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음성군의 문화재


♣ 국가지정문화재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239-1번지의 음성 김주태(金周泰) 가옥은 1984년 1월 10일 국가중요민속자료 제141호로 지정된 전통 가옥이다. 300여 년 전에 이익이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며 충주목사를 지낸 참판 박규희 가문이 오랜 동안 거주하였다 하여 박참판댁으로도 불리고 있다.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585-3번지의 음성 공산정 고가는 건축 연대가 19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며, 1984년 1월 10일 국가중요민속자료 제143호로 지정되었다.


♣ 충청북도 지정문화재

1. 유형문화재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817번지 음성 오층모전석탑(陰城五層模塼石塔)은 고려시대의 탑으로 1975년 8월 20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되었다.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156번지 음성향교(陰城鄕校)는 1560년(명종 15) 3월 10일 창건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그 뒤 1647년(인조 25)에 이건하여 중수를 거듭하였다. 1981년 12월 26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되었다.


고려시대의 석탑인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817번지 설성공원 내의 음성 읍내리 삼층석탑(陰城 邑內里 三層石塔)은 1984년 1월 10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되었다.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산 74번지에 있는 고려시대의 음성 미타사 마애여래입상(陰城 彌陀寺 磨崖如來立像)은 1982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되었다.


음성군 감곡면 오궁리 209번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문신 「신후재 영정(申厚載 影幀)」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4호로 1986년 4월 28일 지정되었다. 감곡성당(甘谷聖堂)은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 357번지에 있으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8호이고 1930년대 성당이다. 조선시대의 권근 및 경주이씨 묘표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7호로 2001년 3월 30일 지정되었고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388번지에 있다.


2002년 12월 6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8호로 지정된 『남충장공시고(南忠壯公詩稿)』 판목은 조선 후기 남연년(南延年)의 시문집 판목으로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462번지에 있다. 2002년 12월 6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19호로 지정된 1910년대의 음성 감곡성당 소장 유물(예수성심기·성모성심기)은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 357번지에 있다.


2. 기념물

충청북도 기념물 제32호로 1980년 1월 9일 지정된 조선시대의 양촌 권근 삼대묘소 및 신도비(陽村 權近 三代墓所 및 神道碑)는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산 7번지(능안로 377-15]) 있다. 조선시대의 경녕군 부인 김씨 묘소(敬寧君 夫人 金氏 墓所)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99호로 1994년 12월 30일 지정되었고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산 15번지에 있다. 1999년 12월 31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111호로 지정된 조선시대에 축조된 수정산성(水精山城)은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산14번지에 있다.


2003년 4월 11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128호로 지정된 음성 망이산성(望夷山城)은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축조되었으며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 산 30번지에 있다. 음성 팔성리 고가(陰城 八聖里 古家)는 1930년대에 지은 건물로 1985년 12월 28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었고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 129번지에 있다.


3. 문화재자료와 민속자료

조선시대의 태교사는 1987년 3월 31일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고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 1284번지에 있다. 운곡서원(雲谷書院)은 선조 때에 세웠고 1990년 12월 14일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1호로 지정되었다. 2002년 3월 15일 충청북도 민속자료 제12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마송리 석장승은 음성군 원남면 마송리 1157번지에 있다.


♣ 음성군 향토문화 유적

1740년에 창건, 1906년에 재건한 지천서원(知川書院)은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 167번지[팔성길 90-16]에 있으며 2001년 12월 7일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제1호로 지정되었다. 충룡사(忠龍祠)는 1964년 음성군 음성읍 용산리 14번지에 건립되었으며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제2호로 지정되었고,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제3호는 고려시대 본성리 미륵불(本城里 彌勒佛)로 음성군 맹동면 본성리 417번지에 있다.


조선시대의 양덕리 동리(良德里 洞里) 장승은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 610번지에 있으며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제4호로 지정되었다.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제5호는 선사시대의 오향리 선돌(梧杏里 立石)로 음성군 감곡면 오향리에 있다. 선사시대의 양덕리 동리 고인돌은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 27번지에 있으며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제6호로 지정되었다.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제7호는 음성군 음성읍 용산리 가섭사에 있는 가섭사 석가여래좌상(迦葉寺 釋迦如來坐像)이고,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제8호로 지정된 고려 중기의 후미리 석탑(厚美里 石塔)은 음성군 소이면 후미리 1064번지에 있다.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제9호는 1934년 창건하고 1997년 중건한 경호정(景湖亭)으로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다.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제10호는 음성군 맹동면 통동리에 있는 1883년대의 김순 효자문(金(石+舜) 孝子門)이다.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제11호는 1924년 건립한 김창식 효자문(金昌植 孝子門)으로 음성군 원남면 주봉리에 있다.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제12호는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박순사당(朴淳祠堂)이다.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제13호는 음성군 원남면 갑산리에 1921년 건립한 권길 충신각(權吉 忠臣閣)과 1592년의 권길 묘소(權吉 墓所)이다.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제14호는 1905년에 세운 음성군 생극면 차평리의 이구령 충신문(李龜齡 忠臣門)이다.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제15호는 1825년에 세운 칠원윤문 효열각(漆原尹門 孝烈閣)으로 음성군 감곡면 문촌리에 있다.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제16호는 1908년에 세운 옥산사(玉山祠)이다.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제17호는 1901년에 재건한 권제 부조묘(權踶 不祧墓)이며,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제18호는 조선시대의 남충장공 충신문(南忠壯公 忠臣門)으로 음성군 원남면 상노리에 있다.


 

♣ 향토문화재

1. 불교문화재

불교문화재로는 음성군 음성읍 평곡리에 고려시대의 평곡리 석조보살입상(平谷里 石造菩薩立像)·평곡리 석조여래좌상(平谷里石造如來坐像)이 있고, 음성읍 감우리 승주골에 성주사지 부도(聖住寺址 浮屠), 금왕읍 보현암에 금왕 탑골 사지 석조약사여래좌상(金旺 塔골 寺址 石造藥師如來坐像)·금왕 탑골 사지 석조약사여래의상(金旺 塔골 寺址 石造藥師如來倚像)이 있다.


음성군 원남면에는 보룡리 석조여래좌상(普龍里 石造如來坐像)이, 맹동면에는 쌍정리 삼층석탑(雙呈里 三層石塔)이, 소이면 미타사에는 미타사 석조여래좌상(彌陀寺 石造如來坐像)이, 비산리에는 대경사 삼층석탑(大京寺 三層石塔)이, 삼성면 용성리에는 백운사지 부도(白雲寺址 浮屠)가 있다.


2. 유교문화재

유교문화재로는 음성군 음성읍 삼생리에 장충범 충신문(張忠範 忠臣門)·장석영 효자문(張錫永 孝子門)·장택한 처 장수황씨 열녀문(張宅漢 妻 長水黃氏 烈女門)·장동엽 처 청주이씨 열녀문(張東曄 妻 淸州李氏 烈女門)이 있고, 평곡리에는 이경립 처 순흥안씨 열녀문(李敬立 妻 順興安氏 烈女門) 등이 있다.


금왕읍에는 도청리에 도장사(道莊祠)·도원사(道源祠) 상모각(常慕閣)이, 사창리에는 경모재(景慕齋)가, 유촌리에는 충정사(忠靖祠)[조인옥 부조묘]·조유안 효자문(趙維顔 孝子門)이, 신평리에는 민동량 효자각(閔東亮 孝子閣), 민휘계·민정현 효자각(閔徽繼閔鼎顯 孝子閣)이, 행제리에는 이광하 효자각(李光夏 孝子閣)이 있다.


소이면에는 충도리에 영모사(永慕祠)·조용하 효자문(趙用夏 孝子門)·조용하 처 평택임씨 열녀문(趙用夏 妻 平澤林氏 烈女門)이, 대장리에는 신유 효자문(申維 孝子門)이, 후미리에는 이식후·이진도 쌍효자각(李植垕·李鎭道 雙孝子閣) 등이 있다.


원남면에는 하노리에 희암재(希庵齋)가, 마송리에는 숭덕사(崇德祠)·고용진 효자문(高庸鎭 孝子門)이, 문암리에는 곡산연문 효열각(谷山延門 孝烈閣)이, 상당리에는 충효정(忠孝亭)이 있으며, 맹동면에는 쌍정리에 육선재(陸仙齋)가, 두성리에는 송광도 효자문(宋匡度 孝子門)이 있다. 대소면에는 성본리에 쌍충재(雙忠齋)·숭모재(崇慕齋)가 있고, 삼성면 양덕리에는 정운영 효자각(鄭運永 孝子閣)이, 용성리에는 권국화 효자문(權國華 孝子門)이 있다.


생극면에는 방축리에 도통사(道統祠)·문충공 부조묘(文忠公 不祧廟)·안숙공 부조묘(安肅公 不祧廟)·안양공 부조묘(安襄公 不祧廟)·민해준 효자각(閔海俊 孝子閣)이, 차평리에는 김선경 처 성주이씨 열녀문(金善慶 妻 星州李氏 烈女門)이 있고, 감곡면 상평리에는 정국량 효자각(鄭國樑 孝子閣)이, 오궁리에는 백련서재(白蓮書齋)가 있다.


3. 선돌·비

음성군 생극면 생리에 시대 미상인 생극 생리 선돌조형 신도비(趙珩 神道碑)가 있으며, 원남면 삼용리에는 장충범 신도비(張忠範 神道碑)가, 금왕읍 유촌리에는 1707년에 세운 민발 신도비(閔發 神道碑)가 있다. 감곡면 상우리에는 신후재 신도비(申厚載 新道碑)가, 대소면 성본리에는 어재연·어재순 신도비(魚在淵·魚在淳 神道碑)가, 맹동면 쌍정리에는 이지걸 묘비(李志傑 墓碑)가, 삼성면 용성리에는 백운사 사적비(白雲寺 事蹟碑)가, 소이면 비산리에는 음애동탁영선탑각자(陰崖洞濯纓仙榻刻子)가 있다.


<김주태 가옥>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전통가옥. 


 

♣ 개설

음성 김주태 가옥은 조선 중기 무신으로 유명한 이완 대장의 생가라는 설도 있고, 3백여 년 전 이익이 세웠다고도 전해지나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없어 확인할 방법은 없다. 사랑채의 상량문에 적힌 '대한광무오년신축이월초칠일신시상량(大韓光武五年辛丑二月初七日申時上樑)'이라는 문구로 보아 1901년(고종 5)에 신축된 건물로 볼 수 있으나, 안채에 남아 있는 가구의 기법으로 보아 안채는 건축 연대가 조금 더 올라가는 19세기 중엽의 건물로 추정된다. 충주목사를 역임한 참판 박규희 가문이 오랫동안 거주하여 박참판 댁으로도 불린다.


♣ 위치

장호원에서 음성 쪽으로 가는 국도 3㎞ 지점에서 좌측으로 마을길을 따라 2㎞ 정도 들어가면 낮은 언덕 밑으로 전통가옥 한 채가 위치하고 있는데 이 가옥이 바로 음성 김주태 가옥이다.


♣ 변천

음성 김주태 가옥의 초기 모습은 19세기 중엽에 T자 형태의 안채만으로 이루어진 가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후 1901년(고종 5) 앞쪽 담장과 함께 사랑채가 지어져 지금의 모습인 ‘工’의 형태로 완성되었다. 음성 김주태 가옥은 1984년 1월 10일 전통가옥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중요민속자료 제141호로 지정된 이래 3회에 걸쳐 보수가 이루어졌다. 1989년 안채와 사랑채, 일각문 보수를 시작으로 1992년 사랑채 보수와 근래에 축조된 광채 보수, 1995년 자연석 화방벽과 자연석기단 설치 등의 보수를 걸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 형태

음성 김주태 가옥은 전체가 남향으로 정지하고 있으며, 바깥마당에 2단의 자연석 석축을 쌓아 사랑채를 올리고 그 뒤로 담장을 축조하여 안채와 분리된 형태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사랑채 담장 뒤쪽으로 T자 형태의 안채가 위치하여, 사랑채와 함께 보면 工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안채의 서쪽이 앞마당이 되고 동쪽이 뒷마당이 되는데, 안채의 뒤편으로 길게 뻗은 뒤꼍이 다시 마련되어 있으며, 안채의 안마당 서쪽에는 담장에 붙여서 헛간채를 배치시키고 있다.


집안 출입은 사랑채 서쪽의 대문을 통하여 안마당 앞의 담장에 설치된 일각문으로 통행하도록 지어졌으며, 안채의 뒷마당은 부엌을 통하여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채 뒤편과 안채 앞담장 사이에 형성된 공간은 조그만 사이마당으로 여유가 있으며, 사랑채 동쪽 끝에서 담장으로 구획하는 대신 내문을 설치하였다.


안채의 평면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평면을 먼저 축조한 후 중앙 부분에 정면 4칸, 측면 1칸을 덧붙여서 전체적으로 T자 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정면의 7칸 중 중앙의 1칸과 전면으로 뻗은 부분은 모두 온돌방으로 꾸며 안방과 윗방으로 사용하고, 좌측면 3칸에는 2칸의 대청과 1칸의 건넌방을, 우측면 3칸에는 1칸의 대청과 2칸의 온돌방을 각각 놓아 별당채로서의 기능을 갖도록 하였다.


사랑채의 평면은 전면 6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을 가진 전형적인 고건축 양식을 보이고 있다. 전면 좌측 1칸은 측면에서 출입할 수 있도록 대문을 둔 대문칸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두 번째 칸은 전체 1칸 반을 반으로 나누어서 전면 쪽으로는 조그만 방으로 사용하고, 후면 쪽으로는 하부에 아궁이를 둔 부엌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 상부는 온돌방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다락으로 사용한다. 세 번째·네 번째 칸은 온돌방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다섯 번째 칸은 우물마루를 둔 대청으로 사용하며, 나머지 여섯 번째 칸은 대청보다 턱이 높은 온돌방(사랑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세 번째 칸부터 여섯 번째 칸까지는 전면에 반 칸 정도의 우물마루로 짠 툇마루를 두었다.


♣ 현황

현재 음성 김주태 가옥에는 실거주자가 없는 상태로, 음성군과 연계하여 관리만 이루어지고 있다. 사랑채를 정면에서 보았을 경우 우측으로 국문 및 영문, 일문 표기의 음성 김주태 가옥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 의의와 평가

음성 김주태 가옥의 T자 형 안채는 경기 지방의 사대부 집안에서나 가끔 볼 수 있는 형태로, 이러한 구조의 가옥이 음성 지역에 세워졌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할 수 있다. 또다른 특이점을 들자면, 2단으로 쌓은 높은 축대 위에 사랑채가 가리는 시설 없이 당당하게 축조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지체가 높은 사대부집이긴 하지만 건축연대가 떨어지는 집에서 볼 수 있는 건축양식으로, 조선시대 전통가옥 양식의 변천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공산정 고가>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전통 가옥.


 

♣ 개설

국가중요민속자료 제143호로 지정된 음성 공산정 고가는 문화재 지정 당시 명칭이 ‘음성 서정우 가옥’이었으나 마을 이름인 공산정을 반영하여 2007년 1월 29일부로 현 명칭인 음성 공산정 고가로 명칭이 바뀌었다.


건축 연대는 19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나, 안채 상량문에 '단군기원후사이오칠갑자년칠월(檀君紀元後四二五七年甲子年七月)'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924년에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 위치

현재 음성 공산정 고가는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공산정에 있으며, 마을 뒤쪽 낮은 야산을 등지고 비스듬히 경사진 땅에 자리 잡고 있다.


♣ 변천

초기 이 가옥은 ‘ㄱ’자 형태의 안채로만 축조되었다가, 1924년 안채 중수 당시 사랑채가 추가로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축조된 사랑채 역시 ‘一’자 형태로만 축조되었다가 후에 오른쪽으로 정면 4칸, 측면 1칸의 행랑채를 덧대어 현재의 모습인 ‘口’자 형태가 되었다. 1987년, 1996년 두 차례에 걸쳐 보수를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 형태

음성 공산정 고가의 전체적 배치는 야산 경사에 따라 남향으로 정지한 후, 외부로 개방된 바깥 마당과 접하여 자연석으로 2단의 기단상을 쌓고, 그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一’자형 사랑채가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 오른쪽으로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행랑채를 덧대어 ‘ㄱ’자 형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 안채로 출입할 수 있는 중문을 달았다.


중문에 들어서면 넓은 안마당이 있고, 안마당과 접하여 ‘ㄱ’자형 안채가 배치되어 있어 전체적인 배치는 튼 ‘口’자형을 이루고 있다. 또 최근에 사랑채 왼쪽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헛간채를 축조하였는데, 이곳에도 안채와 통행할 수 있도록 중문을 설치하였다. 안채의 평면은 정면 4칸 중 2칸을 통간(通間)으로 하여 대청을 넓게 꾸몄으며,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 ‘ㄱ’자형으로 꺾이는 부분에 2칸의 안방과 1칸의 웃방이 있다.


또 대청 오른쪽 전퇴(前退)가 달린 건넌방에 오른쪽으로 반 칸을 더 내밀어 상부는 다락으로, 하부는 온돌 아궁이의 함실로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안방 앞면에 1칸 반, 측면 2칸의 부엌이 있고, 서쪽에 툇마루가 있다. 건축 구조는 2단의 기단석 위에 덤벙 주초석을 놓았고, 그 상부에 방형주를 세웠다. 기둥 상부는 납도리집 형태를 하고 있고, 홑처마의 팔작기와지붕을 이루고 있다.


♣ 현황

‘음성 서정우 가옥’에서 음성 공산정 고가로 명칭이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문헌이나 안내문 등에 옛 명칭으로 표기된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전에 강원도 횡성군수를 역임한 이필영이 거주하였고, 서정우 부친이 집을 매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가옥의 사랑채 오른쪽으로 국문과 영문 표기의 음성 공산정 고가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 의의와 평가

음성 공산정 고가의 배치 구조는 주로 중부의 서해안 지방에서 나타나는 구조로, 이러한 구조의 가옥이 음성 지방에도 존재한다는 점에서 높은 학술적 가치를 지녔다. 일반 고주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납도리집의 형태를 보이는 등 전체적으로 소박한 모습의 민가 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다.


