한다.


권람이 목멱산(현 서울 남산) 북쪽 기슭, 비서감(祕書監)의 동쪽 바위 벼랑 쪽에 집을 짓고 후주당(後週堂)이라 이름하여 살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세조가 찾아왔다가 서쪽 벼랑에 돌샘이 있으므로 어정(御井)이란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두 사람의 친한 정도가 짐작된다고 하겠는데, 그래서였는지 훗날 권람은 죽어서 세조묘에 배향되었다고 한다.


<수리산 못(修理山 못)>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차곡리에 전해오는 권근(權近)의 묘 이장(移葬)에 관한 일화이다.


1409년(태종 9)에 양촌 권근이 죽자 광주에 묘를 썼다가 1440년(세종 22)에 방축리 능안에 좋은 땅을 골라 이장할 때의 일이다. 양촌의 묘소 조성이 한창 진행 중에 있는데 때마침 이곳을 지나가던 노승과 상좌가 있었다.


노승은 발길을 멈추고 산세를 둘러보며 살피다가 상좌를 돌아보며 목이 마르니 상주에게 가서 물을 얻어 오라고 하였다. 어린 상좌는 묘소를 조성하는 곳에 가 상주를 보고 온 뜻을 말하였다. 그때 상주는 좌찬성을 지낸 권제와 좌의정 권람이었다.


상주는 이를 당돌하게 여기고 어린 상좌를 꾸짖으며 노비를 불러 노승을 포박하여 대령하라고 하였다. 끌려간 노승은 상주에게 용서를 구하였지만 상주는 노발대발하며 곤장을 치도록 하였다.


이때 노승이 침착한 어조로 “소승이 불민하여 죄를 진 것 같사옵니다. 운수(雲水) 납자(衲子)의 몸으로 오늘 우연히 이곳을 지나는 길에 급작스레 갈증이 나서 물을 마시고자 사방을 살피니, 민가는 보이지 않고 우물도 보이지 아니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기에 행여 물이 있을 것 같아 물을 얻어 오라 하였습니다”하며 자초지종을 말하였다.


이어 “상주님, 노여움을 거두소서. 하오나 지금 하고 있는 광중(壙中: 시체가 놓이는 무덤의 구덩이 부분)에서 물이 난다면 그것을 퍼서 버리겠지요? 퍼서 버리는 물이면 갈증 나는 사람에게 한 그릇 주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소” 하였다.


이 말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광중에서 물이 난다”면서 떠들썩하였다. 상주는 크게 당황하였고 택지(擇地)한 지사는 이미 달아나고 보이지 않았다. 이 광경을 본 노승이 결박을 풀어 달라 하면서 광중에서 나오는 물에 대한 대책을 세우겠다고 하였다. 풀려난 노승은 묘소 주위의 지형을 살피고 나서 동쪽 수리산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저 산 중턱에 못을 파면 이곳 물이 저곳으로 빠져갈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상주는 반신반의하면서 수리산에 못을 파게 하였다. 하지만 묘소보다 수리산이 높은데 낮은 곳의 물이 높은 곳으로 흐른다는 것은 사리에 어긋나는 황당한 이야기요, 또한 이곳에서 저곳까지 십 리가 넘는데 그곳에서 혹시 물이 난다 해도 그 물은 그쪽 산에서 나는 물이 분명하지 이곳 물이라고는 볼 수가 없었다.


생각 끝에 상주가 증명해 달라고 하자 노승이 왕겨를 가져 오라 하고는 왕겨 한 줌을 광중 물 위에 띄우니 광중 물이 서서히 없어져 버렸다. 얼마 후에 수리산 못 물에서 왕겨가 나왔다는 전갈이 왔다. 이에 상주는 크게 기뻐하고 노승에게 사의를 표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로 500여 년이 훨씬 지났으나 지금도 3년에 한 번씩 안동권씨 후손들은 수리산을 손질한다고 한다.


<양촌 권근 이야기(陽村 權近 이야기)>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에 전해오는 권근과 조선 태조에 관한 설화이다.


권근(權近 1352~1409)은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서 크게 활약한 대학자이며 문학가이다. 1352년(공민왕 원년)에 검교정승 권희(權僖)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권진(權晋)이었으며 자는 가원(可遠) 또는 사숙(思叔)이요, 호는 양촌(楊村)이다. 고려 말 충주로 유배되어 와 양촌에 살았으므로 이를 호로 삼았다. 시호는 문충공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권근은 태조 이성계가 개국한 뒤에 데려가려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태조는 한 동네에 살면서 교분이 두터웠던 권근의 아버지 권희를 통하여 권근의 출사를 종용했다. 이에 권희가 곧 서울에 올 것이라 꾸미고 사람을 보내 오기를 재촉하였다. 권근은 할 수 없이 충주 양촌에서 나섰고, 감사(현 도지사)는 떠났다고 장계를 올리고 곳곳에 장막을 치고 음식을 차려놓고 기다렸다.


태조가 손님 맞는 예로 편전에서 대접하고 팔도의 경치를 그린 병풍을 가리키면서 “어느 누각 어느 정자에 나를 위해 시를 지어 나라의 명승지를 자랑하게 하라”하니 권근이 물러 나와 지어 올렸다.


태조가 곧 권근에게 지제교를 임명하니 그는 어쩔 수 없이 명을 받고 나와 양촌으로 돌아가는 날에 상소를 올렸다. 고려조 정몽주는 충신이니 표창하고 증직을 내려 절의를 숭상하도록 간청하는 내용이었다. 이를 전해 들은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논박하였지만 태조는 권근의 말을 따랐다. 당시의 선비들이 권근을 종주로 간주하였는데, 이 일이 있은 후로는 모두 머리를 돌리고 침을 뱉었다 한다.


권근의 형인 권충(權衷)이 “자식이 있어서 불효하면 불욕이지만 나라에 불충하면 나라가 망하는 것이니, 나 하나의 체면만 내세워 세속적인 것에 급급하면 어쩌나(有子不孝不辱 事君不忠國亡 吾何面目立於世乎)”하고 충고하여 권근이 출사를 결심하였다고 한다.


<여기소 설화(麗妓沼 說話)>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차평리에 전해오는 여기소(麗妓沼)에 관한 설화이다.


생극면 소재지인 신양리에서 동북으로 약 5㎞ 지점에 ‘여기소’라고 불리는 못(沼)이 있다. 조선 초기 이 곳 못이 내려다보이는 평탄한 암반은 글을 좋아하는 선비 유생들이 앉아 천하사를 공론하고 시를 읊으며 즐기던 곳이었다.


어느 해 여름, 지나가던 보부상 하나가 이곳에서 쉬어가며 경기도 광주 땅에 선옥이라는 예쁜 기생이 줄을 잘 타는데 이곳으로 데리고 와서 폭포수를 바라보며 줄을 태우면 한결 즐거움이 더할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선비들은 좋은 생각이라며 즉시 사람을 보내 선옥이라는 기생을 데려오게 하였다.


선비들이 선옥을 보니 천하에 이토록 예쁜 미인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선옥은 과연 절세가인(絶世佳人)이었다. 선비들은 황홀한 기분으로 선옥을 맞이했다. 선옥은 노래도 잘했고 시작(詩作)도 일품이었다. 다만 선옥의 얼굴 어딘가에 어두운 그림자가 깃들어 있어 불길한 느낌을 주는 안색이었다.


그 때 이곳을 지나가던 한 노승이 은밀히 선옥을 불러 “얼굴을 보니 죽음을 면치 못할 상이구나. 내가 살아날 방법을 일러 줄 테니 내일 칠장사로 찾아오라”고 일렀다. 그러자 선옥은 조용히 입을 열어 “죽을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며 피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 마음 편안함이 고요한 대해(大海)와 같습니다. 그러니 염려마십시오”라고 대답하자 노승이 결연히 깨달은 바가 있어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다음 날 선옥은 여러 선비들과 다시 여기소에 나와 자신의 장기(長技)인 줄타기하기 위해 폭포를 중심으로 못의 양쪽에 있는 나무에 줄을 매어 늘이고 그 위에 올랐다. 그 때 선옥은 하얀 치마저고리에 흰 버선을 신었는데 암반 위에서 그녀를 바라본 모습은 마치 한 마리 고고한 백학 같았다.


선비들은 입을 벌린 채 넋을 잃고 한 마리 백학이 폭포를 등지며 외줄을 타고 못 위를 너울너울 춤추듯 건너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기침은 고사하고 숨소리마저 죽였다. 그런데 한 번 지나가고 다시 외줄을 타고 되돌아가던 선옥은 줄 한가운데서 멈칫하더니 몸을 날려 물 속으로 곤두박질을 했다. 이것을 본 좌중은 일시에 자리에서 일어서며 “악!” 소리를 질렀다.


솟구치며 오르는 폭포수에서 선옥의 하얀 시체가 떠오른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상처 하나 없는 그 아름다운 얼굴은 마치 생시의 얼굴처럼 온화하고 혈기마저 있는 듯 보였다.


그 후부터 여기소 암반에서 선비들이 모이는 일이 없어졌다. 사람들은 선옥이 줄을 타다가 실족(失足)하여 못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고 하나 현장을 본 사람들은 분명히 선옥이 스스로 몸을 던져 자살을 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절세가인 선옥이 왜 스스로 몸을 던졌는지 그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로부터 ‘아름다운 기생이 죽은 웅덩이’라고 해서 이곳을 ‘여기소(麗妓沼)’라 부르게 되었다.


<장자봉 설화(長者峰 說話)>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병암리에 있는 장자봉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고려 중기 병암리 북쪽의 산기슭 마을에는 아무런 부족 없이 유복하게 사는 부자가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아무 불평 없이 살다 보니, 사람이 나태해지고 권태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이에 부자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런 부족을 모르고 산다는 것은 아름다운 생활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하다못해 물걱정이라도 한번 해보자고 물이 귀한 산중턱에 집을 짓고 이사를 하였다.


그곳에서 살다 보니, 과연 물을 얻으려면 산 밑에까지 물지게를 지고 내려가야만 했다. 부자는 비로소 물 부족을 느끼고, 산 아래 사람들한테 물 한 동이에 쌀 한 말을 주겠다고 하였다. 이 말에 인근 사람들이 너도나도 물동이를 이고 들이닥쳐서, 집 안에는 어느새 삼 년을 두고 마셔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물이 모였다. 그후 이 일이 알려지면서, 큰 부자가 아무 부족함 없이 살았던 산이라고 하여 인근 사람들이 이곳을 ‘장자봉’이라고 부르게 되었단다.


<태종과 권제 이야기(太宗과 權踶 이야기)>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전해 내려오는 태종과 권제 이야기이다.


조선 전기 태종 신오년에, 태종이 친히 선비를 뽑기로 하고 과거시험을 치렀다. 마침내 시험이 끝나고, 독권관(讀券官) 하륜이 우등에 든 세 사람의 시험지를 들고 왔다. 태종이 이르기를, “마땅히 향을 피우고 장원을 뽑던 옛 방식대로 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손이 가는 대로 시험지를 하나 뽑으니 권제의 것이었다.


이에 태종이 기뻐하며, “권근의 죽음을 슬퍼하였더니 이제 장원에 그 아들을 얻었으니 적이 위안이 된다.” 하고는 하륜 등을 돌아보며, “이는 내 문생이니 경들은 자신의 문생으로 보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하륜 등은 신방(권제)의 인사를 받지 못했다고 전한다.


감곡면

<거일바위(巨日바위)>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오향리에서 거북 모양의 바위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먼 옛날 한 노승이 산길을 지나다가 아주 잘생긴 바위를 보고 가던 길을 멈추었다. 큰 산 아래로 뻗은 능선 줄기에 고즈넉한 마을이 있는 곳이었다. 보아하니 그 바위는 거북의 몸통 형상이 분명하였다. 노승이 다리도 쉴 겸 바위에 걸터앉아 사방을 둘러보는데 멀리서 또 하나의 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바위는 노승이 앉아 있는 바위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형상이었다. 노승이 그 바위 쪽으로 가서 보니 거북의 눈을 닮은 형상이었다. 마침 마을 사람이 지나가길래 바위에 대해 물어 보았으나 모른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스님은 두 바위를 한참 보고 마을의 지형을 살피더니 마을 사람에게, “먼 훗날 이 마을에서 훌륭한 인물이 나올 것이니 마을 이름을 클거(巨) 자에 날일(日) 자를 써서 거일이라 부르시오.” 하고는 갈길을 갔다. 그후 그곳 사람들은 노승의 말대로 마을 이름을 거일이라고 고쳐 부른 뒤 큰 인물이 날 것을 기다린다고 한다.


<골상촌 가사바위(골桑村 袈裟바위)>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상평1리 골상촌에 있는 바위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음성군 감곡면 상평1리의 골상촌 동쪽 산마루에는 바위가 하나 있는데, 예전에는 이 바위 밑에 여러 스님이 살던 절이 있어 절터골이라 불렸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스님이 하나둘 없어지더니 한 스님만 남게 되었다.


어느 날 이 스님마저 사라져 버려 마을 사람들이 백방으로 찾았으나 행적이 묘연하였다. 그런데 바위 위로 올라가 보니 스님이 입고 있던 가사(승복)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후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가사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금구몰니형과 거먹소의 간(금구몰니形과 거먹소의 肝)>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오갑리에서 금구몰니형 명당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옛날에 도승으로 이름난 도선대사가 오갑땅을 지나게 되었다. 도선대사는 잠시 쉬었다 가려고 노인들이 모여 앉은 어느 정자나무 밑에 앉으며, “이곳에 천하 명당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네.” 하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귀밝은 한 노인이 그 소리를 알아듣고, “천하 명당이 어디에 있으며 대사는 어느 절에 계시오?” 하고 물었다. 도선대사는, “소승은 정처없이 다니는 도선이라고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도선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트인 노인이, “그래, 천하 명당이 어디에 있소?” 하며 다급하게 묻자 도선대사는 손으로 원통산을 가르키며, “저기 저 산 아래 금구몰니형이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금구몰니형이란 금빛 나는 거북이가 진흙에 빠져있는 형상으로, 그곳에 묘를 쓰면 자손들이 번창하고, 또 그 자손에 장군이 여럿이 날 명당이라고 알려주었다.