<오층모전석탑>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통일신라 또는 고려 전기의 모전석탑.


 

♣ 위치

음성 오층모전석탑은 원래 읍성읍 읍내리 교동 음성향교 앞 도로 건너편에 있었던 폐사지에 있었다. 그러다가 1946년에 수봉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졌다. 그 후 1995년 현재의 위치인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향토자료전시관 서쪽 광장에 자리 잡게 되었다.


♣ 형태

단층으로 되어 있는 기단은 2매석으로, 사각형의 지대를 결구(結構)하고 윗면에 사분원(四分圓)의 몰딩과 각형의 낮은 받침으로 기단 면석을 받고 있다. 기단 면석(基壇面石)은 한 개의 돌로 되어 있으며, 각 면에 양우주(兩隅柱)가 도드라지게 조각되었고, 갑석에는 부연(副椽)이 정연하며 윗면에 1단의 각형 받침을 마련하여 탑신을 받치고 있다.


옥신(屋身)에는 각 면의 중앙에 장방형의 감실(龕室)이 음각되었는데, 감실 주변에 장치나 조각이 없고, 좌우측에 우주(隅柱)가 표현되지 않았으며, 옥신의 각 면에도 우주(隅柱)를 모각하지 않았다. 또 1층 옥신석에는 석탑을 해체, 복원하였을 때 직경 9㎝, 깊이 10㎝의 사리공(舍利孔)이 있었다. 각층의 옥개석은 모두 낙수면이 층단을 이루어 전탑(塼塔)을 모방하였음을 보여준다.


초층 옥개석은 2매석으로서, 층급 받침이 3단으로 각출된 1매석 위에 다른 1매석을 얹어놓았으며, 낙수면의 층단은 3단이다. 2층 이상의 옥개석은 모두 1매석으로 되어 있고, 2, 3층 옥개석의 층급 받침은 3단이며 낙수면의 층단도 3단씩이다. 4층 옥개석의 층급 받침과 낙수면 층단이 2단이며, 5층 옥개석은 층급 받침이 2단이고 낙수면은 층단이 없이 일반형 석탑의 옥개석처럼 경사를 이루었다.


석탑의 실측치는 총 높이 372㎝이고, 기단 면석은 높이 71.5㎝, 너비 101.5㎝이며, 기단 갑석은 높이 13.5㎝, 너비 117.5㎝이다. 1층 옥신은 높이 59㎝, 너비 67㎝, 감실 높이 26㎝, 너비 18㎝, 깊이 3㎝이다. 3층 옥신은 높이 12㎝, 너비 55.5㎝이고, 4층 옥신은 높이 10.5㎝, 너비 47㎝이다.


1층 옥개는 높이 45㎝, 너비 120㎝이고, 2층 옥개는 높이 41.5㎝, 너비 100㎝이며, 3층 옥개 높이는 36㎝, 너비 80㎝이다. 4층 옥개 높이는 30㎝, 너비 70㎝이고, 5층 옥개 높이는 24㎝, 너비 59㎝이며, 찰주원공은 지름 6㎝, 깊이 9㎝이다.


♣ 현황

단층 기단(單層基壇) 위에 오층의 탑신부(塔身部)가 있는 전탑 형태의 석탑으로, 현재 2층과 5층의 옥신석(屋身石)이 결실되었고, 상륜부(相輪部)는 모두 결실되어 있다. 각 옥개석의 전각부(轉角部)에는 풍경(風磬)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있는데, 그중에 4층 옥개석에는 철편까지 남아 있다.


♣ 의의와 평가

음성 오층모전석탑은 전탑 형태(검은 회색, 또는 회색 벽돌로 쌓은 탑)를 석탑으로 나타낸 것으로, 전탑이나 모전석탑은 특히 안동, 의성, 영양 등지를 중심으로 유행했다. 음성오층모전석탑은 이러한 지역적 특성에 영향을 받아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어 현재 석탑 변천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음성향교(陰城鄕校)>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조선시대 지방 국립 교육 기관.

 

 

♣ 개설

조선시대 음성 지역의 지방교육을 담당했던 음성향교는 1560년(명종 14) 지금의 음성읍 석인리에 처음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1647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대성전 정위에는 공자(孔子)를 모시고, 양편에는 4성(四聖), 곧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를 배향하고, 동벽과 서벽에는 주돈이(周敦頤)를 비롯한 송조 명현과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을 봉안하고 있다. 1981년 충청북도지방유형문화재 제104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 변천

음성향교의 공식적인 창건 연대는 1560년이나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현(縣)의 동쪽 1리(里)에 향교가 있고, 문묘(文廟)는 향교에 있다.”는 기록이 보이기도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타 1647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왔다. 그후 1651년(효종 2)에 명륜당을 중수하고, 1810년(순조 10)과 1856년(철종 7), 1887년(고종 24)에 중수하였다. 또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다시 중수하고, 1979년에는 내삼문과 명륜당을 보수하고 막돌담장을 신설하였다.


♣ 형태

명륜당을 앞쪽에, 대성전을 뒤쪽에 배치한 전당후묘(前堂後廟) 형식으로, 홍살문을 들어서면 외삼문을 거쳐 명륜당-내삼문-대성전 등이 능선의 기울기에 맞게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다. 향교와 문묘를 구분하여 볼 때, 앞에 향교인 명륜당과 뒤쪽의 동재·서재, 문묘인 대성전으로 나누어진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며, 동재와 서재는 각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형식이다. 중앙의 내삼문을 들어서면 대성전이 나오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이다. 이밖에 건물 앞쪽에 홍살문과 하마비가 있다. 동재·서재가 다른 곳과는 달리 명륜당의 뒤쪽에 있는 것이 특이한데, 이것은 도로공사로 인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 현황

음성향교는 현재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하고, 성현들에 대한 제향의 기능만을 담당하여 매년 봄·가을에 석전제를 지내고 있다.


<음성 읍내리 삼층석탑>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삼층석탑.


♣ 건립경위

음성 읍내리 삼층석탑은 평곡리에 있었던 사찰의 사리탑으로 건탑되어 계속 절터를 지켜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1934년 연풍정(지금의 경호정)을 지으면서 현재의 위치인 설성공원 내로 옮겨진 것이라 한다.


♣ 형태

단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갖춘 일반형 석탑으로, 상륜부(相輪部)가 결실되었을 뿐 보존 상태가 양호한 석탑이다. 기단부는 단층 기단으로서, 1매로 된 지대석에 1단의 받침을 각출하고, 그 위에 양 우주를 표현한 면석을 놓았다. 또 그 위에 1매의 갑석을 놓았다.


각층의 탑신에는 우주가 표현되었으며 옥개석의 층급 받침은 각 3단씩이다.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하고 전각의 반전도 경쾌하다. 3층 옥개석 상면 중앙에 찰주공(刹柱孔)이 있으며, 현재 남아 있는 탑의 전체 높이는 240㎝이다.


♣ 의의와 평가

음성 읍내리 삼층석탑은 기단부가 단층으로 약식화되어 있고, 탑신 괴임의 양식, 우동의 경사, 전각의 반전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미타사 마애여래입상>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미타사에 있는 고려 후기의 마애불.


 

♣ 형태

불상의 머리 부분과 어깨 부분만 양각으로 처리하였고, 양손과 허리, 하반신 부분은 음각선으로 처리해 불상의 윤곽만을 나타냈다. 머리에는 두건형의 관모를 썼으며 상호는 원만자비상으로 비만한 편이다. 양 눈썹에서 코까지 연결되는 선은 뚜렷하나 두 눈과 입은 선명하지 않고, 양쪽 귀는 크고 뭉툭하다. 목은 매우 짧고 삼도의 흔적이 없다. 어깨는 당당한데, 거의 수평을 이루어 사실감이 없다.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어깨 부분의 조각이 뚜렷하지 않으나 양팔에서 늘어뜨린 옷주름이 V자형을 이루었고, 복부 아래는 6조 평행의 사선으로 표현하였으며, 허리 아래 부분에는 하향하는 직선 무늬가 희미하게 있다.


수인(手印)은 마멸되어 뚜렷하지 않으나 오른손은 가슴 앞에서 엄지와 중지를 펴고 내장(內藏)하였고, 왼손은 가슴 앞에서 엄지와 넷째, 다섯째 손가락을 펴서 내장한 것으로 보아 아미타불의 구품인(九品印) 가운데 한 형식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체 부분은 좌우측의 윤곽선만 나타내었고 발은 현재 지하에 매몰되어 있어 형태를 확인할 수 없다.


♣ 특징

전체 높이는 405㎝이며, 민머리 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높은 머리 묶음, 부피 있는 네모난 얼굴 등이 특징적이다. 또한 평판적인 신체, 직선적인 윤곽, 얇게 빚은 듯한 계단식 옷주름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의 불상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후재 영정>

충청북도 음성군의 평산신씨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신후재의 초상화.


♣ 개설

신후재(申厚載)[1636~1699]는 1660년(현종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강원도관찰사 등을 지냈으나, 1694년에 일어난 갑술옥사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한 후에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 형태 및 구성

정장 관복을 입고 의자에 앉은 전신상으로 의관이나 단령의 관복 등 복식은 조선 숙종 연간의 제식을 따랐다. 그러나 초상화의 상용 형식을 보면, 동시대의 다른 초상화의 경우 공수자세를 취하는 데 반해 양손에 홀을 받들어 쥐고 손을 노출시켰으며 긴 손톱을 표현하였다.


단령 위에는 각대를 나타내지 않았고 의좌와 족좌대가 겹쳐져 있는 등 불합리한 형태로 표현하였다. 바닥에는 양탄자나 화문석을 깔지 않았으며, 의자가 인물에 비하여 큰 편이다. 호피의 표현은 거친 편이나 초상화의 안면 세부묘사는 뛰어나다.


♣ 의의와 평가

후손가에 전해 오는 이야기대로 신후재가 청나라에 사은사로 갔다가 돌아올 때 가지고 온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으로 조선 후기의 초상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감곡성당(甘谷聖堂)>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 357-2에 있는 충북 도내에서는 최초로 건립된 성당.


 

♣ 개설

감곡성당(甘谷聖堂) 또는 감곡천주교회는 1896년 프랑스인 임가밀로 신부가 건립한 가톨릭 성당이다. 전국에서 18번째로 세워진 성당이며 충북 도내에서는 최초로 건립된 성당으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8호(1996년 1월 5일 지정)로 지정되어 있다.

 

임가밀로 신부는 1914년 최초로 성체거동행사를 개최하였고 문맹퇴치를 위하여 학교를 설립하여 일본 식민지하에서 억압받는 청년과 아이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고 한글을 가르쳐 민족의 뿌리가 마르지 않게 하였다.


♣ 변천

원래 이곳은 명성황후의 육촌 오빠인 민응식의 집이었고, 1882년 임오군란때 명성황후가 피신왔던 곳이기도 하다. 180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민응식이 서울로 압송되면서 의병들이 사용하게 되자 일본군들이 불태워 버렸다고 있다.


임가밀로 신부는 1896년 5월 모든 집터와 산을 매입하고, 같은해 10월 7일 성당을 건립했다.


1930년 지금의 고딕식 성당을 건립하고 1934년 지금의 화강석으로 된 사제관을 2층으로 지었다.

 

한국 전쟁 당시 북한군이 성당을 침입하여 감곡성당에 모셔진 성모상에 총을 7발 쐈다. 그런데도 성모상은 깨지지 않았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때 성모상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형태 및 구성

설계는 프랑스 신부 시잘레가 하였고, 중국인이 공사를 맡았으며 명동성당의 축소판과 같다. 안쪽 천장은 원형의 돔으로 꾸몄다.


성당 옆에는 1930년에 지어진 매괴박물관이 있다. 충북 최초의 석조물인 매괴박물관은 희색빛을 띠기 때문에 화려하지는 않지만 자연스러운 멋을 내고 있다.


♣ 의의와 평가

임가밀로 신부는 일본 통치 하에서 억압받고 있는 청년과 아이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쳐 민족 의식을 심어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음성 감곡성당의 건물은 물론 유물들은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권근 및 경주이씨 묘표>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 권근과 그의 부인 경주이씨의 묘표.


 

♣ 개설

매장 시에는 봉분을 만들고 봉분 앞에 묘표석과 혼유석, 상석, 향로석을 배치하고 장명등, 촛대석, 문인석 등의 석물을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부부 합장묘의 경우 묘표석을 하나 세워 그 안에 글자를 새기는 것이 일반적이나 좌우에 따로 묘표석을 세우는 경우도 있다.


♣ 건립경위

양촌 권근의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시흥동에서 1444년(세종 26) 3월 묘지만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로 이장하였다. 성남에 있는 원래의 묘표석은 500여 년이 지난 1965년에 권근의 묘소 왼쪽 언덕에 있는 문충공사우(文忠公祠宇)로 옮겨 놓았고, 방축리 양촌 권근 부부의 묘소 앞에는 1444년 이장 시 새로 만든 묘표석이 각각 위치하고 있다.


♣ 위치

양촌 권근 및 경주이씨 묘표는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산 7번지(능안로 377-15) 능안 삼대묘의 가장 상단에 위치한다.


♣ 형태

묘소 오른쪽에는 양촌 권근의 묘표가 있고 왼쪽에는 경주이씨의 묘표가 놓여 있다. 권근의 묘표는 팔각기둥의 형태에 지붕돌을 갖추고 있으며, 8면 중 4면에 비문을 새겼다. 전체 높이 91㎝이며, 지붕돌은 없어진 채 묘표만 보존되었는데 최근에 받침돌과 지붕돌을 만들어 얹었다. 영의정 하륜(河崙)이 비문을 썼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묘 앞에 세우는 묘비를 겸한 묘표일 것으로 추측된다.


화강암 1매석으로 만들었는데 대석은 땅에 묻힌 부분을 제외하고 높이 10㎝, 가로 70㎝, 세로 40㎝ 크기이며 아무 문양이 없다. 비신은 높이 103㎝, 폭 55㎝, 두께 23㎝이며 전·후면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높이 45㎝, 폭 65㎝, 두께 30㎝ 크기이다. 지붕돌의 전·후면 하단에는 연화문을 부조하고 양옆은 2단으로 연꽃잎을 말아 올린 형상이고 밋밋한 지붕에 14㎝ 높이의 보주를 놓았다.


부인 경주이씨의 묘표는 1444년 묘소 이장 때 별도로 보관하다가 1999년 4월에 현 위치인 권근의 사당에 세웠다. 재질은 화강암이며, 윗부분 양쪽 귀가 잘린 형태이고 크기는 높이 92㎝, 너비 48㎝, 두께 13㎝이다.


♣ 금석문

양촌 권근의 묘표의 글씨는 가로·세로 8㎝ 크기의 해서체로, 전면에 2줄로 24자, 후면에 1줄로 13자가 종서로 음각되어 있다. 전면에는 '조선국좌명공신의정부찬성사시문충공양촌권선생지묘(朝鮮國佐命功臣議政府贊成 事諡文忠公陽村權先生之墓)', 후면에는 '유명정통구년갑자삼월초십일(有明正統九年甲子三月初十日)'이라고 새겨져 있다.


부인 경주이씨의 묘표의 글씨는 가로·세로 10㎝ 크기의 해서체로, 전면에 2줄 10자, 후면에 1줄 13자가 종서로 음각되어 있다. 전면에는 '양촌선생권문충공부인 숙경택주경주이씨지묘(陽村先生權文忠公夫人 淑敬宅主慶州李氏之墓)', 후면에는 '유명정통구년갑자삼월초십일(有明正統九年甲子三月初十日)'이라고 새겨져 있다.


♣ 의의와 평가

성남의 원래 묘소에서 가져온 권근 부부의 묘지석과 더불어 조선시대 초기 묘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남충장공시고』 목판>

충청북도 음성군 의령남씨 양정공파 대종회가 소장하고 있는 조선 후기 무신 남연년의 유고 시집의 목각 판각본.


 

♣ 개설

남연년의 자는 수백(壽伯)이고, 본관은 의령이며, 이인좌 반란 때 청주영을 지키다가 청주성의 함락으로 순직하였다. 남연년은 사후에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1729년(영조 5)에는 숭선군에 추존되어 청주 표충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장으로, 충신 정려가 내려졌다.


남충장공의 유고 시집은 남연년이 저작한 많은 시편들을 순절한 뒤 후손들이 필사하여 『충장공시고(忠壯公詩稿)』 4책본으로 편집하였다. 그 뒤에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문신 홍계희(洪啓禧)가 왕명으로 100수의 시편을 선정하여 『남충장공시고(南忠壯公詩稿)』 1책본으로 편집하였다. 1748년(영조 24)에 만들어진 『남충장공시고』의 판목은 『남충장공시고』 1책본을 간행하기 위하여 판각하였던 것으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 형태

『남충장공시고』판목은 서(序) 1판, 원고 25판, 부록 18판, 발(跋) 4판, 표제 1판 등 도합 52판이 판각되어 있다. 판 하나의 크기는 47.0㎝×23.0㎝×1.0㎝ 내외이다. 판목의 재질은 배나무인 듯하다.


『남충장공시고』판목에 의해 만들어진 목판본 서적의 크기는 20.1㎝×31.3㎝이고, 광곽(匡郭)은 사주단변(四周單邊)이며, 반곽(半郭)의 크기는 15.0㎝×22.6㎝이다. 또한 각각 반엽(半葉)의 행수(行數)는 9행, 자수는 18자이며, 판심의 어미는 상하향이엽화문어미(上下向二葉花紋魚尾)이다.


♣ 의의와 평가

『남충장공시고』판목은 판각의 수준이 높고 판목의 보존 상태 역시 매우 양호한 편이나 몇 개의 판은 마구리(손잡이) 부분을 보수하고, 판목 전체를 증포(蒸怉)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의 결판도 없이 보존된 것은 전적으로 의령남씨 양정공파 대종회를 중심으로 한 후손들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남충장공시고』판목은 조선 후기의 목판 판각술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감곡성당 소장 유물(예수성심기·성모성심기)>

음성 감곡성당이 소장하고 있는 일제강점기의 유물.