노인은 도선대사의 소맷자락을 꼭 붙잡고, “대사님, 그곳을 알려 줄 수 없겠소. 내 폐백을 후하게 드릴 터이니 그 자리를 좀 알려 주시오.” 하고 간청했다. 그러나 도선대사는, “그런 명당은 임자가 따로 있으니 알려 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하며 벌떡 일어나더니 유유히 어디론가 가버렸다고 한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우암 송시열 선생의 제자인 직재 이기홍 선생의 자손들이 웃오갑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다. 그 자손들의 일부가 새로 살기 위한 터를 잡기 위하여 사방에 고명하기로 이름난 지사를 초빙하여 왔다. 그리하여 새로 잡은 터가 늘거리 새터말이라고 한다. 그때 판윤공의 둘째 아들인 진사공이 연로하여 용연공이 산소 자리를 미리 정해 놓으려고 여러 해 심려하던 중인지라, 마침 이름높은 지사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는 집으로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날을 후히 대접받은 지사는 진사공의 산소 자리를 잡으려고 길을 나섰다. 원통산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던 지사는 그리로 향하여 한참 동안 걸어가다가 지금의 진사공 산소 자리에 가서 털썩 앉아서 손으로 앞에 있는 조그만 봉우리를 가리키며, “저 봉우리가 이름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같이 갔던 사람들이 “그것은 투구봉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요 옆에 있는 산은 무슨 산이오?” 하고 지사가 다시 물었다. 그러자 “그것은 장군재입니다.”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장군재라 투구가 있고 장군재가 있으면 영마가 있어야 되는데…….” 하고 지사가 중얼거리자 같이 갔던 사람들이, “저 앞에 보이는 산이 영산재요.” 하였다. 지사가 사방을 휘이 두리번거리며, “갑옷을 입고 벗는 자리가 있으면 좋겠는데.”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저기 북쪽으로 보이는 산이 오갑산이오.” 하는 대답이 나왔다. 지사는 무릎을 치며, “이 근방에 활을 쏘는 자리는 없소?” 하고 물었다. 그러자 누군가, “저 아래 활을 쏘는 궁장이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지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없을 리가 없지.” 하고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모두 구비되었는데, 장군들이 모여서 회의하는 자리가 있으면 더 좋겠군.” 하였다.


그러자 “이 위에 올라가면 오장골이 있습니다.” 하는 대답이 나온다. 지사는 무릎을 탁 치며, “이 자리는 거먹소의 간을 먹어야 눈이 더 밝아져서 금정을 제대로 놓겠습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용연공은 즉시 사람을 장으로 보내 가장 크고 살찐 거먹소를 사다가 황새동번던(지금의 삼성피씨 자리)에서 작판하였다.


그리하여 좋은 술과 간을 먹은 지사는, “아, 이제는 눈이 한결 더 밝습니다.” 하며 지금의 진사공이 묻힌 산소 자리에 가서 금정을 놓으면서 하는 말이, “여기에 산소를 모시면 자손이 번창함은 말할 것도 없고 몇 대 후에 반드시 장군이 날 것이오.” 하였다. 그 말이 적중되어 대대손손 자손이 번창하고 장군이 배출되었다고 전한다.


<돌마람 나비혈 이야기(돌마람 나비穴 이야기)>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상우3리의 돌마람골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풍수 전설이다.


아주 오랜 옛날 음성군 감곡면 상우3리에 배씨 성을 가진 부자(富者)가 살았는데, 벼슬은 없었으나 인근에서 인정 많고 마음씨 좋기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이런 소문이 널리 퍼져 마을을 지나가던 손님들은 시시때때로 찾아와 후한 대접을 받으며 며칠씩 묵어가는 일도 허다하였다.


사랑채 인심은 이렇게 좋았으나 안채에서는 손님 대접에 걸인들의 시중까지 들다 보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자 손님 접대에 지치고 짜증난 배씨 마님은 어떻게 하면 손님이 덜 찾아올까 하는 궁리만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배씨 집에 한 스님이 찾아왔다. 시주를 청하던 스님을 보고 있던 배씨 부인은 ‘옳지, 저 스님에게 어떻게 하면 손님이 덜 찾아올까 물어 봐야지.’ 하고 스님에게 다가갔다. 배씨 부인은 “스님, 제가 시주는 후하게 할 터이니 내 부탁 하나 들어 주시겠소?” 하고 청했다.


스님이 쾌히 승낙하자, 배씨 부인은 “우리 집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손님들이 너무 많이 찾아드니 어떻게 하면 손님이 덜 찾아오게 할 수 있는지 혹 비방이 있으면 좀 일러 주시오.”라고 했다.


잠시 배씨 부인을 바라보던 스님은 “비방이 있긴 있습니다만……” 하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에 배씨 부인은 귀가 번쩍 띄었다. “시주는 후하게 할 테니 좀 일러주시오” 하고 스님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스님은 손짓으로 저 앞을 가리키며 “예, 그럼 한 가지 비방을 가르쳐 드리지요. 저 앞에 돌탑을 쌓아 놓으시면 손님들이 조금 덜 찾아올 겁니다.” 하는 것이었다. 이에 배씨 부인은 크게 기뻐하며 약속대로 스님에게 후하게 시주하였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전할까 고민하던 배씨 부인은 잠시 후 영감을 불렀다. “영감, 저 앞에 돌탑을 쌓으면 더 큰 부자가 된대요!” 하고 영감에게 돌탑 쌓기를 재촉하였다. 아내의 말에 배씨도 크게 기뻐하며 당장 사람들을 불러 모아 돌탑을 완성하였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돌탑이 완성된 후, 배씨 집에는 손님은 고사하고 거지들조차 점점 발길이 줄어들었다. 몇 해 후, 배씨 집의 재산은 점점 줄어들더니, 나중에는 배씨네는 물론 마을 전체가 폐허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상우3리는 예로부터 돌이 많아 ‘돌많음’이라 부르다가 ‘돌마람’이 되었다고 한다. 풍수설에 의하면, 상우3리 터가 나비혈이라 나비가 훨훨 날아야 하는데 나비의 한쪽 날개 위에 무거운 돌탑을 쌓자 나비가 날지 못하여 마을이 망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망가리고개(亡家里고개)>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오향리에 있는 망가리고개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옛날 옛적에 중년의 부부가 부모를 모시고, 아이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어느 해 가을, 남편이 벼 타작을 도와달라는 이웃 마을 친구 집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일이 늦게 끝나 깊은 밤중에야 집에 돌아오던 남자는 고갯마루 밑에서 여인네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남자가 몰래 웃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가 숨어서 보니, 커다란 호랑이와 여인네가 함께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호랑이가 꼬리를 샘물에 담갔다가 잡아다 놓은 여인네의 얼굴에 문지르니 넋이 나간 여인네가 깔깔거리고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웃음소리가 귀에 익어 깜짝 놀란 남자가 자세히 살펴보니 호랑이 옆에 있던 여인네는 바로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였던 것이다. 평소 워낙 담이 세고 힘이 좋았던 남자는 몽둥이를 찾아들고 호랑이를 향해 달려가 힘껏 내리쳤다. 별안간 습격을 받은 호랑이는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치고 말았다.