 

♣ 개설

음성 감곡성당은 1896년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이었는데, 신부에 의하여 설립된 한국에서 18번째 성당으로 현재 6개의 공소를 가지고 있고 신자 수는 3,350명이며 수많은 신앙 단체가 지역 사회에 봉사하고 있다.


초대 본당 신부 임가밀로 신부는 1896년 문맹 퇴치를 위하여 매괴학교를 설립하여 현재의 매괴고등학교로 발전되었으며, 매괴신용조합을 설립하여 전국 굴지의 조합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임가밀로 신부는 폐렴으로 1947년 19월 25일 79세의 나이로 선종하여 평소 사랑했던 매산 중턱 길모퉁이에 안장되었으나 신자들의 뜻에 따라 1983년 10월 25일 성당 지하로 이장되었다.


♣ 형태

예수성심기와 성모성심기는 1924년 제1회 성체거동 행사 때와 매년 성모성심 축일인 8월 22일의 종교 행사 때 사용하고자 비단 천에 동양 자수를 놓아 초대 신부인 임가밀로 신부가 안젤라 수녀를 통해 게장한 것이다. 깃발은 106㎝×177㎝의 부조(浮彫)로 수를 놓아 매년 10월에 사용하고 있다.


♣ 특징

예수성심기와 성모성심기 외에 1914년 국내 첫 성체거동 때부터 사용되었던 성광과 금색 제의, 영대, 구두 등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제구와 서적, 심지어 은행 카드 놀이판, 카드 등의 각종 유물들이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다. 정약종 순교자가 지은 주교 요지 1906년판 등의 문서류, 본당 역사를 개괄할 각종 사진 500여 점은 100여 년간 신앙의 발자취를 그대로 담고 있다.


♣ 의의와 평가

임가밀로 신부는 일본 통치 하에서 억압받고 있는 청년과 아이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쳐 민족 의식을 심어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음성 감곡성당의 건물은 물론 유물들은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권근 삼대묘소 및 신도비>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에 있는 조선 전기 권근과 그의 아들 권제, 손자 권람의 3대 묘소 및 신도비(神道碑).


 

 

♣ 개설

조선시대의 묘소는 풍수지리에 의해 길한 땅을 택하여 만들어졌는데 왕릉처럼 병풍석(屛風石)을 두를 수는 없었다. 묘 앞에는 석상(石床)을 놓고 양쪽에 망주석을 세웠다. 석상 앞쪽으로는 장명등(長明燈)을 놓고 좌우에 석인(石人)들을 세웠다. 종2품 이상 고관의 묘에는 신도비를 세울 수 있었다.


♣ 위치

양촌 권근 삼대묘소는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산 7번지(능안로 377-15) 능안 안동권씨 문중 묘역에 위치하고, 신도비도 묘역 내 비각 안에 각각 위치한다.


♣ 변천

권근 삼대묘역은 지금의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시흥동에 있던 권근의 묘소를 1444년(세종 26)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로 천장하면서부터 1505년(연산군 11)까지 4대 7위의 묘소(부인 합장 포함 13위)를 정한 곳이다. 후에 현손 권헌(權憲)과 권유(權愈)의 묘를 천장하여 모두 9위, 합장과 쌍분을 포함한 17위의 묘소도 같은 장소에 있게 되었다.


♣ 형태

권근의 묘는 원형 봉분에 둘레돌로 봉축되었다. 2좌의 상석이 나란히 있고 묘갈 2기, 장명등 1기, 거대한 문인석 2기가 있다. 권제의 묘는 아버지 권근의 묘 아래에 있는데 양식은 권근의 묘와 같고 묘 앞에 상석 1좌, 비갈 1기, 장명등 1기, 문인석 2기가 있다. 권람의 묘는 권제의 묘 아래에 있으며 호석은 없고 상석 1좌, 묘갈 1기, 장명등 1기, 문인석 2기가 있다.


신도비는 묘역에서 남동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 각각 위치하는데 권근의 신도비는 백대리석으로 만든 비신에 높이 218㎝ 크기의 비로, 1991년 지은 비각 안에 보호되고 있다. 권제의 신도비는 북쪽 권근과 남쪽 권람 신도비 사이에 비각을 지어 안치하였는데, 화강암제 비신의 높이는 220㎝이다. 권람의 신도비는 권제 신도비각의 남쪽에 위치하는 데, 높은 대석 위에 백대리석으로 만든 비신을 세웠고 비신의 높이는 220㎝이다.


♣ 현황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의 안동권씨 문충공파의 묘역에는 양촌 권근을 비롯하여 선조 9위(합장과 쌍분의 17위)의 묘소가 집중되어 있다. 이 가운데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된 삼대묘소를 중심으로 묘소와 신도비, 재실, 연못 등이 배치되고 있다.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근방에 살며 잘 보호하고 있으나 최근에 묘소 앞에 있던 장명등이 훼손되는 등의 피해가 있었다.


♣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 사대부의 장례 풍습을 살필 수 있는 귀한 예로 주목되며 재실과 신도비, 묘소 내의 석물 하나하나가 문화재로서 손색이 없다. 이를 국가지정 문화재로 승격하여 보호해야 할 필요성과, 왕실과 관련된 신도비 외에 조선시대 처음으로 세워진 권근·권람의 신도비에 대한 국가 보물로의 지정도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


<경녕군 부인 김씨 묘소>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에 있는 조선 태종의 제1서자 경녕군의 부인 청풍김씨의 묘.


♣ 개설

경녕군(敬寧君)은 조선 태종과 효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태종의 장남이다. 경녕군 부인 청풍김씨는 1416년(태종 16)에 경녕군과 성혼하였으며, 1417년(태종 17)에 경신택주 안산군부인(敬愼宅主 安山君夫人)에 봉해졌다. 1450년(세종 32) 4월에 서거하여 현 위치에 안장되었다.


♣ 변천

경녕군 부인 김씨는 지금의 위치에 안장된 후, 1458년(세조 4) 9월에 삼한부부인(三韓府夫人)에 가봉되었고, 같은 해 12월에 석물을 세워 예장(禮葬)을 완성하였다. 1872년(고종 9)에는 청원부부인(淸原府夫人)으로 가봉되었다.


♣ 형태

경녕군 부인 김씨 묘소에는 묘비 1기가 세워져 있고, 그 앞에는 장명등 1기가 놓여 있다. 묘역은 약 660㎡이며, 사각형의 봉분에 호석을 두르고 있고, 화강암의 혼유석과 상석이 있다. 하단 좌우에는 문관석이 1조 세워져 있다.


♣ 금석문

묘비에는 ‘조선국 왕자경녕군 제간공처 첨절부인 김씨지묘(朝鮮國 王子敬寧君 齊簡公妻 僉節夫人 金氏之墓)’라 쓰여 있다.


♣ 의의와 평가

조선 왕족의 사각형 분묘 양식을 엿볼 수 있고, 전형적인 조선 전기 왕족의 묘제를 살필 수 있는 곳이라 충청북도 기념물 제99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정산성>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일원에 있는 고대 국방 시설.


 

♣ 개설

수정산성의 축조 시기와 연혁을 알려주는 고문헌 기록은 없으나 조선시대 문헌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여지도서(輿地圖書)』·『호서읍지(湖西邑誌)』·『대동지지(大東地志)』·『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등에 의하면 수정산이 '음성 읍내의 동쪽 3리 또는 5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들을 살펴보면 수정산성은 『호서승람(湖西勝覽)』을 제외하고 모두 고산성(古山城)이라고 되어 있으며, 둘레는 1,271척이고 높이는 1장이 넘으며 성 안에는 우물이 하나 있는데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고 하였다. 성 남쪽에 음성현의 옛 터가 있는데 관평(官坪)이라 불려진다고 하였다.


이밖에 고지도에서도 수정산성의 위치와 함께 산성이 표시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즉 『여지도서』 음성현 지도에는 수정산성(水精山城)이라 하였고, 『충청도읍지』의 음성현 지도에는 수정산 토성(水精山 土城), 『호서읍지』에는 수정산성(水晶山城)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1942년에 간행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음성읍의 동쪽 약 7백 간 수정산 봉우리에 있고 수정산성이라 칭함. 석축으로서 둘레 삼백오십 간, 높이 5척, 폭 3척, 완전함'이라 하였고, 1971년에 간행된 『전국유적목록』에는 '수정산성이라 칭함, 석축, 둘레 350간, 높이 5척, 폭 3척'이라 하였다. 1977년에 간행된 『문화유적총람』에는 '음성읍 동쪽 약 1.2㎞ 떨어진 수정산에 있는 성으로 고려시대에 토축하였던 것을 조선 숙종조에 석축하여 보강하고자 하였으나 동쪽 일부가 완성되지 못했다'고 전한다.


남매 축성 설화와 할애비성·할미성의 축성 설화가 있으며, 고려시대 장수인 박서(朴犀)가 음성백(陰城伯)으로 있을 때 축성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산성 안에는 수원이 부족하고 성의 내부 면적이 좁은 편이어서 장기간 머물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보이므로 방어용으로 축성했다기보다는 전략적인 거점 확보를 위하여 축성한 산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위치

수정산은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와 평곡리 및 한벌리에 걸쳐 있는 해발 363.3m의 산으로서 평곡리 일대에 치소를 두고 있었던 고려시대까지는 음성현의 진산(鎭山)이었다, 음성~충주 간의 국도 36호선의 잣고개 마루에서 남쪽으로 약 300m 지점에 있는 육교 부근에서 동쪽으로 난 등산로를 이용하여 오를 수 있다.


등산로 초입에서 약 300m 정도 올라가다 보면 약수터와 체육 시설 및 광장이 있는데 이곳으로부터 수정산 정상에 이르는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두 길은 정상부에 가까이 이르러 다시 하나로 합쳐진다. 이곳으로부터 산성이 있는 정상까지는 약 100m이다.


♣ 형태

수정산성의 형세는 북면을 밑면으로 하고 남쪽 치를 꼭지점으로 하는 부등형의 이등변 삼각형 모양이다. 정상부에 테를 두르듯이 자연 지형을 따라 축조된 테뫼식 산성으로 남쪽이 북쪽보다 약간 높고, 가운데 부분이 약간 오목하게 들어간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동쪽이 서쪽보다 낮은 서고동저형의 지형이다. 원래 토축 산성이 있던 것을 조선 후기에 돌로 고쳐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성의 둘레는 577m이고 평면 형태는 전체적으로 부정형의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으며, 성 내부의 면적은 203,414㎡ 정도이다. 성내의 구조물로는 세 동 이상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고, 문은 동문·서문·북문 등 세 곳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은 협축으로 축조하였는데 기초 부분을 ‘L’자 형태로 팠으며 외벽의 표면석과 내부의 뒤채움 성돌은 차곡차곡 가로로 층을 이루면서 쌓았다. 성돌은 대부분 수정산 일대에서 채취한 것으로 보이나 일부는 먼 곳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외벽의 표면석은 가로가 넓고 길이가 짧은 사각 방추형의 돌을 사용하였으며, 뒷채움 돌은 좁고 길쭉한 견치석(犬齒石)을 서로 물리게 쌓아 견고하게 하였다. 부분적으로 무너져 내렸지만 북쪽과 남동쪽에 비하여 비교적 잘 남아 있는 서쪽 성벽은 지형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고 있지만 최저 2.5m 정도에서부터 최대 7m 가량이며 성벽의 폭은 380㎝ 내외이다.


성벽 안쪽에는 폭 1m 내외, 깊이 60㎝ 내외로 얕게 파낸 도랑 형태의 배수로가 보이고 있다. 이 도랑을 참호로 보기도 하지만 인근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성벽의 안전을 위해 20여 년 전에 음성군에서 만든 배수로라고 한다. 또 조선시대의 각종 지리지에 성 안에 우물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 샘이 한 곳 발견되었다.


성안에서는 기와와 토기 등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채집되는 유물로 보아 대략 삼국시대에 축성되었으며 고려시대에도 일시적으로 사용되었다가 조선시대에는 사용되지 않고 폐허가 된 것을 보인다.


수정산성은 성의 잔존 상태나 축성 기법으로 보아 산성의 주된 방어 대상 지역은 현재의 음성읍이 있는 서쪽 방면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 상단 부분의 폭은 대략 4m이며 성의 내부에는 성벽을 따라가며 4~5m 폭의 회랑도가 개설되어 있다. 산성의 3곳 모서리에는 성벽의 외벽을 돌출시켜 쌓음으로써 치성(雉城)의 기능을 하도록 하였으며, 치 위에는 각루(角樓)가 설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현황

현재 성의 대부분은 허물어진 상태로 성벽 가운데 서쪽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고 남쪽 면과 북동쪽 경사면에는 일부의 석축만 남아 있다. 북서쪽의 산 정상부에 묘가 한 기 있고, 그 남쪽에도 묘 한 기가 있다. 이 정상부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성벽의 붕괴가 심하며, 남동쪽 성벽도 북쪽 성벽과 마찬가지로 심하게 무너져 내려 토성인지 석성인지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러나 서쪽 성벽은 석축의 대부분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주변에 옻나무가 많아서 옻샘이라고 불리고 있는 샘은 현재 가뭄으로 말라 있는 상태이다. 1999년 12월 31일에 충청북도 기념물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망이산성>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 망이산 일원에 축조된 고대 국방 시설.


♣ 개설

그간 봉수대로 알려져 왔으나 1980년 단국대학교 학술 조사단에 의해 고구려의 남진 기지로 쓰인 산성으로 추정되었다. 산성에 대한 기록은 주로 조선시대에 편찬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여지도서(輿地圖書)』·『대동지지(大東地志)』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기록들에 의하면 충주에서 서쪽으로 110리 되는 곳에 망이산이 있고, 이 산에 망이성(望夷城)이 있으며 망이성에는 망이성 봉수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안성군편에 '일죽면, 이천 및 충북 음성의 군계 마이산상에 있고, 석성으로서 3개 군에 걸쳐 있는데 본군에 속한 부분은 대략 3백간'이라 소개되어 있다. 『전국유적목록』에는 '일죽면 금산, 석성 부분 대개 3백간'이라 하여 앞의 자료를 요약하여 소개하였다. 『문화유적총람』에는 '금산산성. 안성군 일죽면 금산리 산 49번지에 신라 선덕여왕 때 백제군을 막기 위하여 쌓았다고 전해진다'고 하였다.


음성 망이산성의 내성을 형성한 작은 토루는 백제 초기에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석축의 외성은 치성과 성 안에서 수집된 토기 및 기와 등이 고구려 계통인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산성으로 추정된다. 또한 음성 망이산성의 동쪽 충주시 가금면 용전 입석에서 발견된 중원고구려비, 중원군 노은면에서 발견된 ‘건흥 5년(建興 五年) 세재병진(歲在丙辰)’의 명문이 있는 고구려 금동광배, 청원군 북일면 비중리에서 발견된 고구려계로 보이는 일광삼존불상 등을 볼 때 이 지역들과 음성 망이산성이 고구려의 점령 지역 안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음성 망이산성은 그 위치나 규모로 보아 고구려의 전방 중심 기지로 가장 적합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성은 신라 후기에서 고려시대의 유물과 건물 터가 많이 있는 걸로 보아 중세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 위치

음성 망이산성은 우리나라 중부 지방을 가로 지르는 차령산맥의 중간 지점에 있는 해발 472m의 속칭 마이산(馬耳山) 정상부에 있다. 내성은 음성군 경내에 주로 축조되었고 외성은 음성군과 이천시 영역이 일부 포함되었으며 안성시 구역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다. 내성의 봉수대에서 남쪽을 보면 눈 아래의 양덕리와 삼성면을 건너 진천군 일대가 펼쳐진 평원이 전개된다.


양덕리에 이르는 산세는 거의 절벽이어서 아주 험하고 가파르나 뒤쪽인 북쪽은 한 단 낮은 계곡이 넓게 전개되고 그 주위를 성벽이 에워싸고 있어 남쪽의 적군을 대비하여 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높은 대지의 내주성에서 상대방을 감시하고 대적하는 군사가 진을 구축하고 있었으며 뒤쪽 낮은 계곡에는 주력 부대가 주둔하여 많은 군사와 군마가 머물고 있었던 곳으로 추측된다.


♣ 형태

망이산 봉우리에 봉수대가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서쪽에 해발 458m와 452m의 두 봉우리가 있다. 산성은 이들 세 봉우리를 감싸고 북쪽을 향한 골짜기 부분까지 에워싸서 축조된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토축의 내성과 석축의 외성으로 이루어진 이중성이다. 성안은 평탄한 지대로 북쪽만이 산골짜기이고, 이곳에 작은 분지를 이루어 세 방향에서 흐르는 물이 모두 이곳으로 모인다.


서문 자리의 대지에서 남쪽으로 가면 또 한 곳의 대지가 전개되는데 그 서쪽 끝부분에는 망대와도 같이 튀어나온 대지를 성벽이 감싸고 있다. 축성 방식은 외벽을 높게 하여 적군을 방어하도록 하였으며, 내벽은 높지 않게 내부에 이르면서 평평하게 다져놓아 인마 통행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산성의 형식은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임을 알려준다.


현재 확인된 토성벽은 해발 450m 지점의 둘레를 따라 축조되었다. 내성의 북쪽에 움푹 내려앉은 부분이 있는데, 이곳이 문지(門址)로 추정된다. 내성 안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봉수대가 축조되어 있다. 외성은 둘레가 약 2㎞로서 산정부와 내성 북동쪽의 골짜기의 지세를 이용하여 만들었다. 장축 방향은 남북으로 되어 있으나 평면 형태는 지형에 따라 성벽을 연결하였기 때문에 방향이 일정치 않다. 성벽의 상단부가 모두 파괴되었기 때문에 여장(女墻)과 같은 방어 시설은 현재 확인할 수 없다.


외성의 문지로는 현재 서문지·남문지·북문지가 있다. 동문지는 현재 남아 있지 않으나 지형으로 보아 동쪽 계곡 부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치성은 다섯 곳에서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들 치성들이 대부분 심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에 정밀한 조사를 하면 그 수가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외성 안에는 건물지로 추정되는 곳이 여러 군데 있으며 이들 건물지에서는 기와편들이 다량을 산포되어 있어 장대(將臺)·망대·창고·병사(兵舍) 등과 관련된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규모와 형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내성과 외성의 축성 방식은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내성은 흙을 재료로 하여 쌓아올린 단순한 토성으로 동서 방향으로 길게 축조되었다. 내성의 흙 쌓기 방식은 내성의 성벽 가로 지름 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조사에서는 켜를 다져가며 쌓았던 판축의 흔적이 있으며 나무기둥을 사용한 흔적이 있다.


외성의 성벽은 대부분 가파른 산비탈을 이용하여 축조하여 성벽의 바깥쪽만 수직에 가깝게 성돌을 쌓는 바깥 면 쌓기[판축법]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 반면 안팎 면 쌓기[내외협축]의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외성의 안쪽에는 모든 구간에 걸쳐 일정한 너비를 가진 성벽 안쪽 통행로가 마련되어 있다. 이 길의 너비는 대개 3~4m 정도로, 사람 또는 말과 수레가 다니기에 충분한 공간을 두고 있다.


골짜기가 형성된 곳의 성벽 바깥 벽면은 긴 네모꼴로 다듬은 겉돌을 층층이 수평 눈금을 맞추면서 엇걸려 쌓고 겉돌 안쪽을 뒤채움돌로 메웠으며 여기에 흙을 보강하여 내탁하였다. 뒤채움돌도 그저 마구 쌓은 것이 아니라 높이에 비교하여 너비가 길고 중간 부분이 배부른 돌의 뒤쪽 끝이 벽면을 향하도록 하여 쌓았는데, 큰 돌 사이사이에는 작은 돌을 넣어 튼튼하게 하였다.


성돌의 크기는 성벽의 아래쪽일수록 크고 널찍하여 많은 무게를 잘 견디도록 하였으며 윗부분은 작고 가벼운 돌들을 사용하였다. 겉돌 가운데는 다른 것보다 긴 돌을 중간 중간에 끼워 넣어 그 끝이 뒤채움돌과 맞물려 성벽을 견고하게 지탱하도록 하였다.


바깥면석은 무너져 내려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 면석은 위로 오르면서 성벽 안쪽을 향하여 물려쌓기를 하였다. 그래서 성벽의 겉모습이 아래쪽은 조금 완만하고 위쪽은 거의 수직을 이룬 홀(笏) 모양을 하고 있다. 치성은 산 능선부에 축조되었는데 성벽의 외벽에 맞물리도록 축조한 것과 덧대어 축조한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치성의 하단부가 아래쪽으로 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기단석 밑에 큰 석재로 보강한 흔적이 보인다.


석성은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부분이 많지 않으나 동북 방향 능선부의 치성과 동문지로 추정되는 지점 사이와 남문지에서 북서쪽으로 약 150m 떨어진 부분에 석축의 외벽이 보존되어 있는데, 장방형으로 다듬은 돌을 신자형(臣字形)으로 차곡차곡 올려 쌓았음을 잘 보여준다.


♣ 현황

현존하는 성벽의 길이는 약 250m이다. 내성은 동벽·서벽·북벽은 현재까지 잘 남아 있지만 남쪽 성벽은 파괴가 심하여 겨우 유지만을 확인할 수 있다. 계곡 부분의 성벽은 대부분 무너져 본래의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고 제법 온전하게 보존 된 곳이라 하더라도 뒤채움돌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현재 성벽이 무너져 석축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구간에서도 외성 성벽 안쪽 통행로가 잘 남아 있어 성벽의 전체 테두리를 살피는데 도움을 준다. 문지가 남아 있는데, 이 문지들을 통과하여 지금도 주요 등산로가 나 있다. 동문지로 추정되는 부근에 돌로 축조한 우물이 현재 남아 있다.


<팔성리 고가>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에 있는 1930년대 전통가옥.


 

♣ 위치

생극면 팔성리는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나누어져 있는데, 음성 팔성리 고가는 아랫마을인 말마리에 있는 전통가옥이다. 말마리로 들어서서 골목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들어가면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음성 팔성리 고가를 볼 수 있다.


♣ 변천

음성 팔성리 고가가 지어질 당시인 1930년경에는 넓은 대지(약 2,706㎡) 위에 안채와 사랑채 등이 갖추어져 있었으나, 현재는 안채만이 본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1985년 12월 28일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3호로 지정된 이후 1991년에 지붕을 비롯한 수장, 목재 등에 대한 보수공사가 이루어졌다.


♣ 형태

음성 팔성리 고가는 ㄱ자 형 홑처마 팔작기와지붕 건물로, 자연석 기단 위에 네모난 주춧돌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조각을 한 양봉을 쌓았으며, 기둥 위로 대들보와 종보를 걸어 5량집으로 결구하였다. 가옥의 평면은 두 줄의 겹집으로, 중앙에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놓았다. 좌측 방은 2칸이고 바깥쪽으로 따로 마루를 놓았으며, 앞쪽으로도 바닥을 높인 툇마루 1칸을 설치하였다.


♣ 현황

음성 팔성리 고가에는 현재 사람이 살지 않고, 음성군과 연계하여 관리자(김영수)가 건물 관리를 맡고 있다.


♣ 의의와 평가

음성 팔성리 고가는 1930년대 전통적인 주거양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귀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변형된 형식의 마루와 부엌의 위치 등에서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전통 한옥의 80% 이상이 서쪽에 부엌을 두고 있는 데 반해 음성 팔성리 고가는 동쪽에 부엌이 있어 우리나라의 전통가옥 연구에 귀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태교사>

1744년 주응동이 주희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하여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에 건립한 사당.


♣ 개설

태교사의 설립자인 주응동(朱應東)의 본관은 신안(新安)이고 자는 광여(光汝)이다. 음성 출신으로, 주희(朱憙)[1130~1200]의 26대손으로 알려져 있다.


♣ 변천

태교사는 1744년(영조 20)에 주응동이 조선 초기의 문신 김여지(金汝知)[1370~1425]가 명에서 가져온 주희의 영정을 경기도 안성에 사는 김용으로부터 기증받아 봉안하기 위해 세운 사당인 문곡영당(文谷影堂)이 그 시초이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원되었다가 1893년 재건되었는데, 이때 사당의 명칭을 태교사로 고쳐 불렀다. 1905년과 1940년에 건물을 중수한 데 이어 1963년에는 계단을 설치하고 정문을 중수하였다.


♣ 형태

태교사(泰喬祠)는 유교문화와 관련한 전통 목조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홍살문을 지나면 전면에 재실이 있고, 그 뒤에 담장을 두고 솟을삼문 형태의 삼문이 있으며, 삼문을 지나면 사당이 있다. 전체적으로 강당이 앞에 있고 사당이 뒤에 있는 전당후묘 형식의 건물 배치를 보이고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전체 면적은 33㎡이다. 정면 3칸 기둥 사이의 간격은 2.14m로 등분하였으며, 측면의 툇간 1칸은 1.2m로 좁게 하였다. 나머지 1칸은 2.46m로 분할하였다. 구조를 보면 높이 70㎝의 자연석 기단 위에 팔각형의 주춧돌이 놓였으며, 그 위에 둥근기둥과 사각기둥을 혼용하여 세웠다.


기둥 상부의 공포는 무출목(無出目) 1익공 형식이며, 외부로 돌출된 부재는 쇠서가 퇴량 끝부분에서 직각으로 꺾였다. 창방(昌枋)으로 결구된 기둥 사이에는 소로가 4구씩 배치되어 주심도리와 장설(長舌)을 받쳤다. 가구(架構)는 퇴주와 평주 사이에 내고주(內高柱)를 세워 툇보와 대들보를 결구하는 형식으로, 대들보 윗부분에 동자기둥을 세워 보를 받쳤다. 보의 윗부분에 높이 57㎝의 사다리꼴 모양의 대공(臺工)을 놓아 종도리와 옥개의 무게를 지지하도록 하였다. 사당의 양쪽에는 은행나무가 있으며, 안에 주자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기단으로 높게 축조된 둘째 단에 위치하고 있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정면 양쪽 2칸은 온돌방을 두고, 중앙 2칸은 대청을 두었다. 창호는 정면의 중앙 2칸에 4분합 띠살문을, 양쪽 칸의 윗부분에 쌍여닫이 띠살창을 달았다. 정면 4칸 기둥 사이의 간격은 2.43m로 등분하였고, 측면은 불규칙하게 나누었다.


주간격(柱間隔)은 정면 4칸을 모두 2.43m로 등간(等間)을 이루며 구획하고, 측면은 1.2m와 2.43m로 불규칙하게 분할하고 있다. 구조는 높이 1.36m의 높은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가로 21㎝, 세로 21㎝의 기둥을 세우고 있다. 기둥 상부의 공포는 창방과 기둥머리가 없이 간단한 부재를 건물 내외부로 돌출시켜 대들보의 무게를 받쳤다.


가구(架構)는 전·후·평주(平柱) 위에 대들보를 결구하는 형식으로, 대들보 윗부분에 높이 24㎝의 동자기둥을 세워 보를 받쳤고, 그 위에 높이 54㎝의 사다리꼴 모양의 대공을 세워 종도리와 옥개의 무게를 받치는 등 일반 민가 주택에서 널리 쓰이는 민도리 계통으로 구성되어 있다.


♣ 현황

태교사는 1987년 3월 31일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례를 올렸으나 근래에는 주희의 생일인 음력 9월 15일에만 향사를 올린다.

 

 

<운곡서원>

1602년 주희를 제향하기 위해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에 건립된 서원.

 

 

♣ 개설

운곡서원(雲谷書院)은 1602년 충주목사 정구(鄭逑)[1543~1620]가 주자학을 집대성한 주희(朱憙)[1130~1200]를 제향하기 위하여 건립한 서원이다. 1990년 12월 14일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1호로 지정되었다.


♣ 위치

삼성면 용성리의 서원말 북쪽 산의 능선이 끝나는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 변천

1602년(선조 35) 정구는 기존의 백운서당(白雲書堂)에 주희, 곧 주자(朱子)를 배향하고 백운서원이라 이름하였으며, 그 후 정구가 죽은 뒤인 1661년(현종 2) 정구를 배향하며 운곡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사액은 1676년(숙종 2)에 받았는데, 이때 주자의 영정과 화상찬(畵像讚)을 받았다.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으로 문을 닫았다가, 1892년(고종 29) 지방 유림의 발의로 단을 만들어 제향을 지내고 1894년 서원을 재건하였다. 이듬해인 1895년 주희의 옛 영정을 가져와 봉안하였다. 1963년 중수하고, 1974년 단청공사를 하였으며, 1998년에는 재실을 신축하였다. 또한 2000년에는 동재를, 다음 해에는 서재를 재건하였다.


♣ 형태

남동향의 완만한 능선을 따라 자리한 운곡서원은 강당과 사당을 앞뒤로 배치한 전당후묘(前堂後廟) 형식을 따르고 있다. 서원은 사당과 강당을 담장으로 구분하고, 외삼문으로 바깥 경계를, 내삼문으로 강당과 사당 공간을 구획하였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외삼문 밖에는 홍살문을 세웠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앞쪽 강당 공간은 현재 주초석만 남아 있다. 외삼문에는 ‘경모문(景慕門)’이란 현판이 걸려 있으며, ‘춘추문(春秋門)’이란 현판이 걸린 내삼문을 들어서면 ‘운곡서원(雲谷書院)’이란 현판이 걸린 사당이 있다.

 

 

<마송리 석장승>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마송리 오미에는 3기의 석장승이 전해 온다. 2002년 3월 15일 충청북도민속자료 제12호로 지정된 마송리 석장승들은 지금으로부터 3백여 년 전에 세워진 것들이다. 청주고씨 집성촌이기도 한 오미 사람들에 따르면, 1712년 이 마을 출신 고중명(高重明)[1681~1765]이 무과에 합격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이는 고중명이 무과에 합격한 해로부터 정확히 280년 전 윗대 조상인 고덕수(高德秀)가 1432년(세종 14) 식년시(式年試)에 진사(進士) 4위로 합격하고, 그후 15년 뒤인 1447년(세종 29)에 고덕칭(高德稱)이 식년시 정과(丁科)에 15위로 합격한 후 처음 맞는 경사였기에 이를 경축하고 기념하며, 자손 대대로 귀감으로 삼게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 마송리 석장승의 고향 오미

석장승이 서 있는 마송리 오미의 ‘오미’는 오산(梧山)의 우리말 표기이다. 원래는 오뫼였는데 활음(滑音) 현상으로 오미가 된 것이다. 이는 증산(甑山)을 시리뫼로 부르다가 시리미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예전에는 동네의 형국이 새우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오(鰲)’를 썼는데, 이 오(鰲) 자는 자라 오(鼇)의 속자이나 오미에서는 새우 오로 알고 썼다고 한다. 마을 입구의 야트막한 언덕, 즉 숭덕사와 법화사가 자리한 곳을 새우의 꼬리로 본다. 일제강점기 때 글자가 복잡하다 하여 오동나무 오(梧)를 써서 오산(梧山)으로 바꾸었다.


오미는 오대산에서 발원하는 ‘말개울’과 보덕산에서 발원하는 ‘뒷개울’이 합치는 합수머리에 자리잡고 있다. 멀리 사방으로 꽤 높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고 뒷산이 완경사로 내려오는데, 그 기슭 끝 평지나 다름없는 곳에 자리잡고 있어 마을이 안정감이 있고 평화로워 보인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의 개천에는 민물새우가 많았는데 지금은 씨가 말랐다고 한다.


♣ 마송리 석장승의 위치

오미 석장승들은 얼마 전 오미 앞을 흐르는 청계천, 일명 말개울 가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옮겨 세웠다. 1호 장승(미륵형 장승)은 다리에서 10m 떨어진 냇둑에 위치하고 있으며, 여기서 100m 간격으로 2호 장승(문관석형 장승)과 3호 장승(선돌형 장승)이 세워져 있다.


1호 장승(미륵형 장승)은 원래 음성으로 넘어가는 길목, 곧 마송교 바로 건너쪽 방앗간 뒤에 있던 것을 현재의 장소로 옮겼다. 미륵형 장승을 세운 이유는 미륵세계가 전개되기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은 것으로 생각된다. 2호 장승(문관석형 장승)은 현재 위치보다 30m 가량 안쪽의 옥현과 텃골로 가는 길목에 세워져 있었다. 후손 중에 벼슬하는 사람이 많이 배출되기를 기원하며 세운 장승으로 보인다.


3호 장승(선돌형)은 얼굴 없는 장승으로, 원래는 원남면 마송리 714번지인 역전 근처 길가에 있었다. 이 길은 백마산 쪽, 즉 음성군의 송오리를 거쳐 괴산군의 송오리로 가는 길목이다. 질병이 없고 전쟁이 없는 태평성대가 유지되기를 갈망하는 마음을 ‘靜界大將軍(정계대장군)’이라는 글씨에 담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마송리 석장승들의 본래 위치로 볼 때, 고중명의 과거 합격을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석장승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여기에는 석장승으로써 마을의 경계를 표시함과 동시에 마을에 안정과 번창을 가져다 주는 일종의 수호신으로서의 기능까지를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심리학적으로 분석해 볼 때, 석장승과 같은 상징물이 마을을 보호해 주고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을 갖게 되면 사람들은 매사에 자신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결국 마송리 석장승은 각종 재앙으로부터 심리적 안정감과 위안을 주는 수호신이요, 동민들을 화합 단결하게 하는 구심점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고 볼 수 있다.


♣ 마송리 석장승의 모습

1호 장승(미륵형 장승)은 높이가 240㎝인데, 그중 약 80㎝가 얼굴이다. 앞면 너비는 40㎝ 정도이다. 얼굴은 장방형으로, 머리에는 관음보살과 같은 관을 쓴 듯하며, 이마에는 백호가 표시되어 있다. 눈썹은 거의 한일(一) 자이며, 눈은 눈망울이 매우 크며 앞으로 불룩 튀어나왔다.


오른쪽 귀는 약간 위쪽으로 붙어 있는 반면 왼쪽 귀는 아래로 처져 있다. 인중이 매우 넓으며, 입은 약간 반달형으로 다물고 있다. 턱밑을 깊숙이 들여 파내어 윤곽이 뚜렷하다. 손은 분명하지는 않으나 마치 앞으로 두 팔을 모아 팔짱을 끼고 있는 것 같다. 몸통 부분에 명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마모가 심하여 정확하지는 않다. 다른 장승과 마찬가지로 ‘靜界大將軍(정계대장군)’이라는 명문을 새겨 놓은 것으로 추측된다. 배 중앙 부분과 다리 부분에 깊게 파인 구멍이 나 있는데, 6·25전쟁 때 미군의 총에 맞은 자국이라고 전한다.


2호 장승(문관석형 장승)의 높이는 260㎝이며, 앞면 너비는 50㎝ 정도이다. 1호 장승보다 키가 더 훤칠하다. 2호 장승은 문관석 형태의 장승으로, 귀밑으로 이어지는 얼굴선이 달걀형으로 유연하여 표정이 순수하고 밝아 보인다. 눈 위의 머리(이마) 부분이 얼굴에 비해 길고 머리에는 사모를 착용한 모습이다. 왼쪽 눈썹은 반달형이며, 오른쪽 눈썹은 오랜 세월 마모되어 희미하다. 두 귀는 눈 위쪽에 나란히 붙어 있고, 두 손을 깍지 끼고 있다.


전형적인 양반 복장의 하나인 소매자락이 길게 늘어진 도포를 입고 있다. 눈은 크고 앞쪽으로 튀어나오게 생겼는데, 뭔가 반짝이는 생각이 떠올라 기분 좋아하는 표정이다. 입은 반달형으로 다물고 있으며 살며시 웃는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기품 있고 후덕한 양반풍이 넘치며, 인자하고 포용력이 있어 보인다. 배꼽 아래쪽으로 ‘靜界大將軍(정계대장군)’이라고 새긴 명문이 선명하다. 정계대장군은 “안정된 세계를 만들어 주는 대장군”이라는 뜻으로 보면 될 것이다.