남자는 얼른 아내를 엎고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정성껏 간호했으나 호랑이에 홀려 정신이 나간 아내는 깨어나지 못하고 닷새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에 크게 상심한 남자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 집을 나갔다. 이후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어 망해 버리고, 가족들도 모두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사람들은 호랑이와 여인네가 있던 고개를 망가리고개라 불렀다고 전한다.


<벼락바위>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오향리에 있는 벼락바위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오향4리(오근리) 산 밑 농로 옆에는 가로 4m, 세로 3m, 높이 2m 정도인 벼락바위가 있다. 그런데 약 40년 전 한 석수가 이 벼락바위를 파손하여 석재로 가져가고 현재는 본래 크기의 1/3 정도만 남아 있다. 그 앞에 있는 들을 오향4리에서 가장 기름진 벼락바위들이라 한다.


오근리 맨 위에 위치한 절에 한 승려가 있었다. 동네마다 시주를 다니며 지냈는데, 하루는 장독을 열어보니 장항아리에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빠져 죽어 있었다.


스님은 구렁이를 건져내고 이 장을 어떻게 할까 고심하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팔기로 하였다. 스님은 장항아리를 지게에 지고 동네마다 돌며 장을 다 팔았다. 절로 돌아오는 길에, 커다란 바위에 지게를 받쳐 놓고 쉬고 있던 중, 갑자기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쳐 장항아리는 두동강이 났고, 승려 또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후 동네 사람들은 이 바위를 벼락바위라 부른다.


<비석돌(碑石돌)>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오궁리에 전해오는 비석돌에 관한 설화이다.


‘비석돌’ 이야기는 감곡면 오궁리 오갑의 신씨 문중의 일화에서 비롯되었다. 인천 강화에 가면 돌들이 모두 별다르고 기이하다. 그 중에서도 물 속에 있는 해중석은 돌의 품질이 특이하고 비석을 새기는 데 우리나라에서 제일로 꼽으며, 풍화 작용에 강하여 수백 년이 지나도 변질되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러한 돌이 많이 나는 강화도에 판윤공이 강화유수로 갔을 때 신도비를 새길 수 있는 큰 비석돌 세 개를 잘 다듬어서 배에 싣고 강화에서 한강을 따라 여주에 도착하여 비석 한 개는 여주 강변에 내려놓고, 두 개는 샘깨강으로 가져와 인력을 동원하여 아홉사리에 내려놓고 끌어 옮겼다.


당시에는 육로보다 배로 운반하는 것이 더 쉬워 강을 따라 배로 왔으나 샘깨강까지 와서는 할 수 없이 인력으로 끌어오는 수밖에 없었다. 인력을 동원하여 아홉사리고개로 넘어 오는데 돌 한 개는 무사히 오갑까지 끌어왔으나, 두 개째 끌어오는데 꼬불꼬불 아홉사리고개가 워낙 가파르고 험한지라 조심하였으나 별안간 비석돌이 구르면서 사람을 후려치는 바람에 한 사람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상황이 그렇게 되고 보니 아무리 비석돌이 소중하고 강화에서 아홉사리고개까지 가져오느라고 고생은 하였지만 사람이 죽었는데 그 비석돌을 오갑까지 끌어오자고 할 형편이 못 되어서 사람이 죽은 그 자리에 땅을 파고 비석돌을 묻었다고 한다. 아마도 아홉사리 굽이굽이 돌아치는 그곳 어디엔가 묻혀 있을 것이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제천공이 별세하자 뱀산 모랭이에 산소를 모시고 강화에서 가지고 온 비석돌에 비석을 새겨 세웠다. 그 비석은 삼백여 년이 지난 지금도 석양 무렵에 먼 거리에서 보면 큰 거울을 세워 놓은 것처럼 환하게 빛을 내고 있다.


그러면 여주 강변에 내려놓은 비석돌 하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비석돌을 내려놓은 곳은 안동권씨와 제주고씨가 살고 있던 집성촌의 강변이었다. 그런데 이 비석돌은 갖다 놓은 지 몇 년 후 큰 홍수가 나는 바람에 강물이 불면서 떠내려갔다. 그 후로 안동권씨와 제주고씨의 자손들 사이에 대를 이어 그 비석돌 이야기가 전해졌다.


이곳에 와 계시던 한성부판윤 신대감이 강화유수로 계실 때에 좋은 비석들을 강화에서 뱃길로 이곳 여주까지 가져와서 강가에 놓았다가 큰 홍수에 떠내려갔는데 워낙 돌이 커서 멀리 가지는 못하였을 것이라는 전설이다.


이렇게 구전되던 중 1944년에 엄청난 홍수로 여주 강물이 범람하여 그 일대가 물바다가 되었다. 장마가 끝나고 강물이 빠지고 난 뒤에 보니 큰 버드나무 둥치 밑에 크고 잘 다듬어진 비석돌이 반쯤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자 동네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웅성웅성 하면서 어째서 이런 좋은 돌이 여기에 있을까 하며 제각기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때에 권혁수라는 안동권씨의 후손이 달려오더니 “이것은 오갑 신씨네 비석돌이다”라고 말하자, 여러 사람들은 어떻게 오갑 신씨네 비석돌인 줄 아느냐고 다그쳤다. 그 사람은 “이곳 강천에 전해오는 전설이 있는데 몇 백 년 전에 한성부판윤을 지내신 분이 강화유수로 있을 적에 비석돌을 그곳에서 배에 싣고 여주 강천 우리가 사는 곳에 와서 강가에 내려놓았다가 큰 홍수가 나는 바람에 떠내려갔다고 전해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니 “이것은 틀림없이 오갑 신씨네 돌이다. 이 고장 신판윤 대감 말고 저런 좋은 돌을 강화에서 가져올 사람이 누가 있나”하고 나이 많은 사람들이 말하자 젊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겠습니다”하였다. 그리고 난 후 즉시 고승배의 삼촌 고찬영과 권혁수가 오갑으로 달려왔다. 오갑에 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오갑 어른들도 역시 그러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과연 그 비석돌을 찾게 되었으니 고맙다 하고 두 사람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그러고는 서둘러 종중 회의를 하여 판윤공 산소에 신도비를 세울 것을 결의하고 우마차를 준비하여 여주 강천에 가서 비석돌을 찾아다가 유명한 석공을 불러 오랫동안 각자하여 1948년 2월에 신도비를 세웠다. 그리고 비석돌 하나는 아홉사리고개에서 언젠가 반드시 나올 것이라 믿고 있다.


<신선바위(神仙바위)>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주천리에 전해오는 신선바위에 관한 설화이다.


옛날 신선바위라는 바위가 있었다. 이 바위에 앉아서 불공을 드리면 신선이 되어 올라간다는 전설이 있었고, 전설대로 과연 하루에 승려 한 명씩 승천하여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지막 승려가 자신의 어머니가 고춧가루를 넣어 만들어 준 옷을 입고 불공을 드리는데, 커다란 지네 한 마리가 하늘에서 쾅! 하고 떨어졌다.


그러더니 새의 모양으로 변하여 어디론가 날아갔다. 새를 따라가 보니 도착한 곳은 주천리 근처의 어느 민가였다. 그곳으로 들어간 새는 사라지고 한참 만에 할머니가 나오는 걸 보고 승려는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아기를 낳았고, 그 아이는 17세까지 살다가 죽고 말았다.


<아치내 개울>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에 전해오는 아치내에 관한 설화이다.


아주 먼 옛날 오갑산에 힘이 좋고 몸이 날랜 장수가 비호같이 빠르고 건장한 좋은 말과 같이 살았다. 이 장수는 말을 타고 오갑산을 중심으로 원통산과 금봉산 그리고 인근의 큰 산을 오가며 장래 나라의 큰일에 대비하기 위해 열심히 무예를 익혔다고 한다. 오갑산을 중심으로 동막골 쪽과 돌마람미 쪽에 각각 절이 있었는데 두 절을 오가며 마음의 수양도 닦고 학문도 익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말을 타고 마산(지금의 매산) 위에 올라 앞을 바라보니 우뚝 솟은 원통산과 백족산 그리고 넓은 들판이 장수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내 한번 마산 위에서 원통산까지 말을 타고 건너보리라.’ 이렇게 마음먹은 장수는 오갑사의 승려를 찾아가 뜻을 말씀드리니 승려는 “아직 때가 이르니 무예를 더 익혀라”라고 말씀하였으나 장수는 그 말을 듣지 않고 혼자 그 날부터 훈련을 더욱 열심히 했고 말에게도 좋은 먹이를 많이 주어 더욱 건강하고 고된 훈련에 견딜 수 있도록 했다.


드디어 장수가 날을 잡고 승려에게 인사드리자 승려는 “나무관세음보살. 아직 때가 이르거늘”이라 하였다. 장수는 말을 몰아 마산을 향해 질풍같이 달렸다. 마산 위에서 원통산을 향해 뛰려는 순간 말이 돌 부리에 걸려 앞으로 넘어지며 절벽 아래로 구르는 것이 아닌가. 장수는 ‘아차’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말과 함께 절벽 아래 개울로 떨어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소식을 들은 승려는 장수와 말의 시신을 거두며 사람들에게 “모든 일은 때가 있는 법. 서두르면 변고가 생기고 아차하면 이미 늦는다”라고 말했다. 그 후 사람들은 개울을 아차내로 불렀고, 현재는 아차내가 변해 아치내로 불리고 있다.


<앵무새의 집>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에 전해오는 민담이다.


온갖 새들이 어울려 살고 있는 큰 대나무 숲에 불이 났다. 하늘을 날며 놀고 있던 앵무새는 깜짝 놀랐다. “내 집이 타네! 내 집이 타네!” 숲까지 단숨에 날아온 앵무새는 다른 새들에게 알리기 위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불이야! 불이야! 대숲에 불이 났다!”


그러나 날아오는 새는 한 마리도 없었다. 불꽃에 놀라 모두들 멀리 날아가거나 숨어 버렸기 때문이다. 불은 점점 대숲을 삼켜 버릴 듯 퍼져 나갔다. 할 수 없이 앵무새는 산 아래 연못으로 단숨에 달려 내려갔다. “연못님! 연못님! 큰일 났습니다. 대숲이 타고 있습니다. 물을 좀 가져가도 될까요?”


마음씨 고운 연못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선뜻 승낙했다. “마음대로 해요. 앵무새 아가씨.” 앵무새는 날개에 물을 묻혀 대숲에 뿌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날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날개가 저리고 꼬리털이 불길에 그을렸지만 앵무새는 쉬지 않고 연못의 물을 날개에 묻혀 숲에 뿌렸다.


하루가 지났다. 그래도 숲은 마찬가지였다. 한쪽에서는 꺼 나가고 있지만 다른 쪽에서는 비슷한 기세로 번지고 있었다. 이틀 사흘 날이 자꾸 흘렀지만 앵무새는 지친 몸을 이끌고 열심히 불을 껐다. 지나가던 바람이 이 광경을 보고 구름에게 말했다. “구름도령, 우리 불구경 갑시다. 귀여운 앵무새가 불을 끄고 있군요.”


바람과 구름은 대숲으로 내려와 앵무새에게 말했다. “귀여운 아가씨. 꽁지가 다 탔군요. 그런 조그만 날개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이제 그만 두시고 우리와 같이 구경이나 하십시다.” 그 소리에 앵무새는 노여워하는 기색도 없이 상냥하게 대답했다.


“내 집이 타고 있는데 어찌 구경만 한단 말입니까? 지쳐 죽는 한이 있더라도 불을 꺼 봐야지요.” 그 말을 듣자 심술쟁이 바람은 얼굴이 그만 빨개져서 도망치고 구름은 비를 내려 단숨에 불을 꺼주었다.


<용머리 설화(龍머리 說話)>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원당리에 전해오는 용머리에 관한 설화이다.


옛날 원당리의 빨래터에 용 한 마리가 살았다. 용의 횡포가 두려웠던 마을 사람들은 힘을 합쳐 용을 죽이기로 하였다. 마을 젊은이들이 모여 힘을 모아 대항하려 했지만 오히려 희생자만 생겨나고 화가 난 용의 횡포는 더욱 심해져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선비가 원당리를 지나다가 용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한번 용을 죽여 보겠다고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호기심과 반가움에 흔쾌히 승낙하고도 약간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선비를 지켜보았다. 선비는 활을 준비하고는 용을 찾아가 용을 향해 힘껏 활을 당겼다. 화살은 용의 목 부분에 정통으로 맞았고, 용의 머리는 두 동강이 나며 커다란 소리를 내며 땅으로 떨어졌다. 그 후 마을에는 평화가 찾아왔고, 사람들은 용의 머리가 떨어진 곳을 가리켜 용머리라 부르게 되었다.