3호 장승(선돌형 장승)의 높이는 220㎝이고, 너비는 50㎝이다. 얼핏 보면 광개토왕비를 연상케 하나 폭이 좁다. 직육면체의 자연석으로, ‘정(靜)’ 자가 끝나는 오른쪽부터 아래쪽이 그 위보다 넓어서, 마치 사람의 어깨선처럼 보인다. 목 부위쯤 되는 높이에서 몸통 아래쪽으로 ‘정계대장군(靜界大將軍)’이라고 음각했다. 그 바로 옆쪽에 ‘신묘 정월 일(辛卯 正月 日)’이라는 명문이 있다.


♣ 오미 장승제

오미 장승제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 오전 10시경에 지낸다. 제의는 각 장승마다 한 명의 헌관과 두 명의 집사가 맡아서 진행하는데, 3기의 장승에서 동시에 올린다. 제사 비용은 마을 기금으로 충당한다. 제수를 진설할 때는 맨 첫째줄에 백설기 시루를 놓고, 그 위에 껍질을 벗기지 않은 북어를 올려놓는다. 이때 북어의 머리는 동쪽으로, 꼬리는 서쪽으로 향하게 한다. 둘째 줄에는 감·대추·껍질을 까지 않은 밤을 올려놓고, 셋째줄에는 막걸리를 놓는다.


제사 절차는 보통의 기제사와 같이 제관이 먼저 분향하고 재배를 한 다음, 술을 따라 놓고 축문을 읽은 뒤 다시 재배를 하면 끝난다. 이때는 제관과 집사가 함께 절한다. 옛날에는 두루마기 차림으로 예를 갖추었지만 지금은 평상복 차림으로 제사를 지낸다. 축문은 다음과 같다.


“한 해의 차례가 정월 삭(朔)이 됨에, 유학 고○○는 백번 절하며 감히 오산(梧山)의 정계대장군 높으신 신령님께 고하나이다. 엎드려 바라옵건데, 우리 마을에 재앙을 소진해 주시고, 나쁜 전염병과 흉칙한 질병으로부터 그 재앙을 물리쳐 주시고, 독 있는 벌레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그 해를 멀리 가게 해주시고, 모든 요사스럽고 더러움을 행랑채가 깨끗한 것처럼 사그라지게 해주시고, 길하고 상서로운 일이 몰려들게 해주시고, 부모님이 학처럼 장수하게 해주시고, 자손이 메뚜기처럼 많게 해주시고, 선비는 구름사다리에 올라가게 해주시고, 농부는 노적가리에 올라가게 해주시고, 술에 목욕하고 떡을 나누어 먹게 해주시고, 먹고 마시며 노래 부르게 해주시고, 고기를 뜯어먹고 물고기를 잡아먹게 해주시고, 배를 두드리며 춤추게 해주시어 무한한 세월 동안 태평하고 편안하게 지나게 해주소서. 이에 감히 백번 절하며 축원하나이다.(維歲次 正月朔日 幼學 高○○ 百拜敢告于 梧山淨界大將軍尊神 伏以本里 災殃消盡 惡癘凶瘟 乃攘其禍 毒蟲猛獸 乃遠其害 諸般妖穢 廊淸如消 吉祥輻輳 父母鶴壽 子孫螽蟄 士躡雲梯 農登露積 浴酒投餠 含哺而歌 齧肉啖魚 鼓腹而舞 無限年 太平安過 玆敢百拜祝願)”


♣ 마송리 석장승의 의의

마송리 오미 석장승은 오미의 역사와 주민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증인이다. 오미에서 출생한 고중명이 과거에 합격한 것을 경축하고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조형물이자, 동시에 마을 사람들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세운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마송리 석장승은 한 시대 주민들의 삶과 마음을 자연물에 표상화한 것으로서,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삶 자체가 문화임을 인식할 수 있다.


<지천서원>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서원.

 

 

♣ 개설

지천서원(知川書院)의 시초는 조선 중종 때 이조참판을 지낸 김세필(金世弼)[1473~1533]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 팔성산 아래에 지은 초옥으로, 김세필은 이곳에서 산수를 벗삼아 여생을 보내며 후학을 교육하였다고 한다. 초옥은 당시 충주목사 박상(朴祥)의 재정적 도움으로 건립되었는데, 박상은 자주 김세필을 찾아와 격의 없이 시를 읊고 환담하였다고 한다.


그후 1740년(영조 10)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자수(金自粹)와 김세필 등을 추모하기 위해 그 자리에 서원을 짓고 위패를 모셨다. 사당 안에 김자수를 주벽(主壁)으로 좌우에 김세필·박상·김저·김의·김홍욱·김정현·김종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지천서원은 운곡서원(雲谷書院)과 함께 음성 지방 유림의 대표적 전당으로 자리잡고 있다.


♣ 위치

생극면 팔성리의 생극평야를 바라보는 부마팔현지라 불리는 곳에 위치한다.


♣ 변천

김자수와 김세필 등을 배향하고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기 위해 1740년(영조 10) 문을 열었으나 1741년(영조 11) 영조의 서원 철폐정책에 따라 1차 폐원된다. 1800년(정조 24)에 중건하였으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2차 폐원되었다가 1898년 공자당(工字堂)을 중건하고 1906년 재건한 뒤 1963년 중수를 하였다.


지천서원이 문을 열 당시에는 김자수와 김세필, 김저(金儲)[1512~1547], 김의(金嶷)[1572~1649], 김정현(金鼎鉉)[1591~1675], 김홍욱(金弘郁) 등 6위의 위패를 모셨으나, 이후 김종현과 박상(朴祥)[1474~1530]을 추가 배향하고 있다.


♣ 형태

지천서원은 산중턱의 높은 경사면을 이용하여 3단으로 정지한 터 위에 자리잡고 있는데, 정지된 첫째 단에는 강당인 공자당이 위치하고, 그 좌측으로 둘째 단에는 솟을삼문을 배치하였다. 솟을삼문을 지나면 높게 축조된 기단 위에 사당을 배치함으로써, 사당을 중심으로 강당이 우측에 위치하고 있는 좌묘우당식의 배치법을 따르고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으로, 앞의 1칸은 툇간이다. 공자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으로, 앞의 1칸은 툇간인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으로 모현당(慕賢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마루방 천장 벽에는 중수기가 걸려 있다. 솟을삼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경모문(景慕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삼문 옆에는 ‘지천당묘정비(知川堂廟庭碑)’가 있다. 지천서원 입구에는 홍살문과 하마비가 있으며, 홍살문의 서쪽 편으로 1621년(광해조 13)에 세운 '현감김공의청백선정비(縣監金公嶷淸白善政碑)'가 있다. 재실은 향사 때 제관들의 숙소로 사용하는 한편, 지방 유생의 학문 강론 장소 및 각종 행사 때의 협의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고직사는 평소에 관리인이 주거하며, 향사(享祀) 때에는 제기 보관 및 제관의 숙소를 겸하고 있다.


♣ 현황

지역 유림과 후손들이 주관하여 음력 3월 초정일과 9월 초정일에 향제를 지내고 있다.

 

 

<충룡사>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용산리에 있는 조선 말기 순국 열사 박세화를 기리는 사당.


♣ 개설

본관이 밀양인 박세화(朴世和)[1834~1910]는 1895년(고종 32) 일본 낭인에 의해 명성황후가 살해되자 분개하여 도사 윤응선(尹膺善)과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체포되었다. 그후 석방되어 음성읍 동음리 등지에서 학문에 전념하며 찾아오는 문도(門徒)들을 가르치다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망국의 분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국하였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團章)이 추서되었다. 충룡사는 1964년에 당시의 음성군수 유용기가 지방 유림들의 협조를 얻어서 건립한 사당이다.


♣ 형태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으로, 토석혼축의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 충룡사 담장 옆에는 박세화 순도비가 세워져 있다.


♣ 현황

충룡사에는 음성 유림 주최로 매년 봄과 가을에 윤응선과 신현국(申鉉國), 정규해를 추가로 배향하여 향사하고 있다.


음성군에서는 2001년 12월 7일에 충룡사를 음성군 지정문화재 제2호로 지정하여 관리해오고 있다.

 

 

<본성리 미륵불>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본성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미륵 석불.

 


♣ 형태

화강암으로 조성한 불상으로, 하부가 땅속에 매몰되어 상반신 상처럼 보인다. 머리에는 원형의 관을 갖추었으며 귀는 가늘고 길게 표현하였고 눈과 코, 입은 심하게 파손되어 형태가 뚜렷하지 않다.


♣ 특징

이 불상은 높이가 210㎝, 두고 70㎝, 보개 높이 11㎝, 어깨 폭 100㎝이며, 얼굴은 원만하고 머리에 관을 갖추고 있어 위엄이 있고 자비로워 보인다.


♣ 의의와 평가

현재의 위치에 사찰이 있었다고 전하나 흔적조차 없고 미륵불만 도랑가에 방치되어 있었던 것을 보호각을 세워 봉안하고 있다.

 

 

<가섭사>

충청북도 음성군 읍성읍 용산리 가섭산에 있는 고려 후기의 사찰.

 


♣ 개설

가섭사는 석가모니의 10대 제자 중 하나인 가섭존자(迦葉尊者)의 이름을 딴 사찰이다. 가섭존자는 두타행(頭陀行)을 가장 충실히 실천하였고, 영취산에서 석가모니 부처가 연꽃을 들어 그 의미를 물었을 때 유일하게 미소로 답하여 염화미소(拈花微笑)의 가르침을 전한 인물이다. 가섭사는 창건 사실을 기록한 문헌 기록과 관련 유물이 현존하지 않으며, 다만 조선시대의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실상을 추정할 뿐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 건립경위 및 변천

고려 후기 공민왕 때 왕사(王師) 나옹선사(懶翁禪師)가 창건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1624년(인조 2)에 벽암(碧巖)이 중수하였고, 이후 기록을 통하여 18세기까지 법등(法燈)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10년대에는 응진암(應眞庵)이라 불렸고, 1938년경 화재로 전소되었다. 이후 주지 윤원근(尹元根)이 터를 옮겨 중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현황

현재의 가섭사에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와가(木造瓦家)의 극락보전(極樂寶殿)과 정면 2칸, 측면 1칸 반의 삼성각(三聖閣), 그리고 콘크리트로 만든 요사채 1동이 있다. 극락보전 안에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주존(主尊)으로 하는 삼존불(三尊佛)이 있는데, 협시불(挾侍佛)은 관세음보살좌상과 지장보살좌상(地藏菩薩坐像)으로 1975년에 만들어졌다.


아미타여래좌상은 가섭산에 있었던 상봉악사지(上鳳岳寺址)에서 옮겨왔다는 이야기와 성주사(聖住寺)가 폐사될 때 옮겨왔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아미타여래의 복장물로 『능엄경(楞嚴經)』,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등이 확인되었고, 불상의 제작 시기는 조선 후기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음성향토유적 제7호로 지정되어 있다. 극락보전의 탱화는 삼존불(三尊佛)의 뒤편으로 후불탱화 1폭, 그 옆으로 신중탱화(神衆幀畵) 2폭이 있고, 삼성각의 탱화로는 산신탱(山神幀), 칠성탱(七星幀), 독성탱(獨聖幀)이 있다. 한편 사찰 내 유물로는 극락보전 옆에 가로 150㎝, 세로 90㎝, 높이 60㎝의 석조(石槽)가 있으며, 193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동종(銅鐘)이 있다.


<가섭사 석가여래좌상>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용산리 가섭사에 있는 고려 전기의 불상.


♣ 형태

가섭사 석가여래좌상은 전체적인 조각 기법이 정제되었으며, 얼굴 모습은 원만하고 인자하다. 이마에는 백호(白毫)가 있고, 귀는 길며,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어깨에 들어 외장을 하였고, 왼손은 무릎 위에 들어 상장한 설법인(說法印)을 취하고 있다. 목불로서 금박을 입혔는데 높이가 90㎝이며 유리함 속에 안치되어 있다.


♣ 특징

가섭사 석가여래좌상은 가섭사의 주불로서 이 사찰의 존불이 아니고 음성군 용산리 상복악사가 폐사되었을 당시 이곳으로 옮겨 안치했다는 설과 감우리 성주사가 폐사될 때 이곳으로 이치했다는 설이 있다.


<후미리 석탑>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후미리 동촌에 있는 고려 전기의 석탑.


♣ 개설

석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마련된 공간으로 일반적으로 사찰의 중심에 세운다. 후미리의 석탑도 절터의 중심에 세웠던 것으로, 원래는 5층이었으나 현재 1층만 남아 있다.


♣ 건립경위

후미리 석탑이 있는 후미리 사지의 창건 시기나 연혁을 알려주는 고문헌 기록은 없다. 단지 1942년에 간행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처음으로 “후미리의 북방 약 600칸에 있음. 와편 다수 산재하며 훼양(毁壤)된 석탑은 하부 이층만 존재하는데 기부종횡각사척(基部縱橫各四尺)”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또한 “탑상골 절터”라는 지명을 사용하여 오래 전부터 탑이 있는 절로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 위치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에서 소이면으로 들어가다 보면 한라중공업 음성공장이 나온다. 이 공장의 북쪽 대장리에 관골소류지가 있는데 이곳에서 북동쪽으로 300m 지점에 후미리 절터가 있다. 이 절터 내에 후미리 석탑이 있다.


♣ 형태

후미리 석탑은 원래 5층 석탑이었으나 현재는 기단부 1층과 탑신부 1층만 남아 있다. 지대석은 땅 속에 묻혀 있어 확인할 수 없고, 기단면석은 4매의 판석으로 결구하여 조립하였는데, 현재 약간 틈이 벌어져 있고 면석에는 문양이 조식되지 않았다.


기단갑석은 1매석으로 조성되었는데 부연이 없다. 아래와 윗면이 모두 수평을 이루었고, 윗면에는 탑신받침 1단이 있다.


1층 탑신석에는 우주(隅柱)가 양각되었으며 다른 문양은 없다. 1층 옥개석은 일반형으로 3단의 층급받침이 있고, 낙수면은 적당한 경사를 이루어 안정감을 준다. 1층 옥개석 이상은 모두 결실되어 현재 부재조차 찾을 수 없다. 후미리 석탑의 크기는 기단부가 사방 모두 12㎝이며 현재의 높이는 210㎝이다.


♣ 의의와 평가

후미리 석탑은 비록 1층 이상이 모두 결실되어 버렸지만 음성 지역에 있는 탑 가운데 규모나 그 조성수법이 뛰어난 수작으로 평가된다. 탑의 모양이나 낙수면의 경사, 결구된 모습 등으로 보아 후미리 석탑은 고려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호정>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설성공원에 있는 일제강점기의 누정.


♣ 변천

경호정은 1934년 당시의 군수 권종원이 창건하여 연풍정이라 하였으나 이후 군수 민찬식이 경호정으로 이름을 바꾸고 제액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 형태

경호정 건물은 정방형 팔작지붕 목조기와집 양식으로, 정면 2칸, 측면 2칸을 모두 개방시켜 시야를 트이게 함으로써 정자로서의 기능을 살렸다. 정자 내부는 통칸의 대청으로, 우물 마루를 깔고 있다. 경호정은 약 1,500여 평의 연못으로 둘러싸인 200여 평의 섬 가운데 있는데, 정자에 출입할 수 있도록 좌우 중앙에 폭 1.35m의 화강석 교각을 설치하였다.


♣ 현황

경호정은 연못과 정자와 교각이 잘 조화되어 여유와 사색 풍류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서, 현재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순 효자문>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통동리에 있는 조선 말기 효자 김순의 정려문.


♣ 개설

김순(金石+舜)은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통동리에서 태어났다.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고, 아버지가 사망하자 마을 뒷산에 모시고 추운 겨울에도 시묘를 하였다. 시묘를 하는 중에 손가락에 동상을 입어 7개가 떨어져 나가 마을 사람들이 ‘칠지효(七指孝)’라 불렀다. 밤에는 호랑이가 와서 같이 지냈고, 낮에는 산새들이 날아와서 놀았다고 전한다. 훗날 김순의 효행에 관한 얘기를 들은 임금이 사헌부감찰을 증직하고 정려문을 세우게 하였다.


♣ 변천

효자문은 원래 현 위치에서 동쪽으로 약 150m 떨어진 산등성이에 있었으나 1983년 통동리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워졌다.


♣ 형태

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 기와집이다. 양옆에는 풍벽을 달고 초석은 팔각 석주형이며, 전후좌우 네 면은 홍살을 둘렀다. 효자각 내부에는 '효자동몽교관조봉대부사헌부감찰경주김순지려성상이십년계미정월명정(孝子童蒙敎官朝奉大夫司憲府監察慶州金(石+舜)之閭聖上二十年癸未正月命旌)'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편액 밑에는 충주 유생이 올린 상소문이 판각되어 있다. 뒷면에는 김홍(金泓)이 찬한 「정려서(旌閭序)」기문이 새겨져 있다.


♣ 현황

경주김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김창식 효자문>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주봉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김창식의 효자문.


♣ 개설

김창식은 어린 나이에 모친이 병이 나자 명약을 구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으며, 5년 후 모친의 병세가 악화되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먹여 소생시켰다. 10살 때 모친이 죽자 매일 닭이 우는 시간에 5리나 떨어져 있는 묘소로 가 참배하였다. 무릎과 손으로 짚었던 자리는 떼가 죽었을 정도라고 한다. 성묘길 옆의 벗나무에 던진 돌이 쌓여서 성황당이 되었고, 호랑이가 보살펴주었다고 전한다.


♣ 형태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효자각 안에는 효자각 건립의 전말이 적힌 「건각기(建閣記)」와 현판이 걸려 있다.


<권길 충신각>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갑산리에 있는 조선 중기 충신 권길의 정려문.