<윤기손·기진 형제의 효(尹起巽·起辰 兄弟의 孝)>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문촌리에서 전해 내려오는 효성스런 두 형제 이야기이다.


조선 후기 정조대에 감곡면 문촌리에 살던 윤기손과 윤기진 형제는 효자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어느 날, 홀어머니 원씨가 병환으로 자리에 드러눕자 형제는 밤낮없이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병간호를 하였으나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꿩고기가 먹고 싶다고 말하자 형제는 꿩을 잡으러 산중을 헤맸으나 한여름에 맨손으로 꿩을 잡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해도 잡을 수가 없자, 형제는 어머니를 살려 달라고 하늘에 백일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얼마 후, 형제의 지극한 효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독수리가 꿩 한 마리를 형제 앞에 떨어뜨리고 날아갔다. 형제는 하늘에 감사하며 꿩을 고아서 어머니께 드렸는데 거짓말같이 어머니의 병이 나았다. 그 후 어머니 원씨가 또 병환이 들었다. 의원은 이번에는 아무래도 소생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형제는 어머니 대신 죽을 각오를 하고 왼손가락을 모두 단지(斷指)하여 그 피를 어머니의 입에 넣어드렸다. 그리하여 다행히 어머니는 소생하였으나 동생 윤기진은 열아홉의 나이에 그만 죽고 말았다. 윤기진의 아내는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따라 죽으려다가 어린 자식을 양육하고 늙은 시어머니를 봉양할 결심으로 살아서, 훗날 근동에서는 다시없는 효부로 칭찬이 자자하였다고 전한다.


<이완 일화(李浣 逸話)>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완 대장의 이야기이다.


이완(李浣 1602~1674)은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인데다 담력이 태산과 같았다. 이완이 어려서 어머니와 외갓집에 갔을 때의 일이다. 한밤에 뒤가 마려 일을 보는데, 호랑이가 이완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개를 물어 갔다. 개의 비명소리에 집 안에서 사람들이 뛰쳐나와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이완은 볼일을 다 보고는 태연하게 호랑이가 개를 물어갔다고 말했다.


그 말에 어른들이 기겁을 해서, 그런 급한 판국에 어찌 그리 태연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완은 빙긋 웃으며, “호랑이가 이미 달아났는데 소리를 지른다고 무슨 소용이 있으며, 또 물어 간 개를 먹기 전에는 되돌아오지 않을 텐데 무엇이 급해 보던 뒤를 중도에서 마치겠습니까.” 하였다.


어느 해 여름 이완이 친구들과 낮잠을 자는데 커다란 뱀이 그의 허리를 타고 넘어갔다. 이완은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다가 뱀이 다 지나간 뒤에야 친구를 깨워 뱀 이야기를 하였다. 친구가 뱀 이야기에 얼굴빛이 하얗게 변해 벌떡 일어나며 “이 사람아 그런데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나.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네.” 하였다. 그러자 이완은 태연하게, “그놈이 나를 나무둥글로 알고 넘어가는 이상 나도 그런 양 하고 있어야 무사하지 않겠나.” 하고 대답하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완이 스물 살이 넘어서며 사냥을 매우 좋아하여 날마다 깊은 산중에 들어가 짐승을 잡았다. 하루는 이산 저산을 다니다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날은 어두워지고 산은 험해서 이리저리 헤매던 중 불빛이 보여 그 불빛을 찾아갔다. 이완이 대문을 두드리니 한 여인이 나와, 이 집은 도적 소굴이고 자신도 잡혀 온 몸이라며 어서 도망가라고 손을 저었다.


그러나 이완은 막무가내로 집 안으로 들어가 저녁상을 차려 달라고 하여 한상 가득 잘 먹고는, “방은 먼저 차지한 놈이 임자다!” 하고는 도적 괴수의 잠자리에 들어가 태연히 잠을 청했다. 마침내 도적 괴수가 들어와 이 광경을 보고는, 노발대발하며 이완을 밧줄로 꽁꽁 묶어서 대들보에 매달았다. 그러고는 시장하다며 음식을 차려 놓고 술을 마시는데, 이완이 묶인 채 “졸장부도 분수가 있지. 사람을 옆에 놓고 혼자 술을 마시기냐?” 하면서 힐책을 했다.


그 말에 도적 괴수가 “옛다 먹어라!” 하고 바가지로 술을 퍼주자 벌컥벌컥 마시고는 다시 안주를 달라고 하였다. 다시 도적 괴수가 칼끝에 안주를 꽂아 주자 태연히 받아서 질겅질겅 씹어먹는다. 그 광경을 보던 도적 괴수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후닥닥 달려들어 묶었던 밧줄을 풀어 주고는, “무식한 놈이 어른을 몰라뵈었습니다.” 하고 코가 땅에 닿도록 넙죽 엎드려 큰 절을 하였다. 이완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죽이려면 빨리 죽일 것이지 이 무슨 장난이냐?” 하였다.


그러자 도적 괴수가, “아니올시다. 전년에 어느 이름 높은 점쟁이한테 신수를 점친 일이 있는데, 제가 언제고 포도청에 잡혀가서 죽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소인이 살 도리가 없는가 물었더니, 어느 때고 포도대장 될 사람을 만날 때가 있을 테니 그때 잘 말해서 증표를 얻어야 산다고 했습니다. 오늘 보니, 틀림없이 훗날 포도대장이 될 듯하니, 저를 죽이지 않겠다는 증서 하나만 써주십시오.” 하고 사정하였다.


아직 과거 급제도 못한 처지였으나 도적이 하도 조르는지라, 이완은 할 수 없이 증표를 하나 써주었다. 그리하여 죽을 뻔한 목숨도 살고, 뿐만 아니라 도적 괴수의 재산과 여인까지 얻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 세월이 흘러서 이완이 훈련대장과 포도대장을 겸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도적 하나가 잡혀 왔는데, 죄상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죽이기로 판결이 났다. 그런데 그 도적이 죽기 전에 꼭 한 번 포도대장을 뵙게 해달라고 애원을 한다는 말에 이완이 도적을 보러 갔다.


도적은 이완을 보자마자, “저를 몰라보시겠습니까?” 하고 눈물을 흘렸으나 이완이 보기에 알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자 도적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완이 젊은 시절 산속에서 도적 괴수한테 써준 증서였다. 이완은 도적을 당장 풀어주고는, 개과하게 하여 부하로 삼았다. 그 도적은 그뒤 방어사에까지 올라 충성을 다했다고 전한다.


<자점보(自點洑)>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주천리에 있는 자점보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조선 중기 인조 때의 역적 김자점(金自點 1588~1651)이 장호원읍에 부친의 묘를 썼는데, 이 묘가 비룡상천형이었다. 김자점은 용이 오르려면 물이 있어야 한다면서 감곡면 주천리에 있는 보를 막았다. 그후 김자점이 보를 막았다고 하여 ‘자점보’로 부른다.


<지네굴(지네窟)>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주천리 백족산 위에 있는 지네굴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오랜 옛날 감곡면 주천리 백족산 위에는 절이 하나 있었는데, 법당에서 만 번 절을 하면 승천을 한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전설에 따라 다른 스님들은 모두 승천을 하여 떠나고, 이제 제일 젊은 스님만 남게 되었다.


어느 날, 스님은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리러 집으로 갔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어머니가 담배 냄새가 진하게 밴 삼배옷을 입혀 주고 주머니에 담뱃잎을 가득 넣어 주었다. 스님은 이상했으나 아무 소리 하지 않고 다시 절로 돌아와 승천을 하겠다는 일념으로 정성껏 만 배를 올렸다. 그러자 갑자기 하늘에서 큰 지네가 떨어지더니 스님을 잡아먹으려고 했다.


놀란 스님이 달아나려 하는데 지네의 속도가 더 빨랐다. 그런데 쫓아오던 지네가 삼배옷에 배인 담배 냄새에 놀라서 멈칫거렸다. 스님은 이때다 싶어서, 어머니가 주머니에 넣어 준 담뱃잎을 지네에게 던졌다. 지네는 괴로워 꿈틀거리다가 돌돌 말려 바위에 머리를 박고 죽어 버렸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바위에 뚫린 굴을 지네굴이라고 불렀다.


<집은골 이야기>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문촌리 집은골에서 풍수 비보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문촌리 늘거리 음달만 뒤편 집은골에는 조선 후기 철종 때 오위장을 지낸 진백수란 사람의 조부모 산소가 있는데, 풍수지리적으로 괘등형(卦燈型) 자리라고 한다. 진백수는 조부모가 돌아가시자 이곳에 산소를 모시고 움막을 지어 기거하면서 매일 삭망에 등불을 걸어 주위를 밝혔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는, “등잔에 불을 켜려면 기름샘이 있어야 하고 등을 걸어놓으려면 크고 튼튼한 나무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이 등불만 걸어놓는다고 괘등형이 되느냐? 산 아래에 샘을 파고 오래 사는 나무를 심거라.” 하고 꾸짖다가 홀연 사라졌다.


잠에서 깨어난 진백수는 꿈이 이상하고 신기해서, 혹시나 하고 노인이 일러준 곳을 파보니 바위틈에서 물이 솟아났다. 그리하여 옹달샘을 만든 진백수는 산에 소나무를 심어 조림을 하기 시작했다. 근처 사람들이 나무를 하러 오면, 일부러 소나무를 베지 못하게 잡목을 미리 베어 놓았다가 주기도 하고, 식사때가 되면 산 아래 집에서 국과 밥을 해서 끼니를 대접했다. 이에 감동한 사람들은 이 산을 오위장집이라 부르며 돌봐 주었고, 정표로 옹달샘 옆에 돌탑을 쌓아 보은탑이라고 불렀다.


그후 한동안 울창했던 숲은 한일합방 후 벌목으로 사라지고, 돌탑과 올달샘은 갑신년 장마에 산사태가 일어나 묻혀 버렸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다시 옹달샘을 파고 주위에 나무를 심어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장소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지금도 진백수 조부모 산소 부근에는 노송 몇 그루가 서 있는데, 아주 오래된 나무라고 한다.


<쫓겨난 민망나니(쫓겨난 閔망나니)>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에서 전해 내려오는 민망나니에 관한 설화이다.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과 민비가 서로 지지 않으려고 세력 다툼이 한창이던 때에 나라는 극도로 혼란해지고 국가 재정이 어려워 매관매직까지 하고, 각 지방의 토호들은 여기저기서 토구질로 민심을 극도로 혼란하게 만들었다. 토구질은 양민들이 부지런히 일하여 근근이 모은 재산을 미묘한 죄명을 씌워 재산을 강탈하는 행위였다. 그리하여 민심은 갈수록 혼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조선 팔도 각 처에 사는 대성촌만 찾아다니면서 큰 도적질을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이 사람이 바로 민비의 열촌 오라버니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혼자 다니면서 도적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포를 입고 큰 갓을 쓰고 사인교를 타고 사또 행차같이 하고 다니면서 민비의 세도만 믿고 가는 곳마다 큰소리치고 호령하였다.


어느 문중이든지 한번 도착하면 열흘 스무 날 묵으면서 닭과 돼지를 잡아 푸짐한 대접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그 문중의 재산 정도를 낱낱이 조사하여 자기 마음에 흡족하도록 빼앗아 가야 직성이 풀렸다고 한다. 그러니 팔도강산 곳곳마다 명문대가 집만 찾아다니며 그런 도적질을 일삼았으니 사방에 소문이 자자하여 그를 칭하여 ‘민망나니’ 라고 하였다. 곳곳에 사는 명문대가들은 그 민망나니가 찾아올까봐 전전긍긍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사인교를 타고 오갑(梧甲)에 나타난 사람이 있었으니, 통영갓에 도포를 입고 거드름을 빼면서 점잖은 사또 행차같이 하고 오갑 강당에 나타나 제집에 들어가듯이 들어앉은 것을 보고 수상히 여겨 몇 사람이 모여 웅성거리는데 별안간 “여봐라!” 하더니 “이 집에 하인 없느냐?” 하였다. 그러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나오며 “나으리, 왜 그러십니까?” 하자, 화등잔 같은 눈으로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너 빨리 가서 이 신씨 문중의 제일 어른을 모시고 오너라.” 하였다.


그 당시 문장으로는 항렬이나 연령으로나 웃오갑 신용대 댁의 할아버님이 제일 문장이었다. 그러나 재실에 사는 그는 어느 분을 모시고 와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서 있는데 “어서 모셔 오지 못할까?” 하고 호령을 하였다. 그러는 중에 집안 어른들이 한 분, 두 분 모였는데 사인교가 마당에 놓여 있고 사인교를 메고 온 가마꾼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소문에 듣던 민망나니가 왔구나.’ 하고 짐작을 하였다.


집안 어른들은 살며시 밖으로 나오면서 그 재실에 있는 사람을 불러 속히 웃오갑 신용대 댁에 가서 민망나니가 왔다고 여쭙고 웃오갑 어른들은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오시도록 말씀드리고, 한편으로는 오갑과 새터에 사는 집안 분들을 소집하는데 민망나니가 왔으니 다 모이도록 하되 젊은 사람들은 몽둥이를 하나씩 가지고 오라고 기별하였다.


그때가 마침 정초라 집에서 노는 때이므로 민망나니가 왔다는 말을 듣고 “큰일 났네. 그놈 민망나니가 가는 곳은 어느 문중이고 거덜이 난다는데.” 하고, 불과 몇 시간 안 되어서 아래 오갑과 새터에 있는 문중 사람들은 다 모였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은 한데 모여서 동정을 살피고 국당장(국당은 신용대 할아버지의 호)을 비롯한 집안 어른들은 방으로 들어갔는데, 민망나니는 거만한 어조로 “당신이 신씨 문중에 문장이 되시오?” 하고 물었다.