 


♣ 개설

권길(權吉 1550~1592)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응선(應善)이다. 음보(蔭補)로 등용되어 1590년(선조 23) 경상도 군위현감, 1592년 상주판관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변사 이일(李鎰)과 함께 상주성에서 왜적을 상대하여 싸웠다.


왜적과 전투를 벌일 때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지킬 것을 맹세하자, 고을 구실아치의 우두머리인 박걸(朴傑)을 비롯하여 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이에 호응하여 싸웠다. 하지만 무기와 병사의 열세로 패하여 전사하였다. 상주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 변천

충신각은 선조 때 건립되었는데, 현재의 건물은 1921년에 새로 지었다.


♣ 형태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목조 기와집으로 지붕 양편에 풍벽을 달고 주위는 홍살로 막았다. 충신각 안쪽에는 '충신증자헌대부이조판서겸지의금부사오위도총관영풍군행통훈대부상주판관겸상주진첨병마절제도위권길지문선조조명정려개국오백삼십년신유오월일중건(忠臣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管永豊君行通訓大夫尙州判官兼尙州鎭僉兵馬節制都尉權吉之門宣祖朝命旌閭開國五百三十年辛酉五月日重建)'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편액 뒤에는 중건 시기를 밝힌 글이 있다. 앞쪽 처마 밑에는 ‘영풍군충신문(永豊君忠臣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충신각 주위에는 철책 담장을 두르고 앞쪽에 철문을 달았다.


♣ 현황

충청북도 음성군 향토문화재로 안동권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구령 충신문>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차평리에 있는 조선 중기 이구령의 충신문.


♣ 개설

본관이 성주(星州)인 이구령(李龜齡)은 임진왜란 때 홍천현감으로 조헌(趙憲) 휘하에 들어가 활약하다 금산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금산 전투에서 순절한 사실이 나중에 조정에 알려져 1905년에 명정되었는데, 충신각은 1980년에 세워졌다.


♣ 형태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정려 안쪽의 편액에는 '충신효충장의적의협력통훈대부홍천현감성주이공휘구령임진순절성상광무구년명정(忠臣效忠仗義迪毅協力通訓大夫洪川縣監星州李公諱龜齡壬辰殉節聖上光武九年命旌)'이란 글귀를 새겨 넣었다. 편액의 양옆에는 기문을 달았고, 앞쪽 처마 밑에는 '충절문(忠節門)'이란 현판을 걸었다.

 

 

<옥산사>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문촌리에 있는 조선 말기 이기홍을 봉안한 사당.


♣ 개설

옥산사는 주자(朱子), 송시열과 함께 직재(直齋) 이기홍(李其洪)을 모시고 봄과 가을에 제향하는 사당이다. 옥산사는 본래 괴산군 연풍면 원통리에 있던 문산서원을 1908년에 복원한 사당이다.


♣ 변천

문산서원이 흥선대원군 때 서원 철폐령으로 폐쇄되자 40여 년 뒤인 1908년에 사액서원의 철폐를 애석하게 생각한 유림과 후손들이 복원한 사당이다. 이기홍의 충절과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기홍 후손의 세거지인 음성군 감곡면 오갑으로 옮겨 재건하였다. 1927년에 중수하였으며 1983년 전주이씨 봉산군파 종친회에서 중건하였다. 1995년도에 신축되었다.


♣ 형태

옥산사의 전체 배치는 큰 경사를 이룬 대지에 지세를 따라 남향으로 3단 정지한 후 그 첫번째 단에 홍살문을 두어 외부와의 경계를 구획하고 있다. 홍살문에 들어서면 가운데 연못이 있고 돌계단을 오르면 정지된 두 번째 단에 정면 3칸 후면 1칸의 맛배기와 지붕으로 된 삼문이 배치되어 있다.


삼문을 지나면 세 번째 대리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 지붕을 한 사당이 있다. 옥산사에 들어서는 입구 돌계단 왼쪽에 1983년에 세운 옥산사중건기비(玉山祠重建記碑)가 있으며 옥산사 현판 오른쪽에 「옥산사중수기(玉山祠重修記)」가 있다.


♣ 현황

매년 3월 중정일(中丁日)과 9월 중정일(中丁日)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권제 부조묘>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갑산리에 있는 조선 초기 문신 권제를 봉안한 사묘.


♣ 개설

권제 부조묘는 권제(權踶)[1387~1445]를 봉안한 사당이다. 문경(文景)은 권제의 시호이다. 권제의 자는 중의(仲義), 호는 지재(止齋), 본관은 안동이며 권근(權近)의 아들이다. 1445년(세종 27) 정인지, 안지 등과 『용비어천가』 편찬에 참여하였다. 훗날 영의정에 증직되고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추봉되었다.


♣ 형태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며 솟을삼문이 있다. 사당에는 '충주별조재건기(忠州別祧再建記)'라는 문구가 있고, ‘문경공 부조묘(文景公 不祧廟)’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솟을삼문에는 한자로 ‘경앙문(景仰門)’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남연년 충신각>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노리에 있는 조선 후기 충신 남연년의 정려각.


♣ 개설

1728년 무신난(戊申亂, 이인좌의 난) 때 청주영장(淸州營將)으로 순절한 조선 후기의 무신인 남연년(南延年)[1653~1728]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각이다. 남연년의 본관은 의령, 자는 수백(壽伯)이다. 1676년(숙종 2)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1727년(영조 3)에 청주영장이 되어 토포사를 겸하였다.


무신난 때 청주읍성이 함락되면서 사로잡힌 뒤 온갖 회유에 저항하다 순절하였다. 조정에서는 남연년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아들 남덕하를 등용하였고, 부인이 죽자 장례를 도우며 치상하였다. 1728년에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고, 충장(忠壯)이라 시호하였다. 이듬해에 숭선군(崇善君)에 추봉되었으며, 청주의 표충사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남충장공시고(南忠壯公詩稿)』가 있다. 묘소는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에 있다.


♣ 변천

1728년(영조 4)에 건립되었으나 쇠락하여 1979년 중건되었다.


♣ 형태

정면 3칸 측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 기와집이다. 충신각 안에는 '충신증숭정대부겸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지훈련원사오위도총부도총관행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겸청주진영장시충장공남연년지문상지사년무신월일명정(忠臣贈崇政大夫兼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知訓鍊院事五衛都摠府都摠管行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兼淸州鎭營將諡忠壯公南延年之門上之四年戊申月日命旌)'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충신각 둘레는 철책 담으로 둘렀고, 옆에는 ‘의령남씨세계비(宜寧南氏世系碑)’가 세워져 있다.


♣ 현황

『남충장공시고』 판목은 2002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18호로 지정되었고, 충신각은 의령남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평곡리 석조보살입상>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평곡리 평곡리 사지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


♣ 형태

평곡리 석조보살입상은 사질이 많은 화강암의 석불로, 머리 부분이 절단된 것을 시멘트로 보수하였다. 불상의 상호는 긴 편이며 눈과 코, 입 등이 마멸되어 선명하지 않다. 양쪽 귀는 길게 늘어져 있으며,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었고,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으나 조각이 선명하지 않다. 관대에서 양귀 뒤쪽으로 내려진 2조의 띠무늬[帶紋]가 어깨 위까지 걸쳐져 있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이며 가슴 앞에 둥근 의대가 보이는데, 발이 땅속에 파묻혀 있어 상태를 파악할 수 없다.


♣ 특징

수인(手印)의 형태를 보면 오른손은 가슴 부분에서 손바닥이 바깥을 향했으며, 왼손은 배꼽의 위치에서 손바닥이 안쪽을 향하고 있다. 크기는 높이 115㎝, 어깨 폭 36㎝, 귀 길이 26㎝, 관대 폭 57㎝이다.


♣ 의의와 평가

조성 연대는 상호가 원만치 못한 점, 법의의 무늬 수법, 각부의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평곡리 석조여래좌상>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평곡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


♣ 형태

평곡리 석조여래좌상은 모래가 많이 함유된 사질의 화강암으로 만들어 마멸이 심하다. 머리 부분은 결실되어 시멘트로 새로 만들었으며 결가부좌한 양쪽 무릎 부위도 파손되었고 두 손도 결실되었다.


대좌(臺座)와 광배(光背)가 없어 현재 자연석을 깔고 그 위에 석불을 안치하였으며, 머리에는 최근에 만든 판석을 올려놓아 보개처럼 보이게 하였다. 그리고 배 모양의 거신 광배처럼 생긴 자연석을 불상 뒤에 세워 광배석을 대신하였다. 법의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양팔에 걸쳐 양쪽 무릎을 덮은 듯하나 무릎 부분의 결실로 옷 무늬는 볼 수 없다.


♣ 특징

불상 뒤에 있는 광배는 자연석으로 되어 있는데 본래의 것인지 후대에 세운 것인지 알 수 없다. 평곡리 석조여래좌상의 크기는 높이 145㎝, 어깨 폭 61.5㎝, 무릎 폭 80㎝이다.

 

 

<성주사지 부도>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감우리 성주사지에 있는 조선 중기의 부도.


♣ 개설

성주사는 빈 절로 남아 있다가 1910년경에 자연 붕괴되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성주사지는 폐허가 되었고, 옛 터의 남쪽 언덕에 2기의 부도가 남아 있다.


♣ 건립경위

성주사는 언제 건립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 보현산에 성주사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17세기 후반부터 향화(香華)가 피어 근래까지 지속되었다고 추정된다.


♣ 위치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에서 금왕 쪽으로 국도 37호선를 따라가다 보면 왼쪽으로 동음리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이 길로 고개를 하나 넘으면 처음 나타나는 마을이 승주이다. 이 마을에 성주사지가 있다. 성주사지에서 300m 정도 떨어진 남쪽 언덕에 성주사지 부도가 있다.


♣ 형태

성주사지 부도는 현재 2기가 남아 있는데 1호 부도는 화강암으로 조성하였으며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낮은 기단석 위에 사각기둥 모양의 옥신석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 모양의 옥개석을 올렸다. 부도의 높이는 110㎝, 너비는 81㎝이다. 제2호 부도는 기단부와 옥개석이 없어지고, 1매의 복연대석(伏蓮臺石) 위에 구형의 옥신석만이 남아 있다. 형태로 보아 팔각원당형 부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나머지 부재를 확인할 수는 없다.


♣ 금석문

성주사지 제1호 부도의 옥신석 전면에는 '건륭십구년십이월(乾隆十九年十二月)'이라고 쓰여 있고, 뒤편에는 '법□원상(法□圓尙)'이라고 새겨져 있다.


♣ 의의와 평가

성주사지 부도는 성주사지의 실체를 증명하는 유일한 유물이다.

 

 

<보현암 석조약사여래좌상>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 보현암에 있는 고려 전기의 석조 불상.

 


♣ 형태

보현암 석조약사여래좌상은 한 덩어리의 화강암을 다듬어 주형거신광(周形去身光) 형태로 만들어졌고, 좌불상과 광배를 정교하게 부조하였으며, 뒷면은 둥글게 처리하였으나 정교하지는 않다. 불상의 현존 상태는 오른쪽 하단의 광배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전체적으로 양호한 편이다.


머리에는 낮은 육계가 남아 있고 두건을 쓴 듯한 머리카락은 양옆으로 땋아 왼쪽은 귀 뒤로 돌리고 오른쪽은 귀밑으로 내려 어깨와 오른팔까지 닿아 있다. 상호는 볼에 살이 많은 원만상이고 미간에는 지름 2.7㎝, 깊이 1㎝의 백호공이 있으며 코, 입술의 표현은 뚜렷하다. 귀는 길게 늘어져 어깨에 닿아 있으며, 목에는 삼도가 없는 대신 1조의 굵은 선으로 표현된 영락이 장식되어 있고, 법의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가슴이 크게 노출되어 있고 군의와 매듭이 굵게 표현되었다.


손 모양은 약사불에서 흔히 보이는 수인상으로 양손을 복부에서 마주잡고 약함을 받쳐 들고 있는 모습이다. 앉은 자세는 왼쪽 무릎이 파손되어 원상을 잃었으나 결가부좌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이 4㎝ 두께의 굵은 선으로 표현되었고, 주형거신광 전체에 화염문을 정교하게 표현하였다. 현재의 상태로는 대좌의 유무를 확인할 수 없으나 대체로 각부 양식을 모두 갖춘 불상이라 판단된다.


♣ 특징

약사불을 조각한 수법이 일반적으로 선이 굵어 특이한 인상을 주며, 음성 지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양식이다. 불상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기보다는 이국적인 요소가 가미된 작품으로 판단된다.


<보현암 석조약사여래의상>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 보현암에 있는 고려 후기의 석조 불상.

 


♣ 형태

두광과 신광은 5~7㎝ 두께의 양각 선으로 돌렸을 뿐 다른 문양의 조식은 보이지 않으며, 신광(身光)의 하단이 불상의 무릎 위에 닿고 있어 불상에 비해 광배(光背)가 작은 편이다. 머리에는 삼산형(三山形)의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 특이한 양식을 보이며, 보관 밑으로 나온 머리 형태는 소발이다.


상호는 직사각형에 가깝고, 코와 입 부분은 손상되었으며, 양옆의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게 표현하였다. 목에는 삼도의 윤곽이 드러나 있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가슴에 들어 외장하였고, 왼손은 복부에 대고 약함을 들고 있어 약사불상임을 나타내고 있다. 양 다리는 매우 작게 표현되어 상체에 비하여 빈약하다.


♣ 특징

보현암 석조약사여래의상은 전체적으로 불상의 양식을 모두 갖추었다고 할 수 있는데, 얼굴 모습에 비하여 하체로 내려갈수록 매우 형식화된 감이 있으며, 균형이 제대로 맞지 않는다. 전체 높이 110㎝, 폭 79㎝, 불상 높이 96㎝, 두광 지름 44㎝, 신광 지름 64㎝이다.


♣ 의의와 평가

보현암 석조약사여래의상은 도식화된 의문 처리와 하체의 불균형, 광배의 선에서 느껴지는 간략화 등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보룡리 석조여래좌상>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보룡리 보룡사지에 있는 고려 후기의 석조 불상.


♣ 형태

보룡리 석조여래좌상은 머리에는 원형관을 쓰고 있는데, 머리는 나발(螺髮)이며 이마에는 백호(白毫)가 나타나 있고, 귀는 길게 어깨에 닿았으며 얼굴은 풍만하다. 목에는 삼도가 있고 눈과 코, 입은 파손이 심하여 알아볼 수가 없다. 양손은 무릎 위에 놓았고 양발은 결가부좌하여 당당한 자세로 안정감을 준다. 법의는 통견(通肩)인데, 의문(儀文)의 굴곡이 뚜렷하며 앞가슴 부분은 U자형으로 탁 트여 있다.


♣ 특징

손 모양으로 보아 여래불로 보이나 머리에 둥근 관을 쓰고 있어 존명을 단정하기 어렵다. 미륵불로 불려왔던 것으로 보아 존명과 관계없이 미륵으로 모셔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보룡리 석조여래좌상의 높이는 150㎝, 어깨 폭은 40㎝ 정도이다.


♣ 의의와 평가

보룡리 석조여래좌상은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비정하고 있으나, 당당하고 안정감을 주며, 의문이 뚜렷하고, 주변 사지에서 확인되는 기와가 모두 고려시대의 것이라는 점으로 보아 고려 후기의 것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쌍정리 삼층석탑>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쌍정3리 하정에 있는 고려시대의 삼층석탑.


♣ 개설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는 공간으로 신앙의 대상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석탑이 많이 만들어졌고, 중국에서는 전탑, 일본에서는 목탑이 많이 만들어졌다.


♣ 건립경위

쌍정리 삼층석탑은 마을의 민가 안에 있고,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쌍정리 삼층석탑이 있는 곳에 사찰이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개인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건립되었다고 추정된다.


♣ 위치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소재지에서 진천군으로 가는 국도 21호선를 따라가면 맹동면 소재지가 나온다. 이곳에서 맹동초등학교를 지나 1㎞를 가서 오른쪽 농로로 접어들면 쌍정3리 하정 노인회관이 나타난다. 쌍정리 삼층석탑은 이 노인회관 옆 민가 안에 있다.


♣ 형태

쌍정리 삼층석탑의 기단부는 지하에 매몰되어 보이지 않고, 1매석으로 만들어진 기단갑석의 윗면만이 노출되어 있다. 탑신부는 3층으로 1, 2층은 탑신석과 옥개석을 별석으로 만들었고, 3층은 탑신과 옥개석을 1매석으로 조성하였다. 탑신석에는 우주(隅柱)가 표현되었으며, 옥개석에는 2단의 층급받침이 마련되었다. 옥개석의 밑면은 크게 반전되었으며, 낙수면에도 반전이 보이고 우동(隅棟) 부분을 양각선으로 나타내었다. 3층 옥개석 위에는 자연석을 올려놓아 상륜부를 대신하였다.


석탑의 전체 높이는 167㎝이고, 기단갑석의 크기는 가로 65㎝, 세로 69㎝, 높이 8㎝ 정도이다. 1층 옥신석 일변장(一邊長) 34㎝, 높이 32㎝, 우주너비 8㎝이고, 1층 옥개석 가로 63㎝, 세로 60㎝, 높이 28㎝이다. 2층 옥신석 일변장 30㎝, 높이 10.5㎝이고, 2층 옥개석 일변장 61㎝, 높이 22㎝이다. 3층 옥신석 일변장 28㎝, 높이 5㎝이고, 3층 옥개석 일변장 50㎝, 높이 23㎝이다.


♣ 의의와 평가

쌍정리 삼층석탑은 1층 탑신석이 높은데 비하여 2층, 3층 탑신석은 급격히 낮아지는 형태를 띠고 있다. 이는 고려시대 때 지방에서 조성한 삼층석탑으로,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의 불교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미타사 석조여래좌상>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미타사에 있는 고려 후기의 아미타불좌상.

♣ 형태

미타사 석조여래좌상은 화강암으로 아미타상을 조각한 불상으로 미타사 삼성각에 봉안되어 있는 석불이다. 불상의 머리와 양손은 파손된 것을 시멘트로 보수한 것으로, 매우 조잡하다. 졸속하게 보수를 하였지만 양팔의 형태로 보아 불상이 결한 수인(手印)은 아미타 수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등 뒤까지 표현하였으며, 의문(儀文)은 매우 두꺼운데, 대체로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 특징

상체는 꼿꼿하여 매우 당당한 인상을 주지만 하체부의 조각은 매우 약식화되어 균형미를 상실하였다. 결실된 머리와 양손을 감안하더라도 불상은 전체적으로 균형미를 상실하고 있다. 불상의 크기는 전체 높이 96㎝, 머리 높이 30㎝, 어깨 폭 40㎝, 무릎 너비 56㎝, 무릎 높이 13㎝이다.


♣ 의의와 평가

미타사 중창을 계기를 만든 석조아미타불 좌상으로서,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대경사 삼층석탑>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대경사(大京寺)에 있는 고려 전기 삼층석탑.

 


♣ 건립경위

대경사 삼층석탑은 음성향교 앞 묘정사 부근에 있었는데, 누군가가 자기 집으로 옮겨놓았다가 6·25전쟁 때 파괴되었다고 한다. 방치되었던 탑을 50여 년 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와 복원하였다.


♣ 형태

전체적으로 원형이 매우 훼손된 상태이다. 1매의 지대석 위에 기단석을 올려놓고 그 위에 바로 1층 탑신을 얹었다. 탑신부에는 1, 2층 탑신석과 1, 2, 3층 옥개석(屋蓋石)이 있다. 기단석과 탑신석에는 우주(隅柱)가 모각되었다. 3층 탑신석은 결실되었으며 대부분의 옥개석은 크게 훼손되었다.


♣ 현황

대경사는 한국불교태고종 사찰이다. 1960년경 민가를 개조하여 불상을 안치하고 창건하였다. 삼층석탑은 대경사 경내 앞마당에 있다.


♣ 의의와 평가

대경사 삼층석탑은 음성 읍내리 사지와 관련된 석탑으로 추정되며, 현재 이 석탑의 상륜부에 올려진 부재는 읍내리 사지의 오층모전석탑의 상륜부가 아닐까 추정되고 있다.

 

 

<백운사 부도>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의 백운사 옛 절터에 있는 고려 전기의 부도.


♣ 개설

백운사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절터에 있는 ‘백운사사적비’가 1692년(숙종 18)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때 화재로 폐사된 이후 17세기에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흙 속에 매몰된 부도는 어느 때, 누가 만든 것인지 전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부도의 양식으로 보아 임진왜란 전인 조선 초기에 백운사에 있던 스님의 승탑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 위치

백운사 부도는 폐사된 백운사지에 있는데, 백운사지는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 서원말의 북쪽에 있는 백운산(해발 345m) 남쪽 계곡의 산길을 따라 1㎞ 정도 올라간 곳에 있다. 이곳에는 3단의 석축이 남아 있어 백운사의 절터였음을 알 수 있다. 백운사 부도는 백운사지에서 서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골짜기에 매몰되어 있다.


♣ 형태

백운사 부도는 석종형(石鍾形) 부도로, 3기가 모두 매몰되어 기울어진 형태로 상단부의 일부만 노출되어 있다. 부도의 명칭이나 주인공을 알 수 없으므로 동쪽으로부터 제 1, 2, 3호 부도로 구분한다. 제1호 부도는 앞쪽으로 쓰러진 채 매몰되어 탑신부(塔身部)의 상단부와 보주부(寶珠部)만이 일부 노출되어 있어 전체의 형태와 규모는 알 수 없으나, 대략 어깨가 밋밋한 독 모양으로 탑신부의 지름이 85㎝, 보주높이 38㎝, 보주 지름 38㎝이다.


제2호 부도는 깊게 매몰되지 않아 흙을 약간 걷어내자 하단부에서 상단부까지 드러났다. 전체적으로 제1호 부도와 형태와 규모가 비슷하다. 크기는 높이 182㎝. 보주지름 83㎝, 보주높이 39㎝이다. 제3호 부도는 매몰되어 전체 높이를 알 수 없으며 상단부의 일부가 파손되었다. 어깨 부분과 보주 사이에 연주문대(連珠文帶)를 장식하였다. 크기는 대략 지름 62㎝, 보주지름 32㎝, 보주높이 23㎝이다.


♣ 의의와 평가

백운사 부도는 백운사가 조선시대의 큰 가람이었다는 것을 짐작케 해주는 증거 자료가 된다.


<장충범 충신문>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삼생리에 있는 조선 중기 장충범의 충신문.


♣ 개설

본관이 단양(丹陽)인 장충범(張忠範 ?~1597)은 임진왜란 때 군자감주부로 충주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부상당하여 향리인 삼생리에 와서 피신하며 치료하였다. 1597년(선조 30) 동지를 규합, 창의하여 삼생리의 구진터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1605년(선조 38)에 선무원종공신녹권을 하사받고, 1857년(철종 8) 충신의 정문이 내려지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생극면 생리에는 1971년에 세워진 ‘임난공신장충범장군기념비’가 있고, 원남면 삼용리에는 ‘장충범신도비’가 있다.


♣ 위치

음성읍 소재지에서 금왕 쪽으로 가는 국도 37호선 도로의 좌측편 지방도 22번을 따라 20분쯤 가는 거리에 위치해 있다.


♣ 형태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양옆에 풍벽을 달았고 사면은 홍살로 막았다. 편액(懸板)에는 '충신증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행통정대부군자감주부장충범지문상지즉위팔년정사이월일명정(忠臣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行通政大夫軍資監主簿張忠範之門上之卽位八年丁巳二月日命旌)'이라 되어 있다.


♣ 현황

음성군청에서는 장충범 충신문과 함께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삼용리 산15에 있는 장충범 신도비를 2006년 11월 14일자로 음성군 지정문화재로 일괄지정하여 단양장씨 종중에서 관리하도록 하고 있다.

 

 

<장석영 효자문>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삼생리에 있는 조선 말기 장석영의 효자문.


♣ 개설

본관이 단양(丹陽)인 장석영(張錫永)은 충신 장충범의 후손으로, 어렸을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기로 근동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어느 해 아버지가 병이 나자 변을 맛보면서 간호를 하고, 어머니가 병이 났을 때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 안으로 흘려 넣어 낫게 하였다.


이윽고 부모가 죽어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는데, 늙은 호랑이가 밤마다 나타나 옆을 지켜 주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1889년(고종 26) 조봉대부 동몽교관에 증직되면서 정려를 받았다. 장석영 효자문에는 청주이씨열녀문’과 ‘장수황씨효부문’ 현판이 함께 걸려 있다.


♣ 위치

음성읍 용산리의 음성관광호텔에서 맞은편 군도 24번을 따라 20분쯤 가면 위치해 있다.


♣ 형태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사면은 홍살로 막았다. 편액에는 '효자증동몽교관조봉대부단양장석영지문상지즉위이십구년임진육월명정(孝子贈童蒙敎官朝奉大夫丹陽張錫永之門上之卽位二十九年壬辰六月命旌)'이라 되어 있다.

 

 

<장택한 처 장수황씨>

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열녀.


♣ 가계

본관은 장수. 남편은 장택한(張宅漢)이고, 아들은 장석영(張錫永)이다.


♣ 활동사항

시부모 봉양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시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마을 뒤에 있던 샘터에서 매일 샘물로 목욕재계하고 3개월 동안 치성을 드리니 시아버지의 병이 완쾌되었다.


♣ 상훈과 추모

1856년(철종 7)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 만동묘(萬東廟)에 효부로 표창되었다. 1858년(철종 9) 8월 임금이 인릉(仁陵)에 행행(幸行)할 때 이를 알리자,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장수황씨 효부문(長水黃氏孝婦門)은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삼생리에 장석영 효자문(張錫永孝子門), 장동엽(張東曄) 처 청주이씨(淸州李氏) 정문과 같이 있다. 내용은 '효부단양장택한처장수황씨지문상지즉위십일년경신정월일명정(孝婦丹陽張宅漢妻長水黃氏之門上之卽位十一年庚申正月日命旌)'이다.

 

 

<장동엽 처 청주이씨>

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 가계

본관은 청주. 아버지는 이정주(李鼎周)이고, 남편은 장석영(張錫永)의 손자인 장동엽(張東曄)이다.


♣ 활동사항

청주에 거주하는 시부모에게 효성이 극진하였다. 26세 때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세수하지 않고 의복도 갈아입지 않았으며, 머리도 빗지 않고 음식은 죽만 먹었다. 삼년상이 끝난 후 세수하고 의복을 재개하고 머리를 빗고, 밥을 지어 먹은 후 단정히 앉아 자결하였다.


♣ 상훈과 추모

1892년(고종 29) 열녀문을 세우도록 하였다. 정문은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삼생리에 장석영 효자문(張錫永孝子門), 장수황씨 효부문(長水黃氏孝婦門)과 같이 있다. 내용은 '열녀단양장동엽처청주이씨지문상지즉위이십구년임진육월일명정(烈女丹陽張東曄妻淸州李氏之門上之卽位二十九年壬辰六月日命旌)'이다.

 

 

<이경립 처 순흥안씨 열녀각>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평곡리 약현마을에 있는 조선 후기 이경립의 처 순흥안씨의 정절을 기리는 열녀각.


♣ 위치

충청북도 음성읍에서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쪽으로 약 1㎞쯤 떨어진 충청북도 음성읍 평곡리 약물재마을 북쪽에 수정산이 있는데, 이 수정산 입구에 열녀각이 있다.


♣ 변천

순흥안씨는 성균진사 이경립의 처이다. 이경립이 천연두에 걸려 병석에 눕게 되자 정성껏 수발을 다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2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과부가 되었으나 태기가 있어 남편을 따라가지 못하고 5개월 만에 유복자를 낳았다. 시부모를 섬기며 남편의 3년 탈상을 마치고 남편을 따라가기 위해 자결하였다.


그 후 숙종 때에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왕명에 의해 열녀 정려가 세워졌고, 비각에 비석이 세워졌다. 두 사람의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산척면 송강리에 있으며, 유복자였던 이상현(李尙賢)은 학문에 정진하여 후에 공조참의가 되어 널리 덕망을 떨쳤다고 한다.


♣ 형태

순흥안씨 열녀각은 정면, 측면 각 1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양옆에 풍벽(風壁)을 달고 사면은 홍살로 막았다. 열녀문에는 현판이 아닌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성균진사경주이경립처순흥안씨열녀지문(成均進士慶州李敬立妻順興安氏烈女之門)'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현황

지금의 비각은 1930년 3월 개축하여 이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도장사>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도청리에 있는 초계정씨의 중시조를 봉안한 사우.

 


♣ 개설

도장사에는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 죽계(竹溪) 정창(鄭昌), 우헌(愚軒) 정덕기(鄭德麒), 정국주(鄭國柱), 정국추(鄭國樞), 정국량(鄭國樑), 정국로(鄭國櫓), 정국빈(鄭國彬) 등 여덟 사람을 봉안하고 있으며 매년 3월 중정(中丁)과 9월 중정(中丁)에 제사하고 있다.


♣ 변천

도장사는 조선 숙종조에 창건되었으나 대원군 때 철폐되었다가 1965년 후손과 지방 유림들이 다시 세웠다. 1975년 중수하였다.


♣ 형태

정면 3칸, 측면 2칸, 약 70㎡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 기와집이다. 솟을삼문이 세워져 있으며 사우 전면에 도장사(道莊祠)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전체 면적은 약 800㎡이다.

 

 

<도원사>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도청1리에 있는 초계정씨의 사우.

 


♣ 개설

도원사는 초계정씨(草溪鄭氏)의 사우(祠宇)로, 초계정씨는 정배걸(鄭倍傑)을 시조로 하고 있다. 정배걸은 초계성산에 정착해 살았으나 그 선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정배걸은 1017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문종 때 예부상서, 중추원부사를 지냈다. 홍문광학추성찬화공신(弘文廣學推誠贊化功臣)으로 문하시중상주국광유후(門下侍中上柱國光儒侯)에 이르고 초계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초계를 본관으로 삼았다. 정배걸의 16대손 청양현감 정중원(鄭仲元)이 경기도 안성에 살다가 중종 때 음성군 금왕읍 도청리 서당골로 옮겨오면서 대대로 살게 되었다.


♣ 형태

북향으로 자리 잡았으며 건물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 기와집이다. 앞의 1칸은 툇간이다. 사우의 둘레는 화강석 돌담이 둘러쳐 있고, 전면에 솟을삼문이 세워져 있다. 삼문에 ‘도원사(道原祠)’라는 편액이 달려 있다.


♣ 현황

충청북도 음성군 향토문화재로 초계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상모각>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도청리에 있는 정규영·정인상 부자와 현풍곽씨의 효열비를 보관한 비각.

 

 

♣ 변천

1969년 성균관 유림에서 추천하여 1970년과 1978년에 세워졌다.


♣ 형태

비각은 전면 1칸 반, 측면 1칸,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 기와집으로 전후좌우 네 개 면을 홍살로 막았다. 둘레에는 적색 벽돌담을 쌓고 앞면에 철제 대문이 세워져 있다. 비각의 앞 처마에는 한자로 ‘상모각(常慕閣)’이라 쓴 편액이 달려 있다.


비각 안에는 효자, 효부비 등 3개가 있는데 한가운데에는 1970년 정용환이 찬(撰)하고 이우섭이 쓴 ‘효자일옥처사정공지비(孝子一玉處士鄭公之碑)’, 왼쪽에는 1978년에 박성수가 찬하고 조수형이 쓴 ‘효자위은거사정공기적비(孝子渭隱居士鄭公紀蹟碑)’, 오른쪽에는 ‘효부유인현풍곽씨기적비(孝婦孺人玄風郭氏紀蹟碑)’가 있다.


♣ 현황

충청북도 음성군향토문화재이다.

 

 

<경모재>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사창1리에 있는 여흥민씨(驪興閔氏)의 재실(齋室).

 

 


♣ 형태

경모재는 담장을 콘크리트로 둘렀고, 솟을대문 좌우에는 2칸씩 행랑을 달았다. 입구에는 1979년 민영규(閔泳奎)가 쓴 ‘황려문(黃驪門)’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집 양식의 재실이 있다. 앞의 1칸은 툇간으로 ‘경모재’란 편액을 달았다.


♣ 현황

재실 뒤에는 민영모(閔令謨)의 단묘가 있다.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고, 앞쪽에 솟을삼문을 세웠다. 단묘 앞에는 ‘고려금자광록대부문하시랑평장사시문경공영모지묘단비(高麗金紫光祿大夫門下侍郞平章事諡文景閔公令謨之墓壇碑)’가 있다.

 

 

<충정사>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 조인옥(趙仁沃)의 사우.


♣ 개설

조인옥은 본관이 한양이며, 자가 군계(君啓)로, 판도판서(版圖判書) 조돈의 아들이다. 1373년(공민왕 22)에 음보(蔭補)로 산원(散員)이 되었고, 1387년(우왕 13)에는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를 거쳐 이듬해 이성계의 휘하에서 종군하였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구세력 숙청에 가담하였다.


정도전 등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되었고 개국공신 1등에 올랐다. 1395년(태조 4)에는 한성군(漢城君)에 봉해졌고, 이듬해 정조겸성절사(正朝兼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후에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정공(忠靖公)이다.


♣ 형태

충정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이고,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앞의 1칸은 툇간이다. 정면에 '부조묘(不祧廟)'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둘레에는 돌담장을 쌓고 앞에는 솟을삼문을 세웠다.

 

 

<조유안 효자문>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에 있는 조선 중기 조유안의 효자문.


♣ 개설

조유안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극진하게 모셔 근동에서는 하늘이 내린 효자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어느 해 아버지가 병이 나자 향을 피우고 하늘에 아버지 대신 죽기를 빌면서, 아버지의 변을 손에 받아 맛을 보면서 병을 간호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이 차도를 보이지 않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여서 소생시켰다. 그러던 어느 해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90세 되는 할머니를 모시고 산중으로 피난가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가례대로 행동하였다.


그 뒤로도 조유안은 옛 성현의 글을 벽에 걸고 매일 반성하며 성현의 말대로 수행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러한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효도와 학행으로 장계되어 나라에서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증직하고 효자 정려를 내렸는데, 효자정문은 1724년(경종 4)에 세워졌다.


♣ 형태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편액에는 '효자증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관한원군조유안지문숭정기원후무진지후구십칠년갑진오월일명정(孝子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管漢原君趙惟顔之門崇禎紀元後戊辰之後九十七年甲辰五月日命旌)'이라 되어 있다.

 

 

<민동량 효자각>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신평리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 민동량의 정려각.


♣ 개설

민동량은 본관은 여흥, 자는 군삼, 호는 송암이다. 1806년(순조 6)에 정려와 복호(復戶)가 내려졌다. 7, 8세 때부터 부모가 병이 나면 곁을 떠나지 않고 보살폈으며 좋은 약이라면 가리지 않고 구하여 썼다. 부모가 아프자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피를 내어 먹이려고 왼손 네 손가락을 잘랐으며, 대변을 살펴 병세를 짐작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부모가 세상을 뜨자 3년 동안 시묘를 하였다.


♣ 형태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다. 처마 끝에 처마 서까래와 처마 서까래의 끝에 덧얹는 네모지고 짧은 서까래인 부연(附椽)을 걸어 꾸몄다. 처마 끝 서까래가 2단으로 되어 있는 겹처마 맞배지붕 목조 기와집이다. 단청이 잘 되어 있으며 효자각 주위로 울타리가 만들어져 있다. '효자증통훈대부호조좌랑민동량지문상지육년병인삼월일명정(孝子贈通訓大夫戶曹佐郞閔東亮之門上之六年丙寅三月日命旌)'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민휘계·민정현 효자각>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신평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효자 민휘계와 민정현의 정려문.