“그렇소.” 하고 대답하고는 국당장은 “인사나 하십시다. 나는 신돈회요.” 하자 그는 자기 성명을 밝히지 않고 “나는 중전 마마의 열촌 오라버니요.” 하였다. 그러자 국당장은 “저런 괴이한 놈이 있나. 통성명하자는데 제 성명은 밝히지 않고 중전 마마의 열촌 오라버니라고 하니, 오만 방자하기 짝이 없는 놈이로구나.” 하고 속으로 괘씸하게 생각하였다.


국당장은 밖으로 소변보러 나오는 것처럼 나와서 모여 있는 젊은 사람들을 불러 놓고, “방에서 내가 호령하는 소리가 나거든 방으로 들이닥쳐 갓을 벗기고 지져 밟고, 밖에 있는 사인교는 몽둥이로 때려 부수어서 타고 가지 못하게 만들라.”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방에 들어갔는데 민망나니가 하는 말이 “우리가 여기서 여러 날 묵어 갈 터이니, 먼저 돼지 한 마리 잡고 닭 몇 마리 잡아서 술과 안주를 장만하고 조석 마련을 하시오. 그리고 봐 하니 종중이 부자인 듯한데 재산이 어느 정도나 되나 공개하고 우리에게 얼마 정도나 줄 수 있나 이야기하시오.” 하였다.


그러자 국당장은 벼락같이 호령을 하면서 “이놈! 흉악한 강도가 아니냐! 밖에 누가 없느냐?” 하자, 밖에 있던 젊은 사람들이 와르르 들이닥치면서 다짜고짜 그놈의 멱살을 걷어들고 통영갓을 화닥닥 벗겨서 땅바닥에 놓고 발로 콱 밟아서 마당가에 던져 버렸다. 그러자 국당장은 “저놈을 뜰 아래로 끌어내라.” 하였다. 젊은 사람들은 그놈의 멱살을 잡아 쥐고 뜰 돌 아래로 끌어내려서 무릎을 꿇게 하였다.


그러자 국당장은 꿇고 앉은 그놈을 내려다보고 호통을 치면서 “이놈아, 이 나라의 국모이신 중전 마마께서 네놈보고 사인교나 타고 각 문중으로 다니면서 도적질이나 하라고 시키시더냐? 이놈, 관아에 고발하여 당장에 서울로 압송케 할 것이니 그리 알아라.” 하며 호통을 치자 민망나니는 국당장을 쳐다보며 “제발 한 번만 용서하여 주십시오. 다시는 이런 짓을 아니 할 테니.”라고 하면서 애걸복걸하였다.


그러자 국당장은 여러 문중 어른을 둘러보면서 “이놈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문중 어른들은 “그놈의 소행을 생각하면 괘씸하지만 한 번만 용서를 하여 주십시다.” 하였다. 그 말을 듣고 “여러분이 이번 한 번만 용서를 하여 주자고 하시니 이번만은 놓아 줄 터이니 다시는 우리 문중에 얼씬도 하지 마라.” 하면서 호령을 하였다. 그러자 민망나니는 벌떡 일어나더니 두리번두리번하며 사인교 메고 온 사람들을 찾는 꼴이었다.


그러나 사인교를 몽둥이로 때려 부수면서 가마꾼에게 “네 이놈들, 여기 있으면 요절을 낼 터이니 어서 도망가거라.” 하여 벌써 다 도망가고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니 사인교는 박살이 나고 가마꾼들은 도망가고 없으니 이리저리 둘러보며 허리를 굽히고 우물쭈물하더니 마당가에 있는 찌그러진 갓을 들고 꽁지가 빠져라 하고 도망을 가 버렸다.


그렇게 한 번 혼났으면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또다시 그런 행세를 하고 다니며 더 큰 도적질을 하다가 결국은 잡혀서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에서 치죄(治罪)를 하였다. “네 이놈, 중전 마마를 욕되게 하고 민심을 혼란하게 한 죄는 죽어 마땅하다. 또 이루 말할 수 없는 재산을 도적질한 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네 이놈, 팔도에 다니면서 보니 어느 문중이 제일 대접을 잘하고 어느 문중이 대접을 제일 못하더냐?” 하고 묻자, “충청도 충주 고을 오갑에 평산신씨가 대성으로 사는데 그 문중에서 제일 푸대접을 받았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한씨 부인과 오갑산(韓氏 夫人과 梧甲山)>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에 있는 오갑산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조선 중기 병자호란 당시 감곡면 왕장리 왕대에 한씨 성을 가진 젊은 부부가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부부는 효성이 지극한데다 주변의 불쌍한 사람들을 측은하게 여기어 항상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었다. 거기다 한씨 부인의 용모가 빼어나 근동에서는 이 부부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났는데, 감곡면까지 들이닥친 청나라 군사들은 진귀한 물품을 약탈하거나 여인들을 강탈하기에 바빴다. 특히 청나라 장군 빠오쟈[色五甲]는 근동에서 예쁘다고 소문난 한씨 부인을 찾기 위해 부하 두 명을 데리고 왕대 한씨 집을 찾아나섰다. 그런데 빠오쟈가 왕대에 나타나기 전에 한씨 부인 앞에 젊은 처녀가 나타나, “지금 부인의 신변이 위태로우니 어서 들것을 만들어 모친을 모시고 나를 따르시오.” 하며 자신을 따를 것을 권하였다.


한씨 부인은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아서, 병중의 노모를 들것에 태우고 처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들것이 하나도 무겁지 않을 뿐만 아니라, 캄캄한 밤인데도 처녀의 몸에서 빛이 나와 앞이 조금도 어둡지 않았다. 한씨 부인 일행이 첩첩산중으로 들어갈 무렵 빠오쟈가 한씨 집을 덮쳤다. 빠오쟈는 허탕을 치자 수소문하여, 한씨 부부가 깊은 산중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에 서둘러 뒤를 쫓다가, 험준한 고개를 넘어가고 있는 처녀의 불빛을 발견하였다.


숨을 헐떡이며 고개마루에 올라선 빠오쟈는 쉬고 있던 한씨 집안사람들을 보고 칼을 빼들었다. 한씨 집안사람들은 뒤쫓아 올라온 오랑캐들을 보고, 이제는 별수없이 죽게 되었구나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처녀가 산봉우리를 향해 들고 있던 파초선을 흔들자, 캄캄한 하늘 어디에선가 갑자가 날카로운 시위 소리가 들리더니 화살이 날아와 빠오쟈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가슴에 화살을 맞고 죽어 나자빠져 있던 빠오쟈의 시체는 날이 밝아서야 발견되었다. 그후 청나라 장군 빠오쟈, 곧 색오갑이 죽었다고 하여 이곳 고개 이름을 ‘오갑고개’라고 부르고, 그 시체가 묻힌 산을 ‘오갑산’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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