♣ 개설

민휘계·민정현 효자각은 민씨 가문의 두 효자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문이다. 민휘계는 가난하였으나 글을 좋아하고 주경야독을 했다. 학행(學行)이 좋고 부모에 효심이 지극했다. 1808년(순조 8)에 감영(監營)에서 상계(上啓)하자 왕이 특명을 내려 민휘계의 행적을 간행토록 하였다. 이 책의 이름은 『존주록(尊周錄)』이다.


민정현은 유아기 때부터 부친이 병에 걸리면 하늘에 기도하며 쾌유를 빌었고, 변을 맛보는 등 정성을 다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부친이 엄동설한에 생선을 먹고 싶다고 하자, 생선을 구하려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우연히 생선을 열 마리나 준 사람의 덕으로 부친의 병환을 낫게 하였다. 민정현의 효행이 특출 나자 1812년 겨울, 향당동지인(鄕黨同知人) 400여 명이 모여 활효(活孝)를 보고하여 수령 방백이 연명으로 민정현의 행적을 상신하였다.


♣ 형태

맛배지붕의 목조와가로, 단청이 곱고 아담하게 단장되어 있다. 민휘계와 5대손인 민정현의 정려로, 현액만 다르다. 정려의 오른쪽 칸에는 민휘계의 효자 편액을 걸었고, 왼쪽에는 민정현의 편액이 걸려 있다.


민휘계의 편액에는 ‘효자순조칠년무진증조봉대부동몽교관여흥민공휘계명정(孝子純組七年戊辰贈朝奉大夫童蒙敎官驪興閔公徽繼命旌)’이라 적혀 있고, 민정현의 편액에는 ‘표정학생여흥민공정현효자지문수정기원후육년정해이월(表旌學生驪興閔公鼎顯孝子之門崇禎紀元後六年丁亥二月)’이라고 쓰여 있다.

 

 

<이광하 효자각>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행제리에 있는 조선 후기 이광하의 효자각.


♣ 개설

본관이 우봉(牛峰)인 이광하(李光夏)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느 해, 한겨울에 아버지가 잉어를 먹고 싶다고 하자 얼음을 깨고 잉어를 구하여고 애를 쓰는데, 갑자기 처음 보는 사람이 와서 한 자가 넘는 잉어를 주고 갔다.


또 어느 해인가는, 어머니가 꿩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여 꿩을 잡으려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갔으나 잡지 못하였다. 낙담하여 울면서 산 속을 헤매는데, 웬 개 한 마리가 꿩을 물고 와서는 놓고 갔다. 그러한 일들이 알려지면서 1872년 이조참의에 증직되고 정려가 내려졌다.


♣ 형태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다포식 목조기와집으로, 주변은 홍살로 둘렀다. 정려 안에 걸려 있는 편액에는 '효자증통정대부이조참의이광하지문상지삼십년칠월일명정(孝子贈通政大夫吏曹參議李光夏之門上之三十年七月日命旌)'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편액 밑에는 이면하(李免夏)가 제(題)하고 정운한(鄭雲翰)이 기(記)한 「정려중건기(旌閭重建記)」가 걸려 있다.

 

 

<영모사>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충도리에 있는 순창조씨(淳昌趙氏) 문중의 사당.


♣ 개설

사당은 문중 조상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공간으로, 순창조씨 문중에서 81위의 선조를 모시기 위해 1989년에 세웠다.


♣ 위치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에서 516번 도로를 따라 소이면 쪽으로 가다 보면 음성천과 석인교라는 다리가 나온다. 석인교 100m 못 미쳐 좌측 충도리 마을로 들어가면 충도1리 중간에 영모각이 있다.


♣ 형태

영모사는 현대식 한옥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사당 둘레에 콘크리트 블록 담장이 쳐져 있다. 사당의 출입문은 4단의 층계 위에 세워진 솟을삼문으로, 삼문의 가운데에는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다. 사당 안은 약 100평이 넘는데, 중앙에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중앙 상단에 ‘영모사(永慕祠)’라는 현판이 달려 있으며, 한옥식으로 문틀을 짜 넣었다. 삼문 앞 좌측에는 1989년에 세운 방형오석의 비가 있는데 '통훈대부군자감정판(通訓大夫軍資監正坂)'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 의의와 평가

충청북도 음성군 지역에는 문중을 모시는 사당, 재실 등이 특히 많은데 영모사도 그 중의 하나이다.

 

 

<조용하 부부 효열각>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충도리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 조용하와 열녀 평택임씨의 효열각.


♣ 개설

본관이 순창인 조용하와 처 평택임씨는 아버지가 병환으로 의식이 불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의식을 돌아오게 하였다. 그후 언젠가는 조용하가 병이 들어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자 부인 임씨가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어 병을 낫게 하였다. 이와 같은 효행과 효열이 세상에 알려지자 고종 때 조용하에게는 사헌부지평의 벼슬이 내리면서 부인 임씨와 함께 효자·열녀의 쌍정문까지 하사되었다.


그후 평택임씨가 세상을 뜬 뒤로 주위의 유생과 인근의 칭송이 세상에 알려져서 고종 때 나라에서 다시 효부의 정려를 내리므로, 이전에 받은 정려까지를 포함하는 의미로 효열쌍정문이라고도 부른다.


♣ 형태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정문 안에는 '효자통훈대부사헌부지평조용하지문열녀증숙부인조용하처평택임씨지문상지이십오년무자정월일명정정축팔월일중수(孝子通訓大夫司憲府持平趙用夏之門烈女贈淑夫人趙用夏妻平澤林氏之門 上之二十五年戊子正月日命旌丁丑八月日重修)'라고 편액되어 있다.

 

 

<신유 효자문>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대장리에 있는 조선 후기 신유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각.

 

♣ 개설

조선은 유교를 국교시하였기에 효(孝)와 충(忠)과 열(烈)을 중히 여겨 정려를 특히 많이 세웠다. 신유의 효자각도 근방의 사람들을 교화하는 차원에서 신유가 살던 마을에 세운 것이다.


♣ 위치

신유의 효자각은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대장리의 남쪽 끝부분에 위치하는데, 이곳은 충북선 소이역의 앞쪽이며 한라중공업의 뒤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 변천

신유는 효자로 자는 이장(而張), 본관은 평산(平山)으로 신상민(申尙閔)의 아들이다. 신유는 아버지가 병환이 들자 낚시를 하여 아버지를 봉양하였으며 산과 들을 다니면 약초를 캐어 약을 달여 드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어머니가 병환이 나자 그 형제가 부친 병환 때와 같이 정성을 다하여 병구완을 하였고 어머니 병이 위독하여 사경을 헤맬 때 손가락을 잘라 주혈하여 회생 연명하였다. 순영(巡營)에서 효행을 장계하니 임금이 듣고 1752년(영조 28)에 정려를 내렸다.


♣ 형태

신유 효자문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며 사면은 홍살로 막았다. 효자각 안의 상단에 걸려 있는 편액에는 '효자증자헌대부공조판서겸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신유지문상지이십팔년임신정월일(孝子贈資憲大夫工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申維之門上之二十八年壬申正月日)'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효자각의 사방을 벽돌 담장으로 막고 가운데 철문을 세워 보호하고 있으며, 문 왼쪽에는 효행을 기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 현황

신유의 효자각은 1752년에 내린 편액이 잘 갖추어져 있으며, 최근에 정비를 하여 문중에서 잘 관리하고 있다.

 

 

<이식후·이진도 쌍효자각>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후미리에 있는 조선 말기 이식후·이진도 부자의 효자각.


♣ 개설

이식후는 서당 훈장으로 노부모의 봉양에 정성을 다하였다. 부모가 병이 나면 하늘에 대신 죽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변을 손으로 받아 병의 증세를 살폈으며, 손가락을 끊어 피를 마시게 하여 소생시키기도 하였다. 이진도는 평소 아버지가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는 것을 지켜보며 자랐으며 효성이 남달랐다.


한번은 아버지 병환에 홍시 감이 좋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여름철이라 홍시 감을 구할 수 없자 감나무를 찾아 헤매다가 깊은 산 속에서 호랑이를 만났다. 이때 호랑이가 등에 타라는 시늉을 하여 올라타자 달리기 시작하더니 경상도 태백산 속 외딴집에 내려놓고 가버렸다.


그 날은 그 집의 어머니 제삿날이었다. 이에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홍시를 구해가지고 나와 다시 호랑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에게 홍시를 드렸다. 홍시를 먹은 아버지는 회생하였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런 효행이 알려져 1892년(고종 29) 증직과 함께 정려가 내려졌다.


♣ 형태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이식후·이진도 부자의 효자각이 합설되어 있다.


♣ 현황

효자각에는 각각 '효자증조봉대부동몽교관이식후지문상지이십구년시월일명정(孝子 贈朝奉大夫童蒙敎官李植垕之門上之二十九年十月日命旌)', '효자증조봉대부동몽교관이진도지문상지이십구년시월일명정(孝子贈朝奉大夫童蒙敎官李鎭道之門上之二十九年十月日命旌)'이라 편액되어 있다. 콘크리트로 기와를 올렸으며 심하게 훼손되어 붕괴될 위험이 있다.

 

 

<희암재>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하노리의 안가마골에 있는 무송윤씨의 재실.


♣ 개설

원남면 하노리에 무송윤씨(茂松尹氏)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3백여 년 전이다. 당시 무송윤씨의 시조인 윤양비(尹良庇)의 14대손 윤청(尹暒)이 현종(顯宗) 때 경상북도 상주에서 살다가 원남면 하노리 능촌에 세거한 것이 처음이다. 희암재(希庵齋)는 1965년에 세운 것으로, 희암(希庵)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윤진(尹瑱)[1541~1612]의 호이다.


♣ 형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벽체는 시멘트벽돌로 만들었으며, 지붕은 동기와를 올렸다. 재실 주변은 돌담장을 둘렀는데, 솟을삼문에 ‘희암재(希庵齋)’라는 현판을 달았다.

 

 

<숭덕사>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마송리에 있는 청주고씨(淸州高氏)의 사우.


♣ 개설

사우는 문중 조상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한 공간으로 보통 위패를 모실 수 있도록 건축된다. 숭덕사는 1986년 청주고씨 문중에서 제사를 위해 마련한 사우이다.


♣ 위치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국도 36호선를 따라 충청북도 청주시 방면으로 가다가 한금령휴게소를 지나 2㎞쯤 내려가면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마송리에 이른다. 마송리 장승에 이르기 전 왼쪽으로 난 길로 들어서면 새마을회관이 있고 법화사가 보이는데, 바로 절 앞쪽에 숭덕사가 있다.


♣ 형태

숭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반의 건물로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전면의 1간은 툇간이며 중앙에 ‘숭덕사(崇德祠)’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건물은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앞쪽에 솟을대문을 설치하였다. 전면에만 콘크리트 담장을 둘렀고 나머지는 철망으로 둘렀다.


숭덕사의 대문 앞 좌측에는 1986년에 이재천이 찬하고 고제은이 서하여 세운 '상당후인고제원부인곡산연씨효열비(上黨后人高濟元夫人谷山延氏孝烈碑)'가 있다. 또 사우 뒤편에는 고원희가 1940년에 세운 법화사라는 절이 있다.

 

 

<고용진 효자문>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마송리에 있는 효자 고용진의 정려문.


♣ 형태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목조 기와집으로 전후좌우의 네 개 면은 홍살로 막고 지붕 양면은 풍벽을 달았다. 초석은 팔각고주형(八角高柱形)으로 그 위에 둥근 나무 기둥을 세웠다.


효자문 안에는 '설성거사하산고용진효자려포정효자문병오삼월일보건사회부장관오원선서(雪城居士霞山高庸鎭孝子閭褒旌孝子門丙午三月日保健社會部長官吳元善書)'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오른쪽에는 1966년 3월 음성군수 송홍식이 찬하고 일가인 고제영이 쓴 '설성거사하산고용진효행문(雪城居士霞山高庸鎭孝行文)'이 걸려 있다. 앞면 처마에는 한자로 ‘효자문(孝子門)’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 현황

충청북도 음성군 향토문화재로 청주고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충효정>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당리에 있는 조선 후기 양식의 정자.

 


♣ 위치

음성군 소재지에서 청주 쪽으로 가는 국도 36호선 도로를 따라 10분 정도 가면 우측편에 위치한다. 마을에서 보면 오른쪽 앞쪽의 들판 한가운데에 있는 조그만 언덕 위에 동서향으로 서 있다.


♣ 변천

충효정(忠孝亭)의 원래 이름은 피금정(披襟亭)으로, 약 3백 년 전에 세워진 정자이다. 피금정이란 더운 여름날 온몸에 땀이 흘러 정자에 오르면 시원한 바람으로 옷깃을 헤친다는 뜻이다. 피금정은 일제강점기인 1939년 하당초등학교 개교 후 해체되어 부족한 교실을 짓는 데 사용되었다. 그후 정자가 있던 자리는 빈 터로 남아 있다가 1990년 4월 18일 옛 양식을 재현하여 다시 세우고 충효정이라 개명하였다.


♣ 형태

충효정은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처마 깊이 90㎝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2층 누형식으로 된 목조 전각이다. 내부를 통문(通門)의 대청으로 꾸며 합판마루를 깔고 있고, 창호는 정면 2칸·측면 1칸을 모두 개방하여 수려한 경관을 바라볼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기둥의 간격은 정면과 측면을 모두 2.43m로 등간(等間)을 이루어 분할하고 있다. 높이 11㎝의 다듬돌 기단상에 25㎝ 높이의 원형의 주춧돌을 놓고 다시 그 위에 팔각형으로 다듬은 높이 91㎝의 주형주초석(柱形柱礎石)을 놓아 누(樓)를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주경(柱俓)이 27㎝인 원형주를 세우고 있다.


기둥 위의 공포는 무출목(無出目)의 일익공 계통의 가구수법을 보이고 있으나, 외부로 돌출된 이익공(二翼工)과 일익공(一翼工)의 우설(牛舌)이 주두(柱頭)와 맞물려 있어야 하는데 주두(柱頭) 밑의 기둥에 물려 있고, 대량(大樑)의 단부(端部)에 부착되어 있어야 될 봉두(鳳頭) 역시 주와 물려 있는 등 전체적으로 익공 양식에서 벗어난 형태로 결구되어 있다. 이는 확실한 고증 없이 1990년에 다시 지으면서 생긴 문제라고 본다.


가구(架構)는 전·후·평주(平柱) 위에 대량(大樑)이 결구되고 있는 형식으로, 대량 상부에 높이 18㎝의 동자주(童子柱)를 세워 종량(宗樑)을 받치도록 하고 있다. 또 종량(宗樑) 상부에는 높이 65㎝의 제형대공(梯形臺工)을 세워 옥개의 하중을 부담하고 있는 5량 집이다.

 

 

<육선재>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쌍정리에 있는 진주강씨 문중의 재실.

 


♣ 개설

육선재는 비교적 근래에 제향을 위해 지은 진주강씨(晋州姜氏) 문중의 재실이다.


♣ 형태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으로 앞 1칸은 툇간이다. 재실에는 '육선재(陸仙齋)'라고 판각한 편액을 걸었다. 중앙에 정문을 달고 '정효문(旌孝門)'이라는 편액을 달았으며, 외곽은 콘크리트 담장으로 둘렀다.

 

 

<송광도 효자문>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두성리에 있는 고려 말 조선 초 송광도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각.


♣ 개설

조선은 유교를 국교시하였기에 충(忠)과 효(孝)와 열(烈)을 만인의 덕목으로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이를 행하는 데 귀감이 되는 이를 뽑아 기리기 위해 동리마다 충신이나 효자·효부, 열녀를 기리는 비나 비각을 많이 건립하였다. 특히 충청북도 음성군 지역은 다른 문화재보다 유교기념물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 위치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에서 덕산 쪽으로 난 국도 21호선에서 왼쪽으로 갈라지는 지방도 515번을 따라 2㎞쯤 올라가면 두성리가 나타난다. 이 마을의 초입인 지방도 515번 왼쪽으로 송광도 효자각이 보인다.


♣ 변천

효자 송광도는 고려 공민왕 때 인물이다. 본관은 진천이며, 상산백 송인(宋仁)의 7대손 문하평리 송소(宋玿)의 아들이다. 벼슬은 정요낭장이었으나 고려가 망하자 벼슬보다는 효에 전념하였다. 송광도의 효행이 중국에까지 알려져 중국의 황제가 동방국의 지극한 효자라고 칭하였다.


나라에서 정려를 내려 충청북도 진천군 산정리 묘 아래에 있었으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소실되었다. 조선 말기에 후손들에 의해 현재의 장소로 이건하였고 근년에 단청 및 조경을 하고 추모비를 세웠다. 송광도의 처 허씨도 효부로 이름났는데, 83세의 시어머니를 지성으로 봉양하고, 병이 나자 변을 맛보며 증상을 살피고 단을 쌓고 기도하여 10년을 더 살았다고 한다.


♣ 형태

송광도 효자문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목조 맞배지붕의 와가로, 양옆에 풍벽(風壁)을 달았고 사면을 홍살로 막았다. 비각 안에는 편액을 달고 비석을 세웠다. 편액에는 '효자 비순위 정용랑장 송광도지문(孝子備巡衛正勇郞將宋匡度之門)'이라 새겨져 있고, 바닥에 있는 비석에는 '효자비순위정용랑장진천송공휘광도지문(孝子備巡衛正勇郞將鎭川宋公諱匡度之門)'이라고 음각하였다. 효자각 옆에 추모비가 있다.


♣ 현황

맞배지붕의 전형적인 효자각으로 근래에 비각이 수리되었다. 고려 말 조선 초에 세워진 효자각의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다.

 

 

<쌍충재>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있는 함종어씨(咸從魚氏)의 재실.


♣ 개설

사당, 사묘, 사우, 재실 등은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진 명칭으로 문중의 선조들에게 제를 지내기 위한 장소이다. 쌍충재는 어재연(魚在淵)·어재순(魚在淳) 형제의 충효를 기리기 위해 두 형제의 묘소 앞에 세웠다.


♣ 위치

쌍충재는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성본1리 최성미의 성본리 토성 안에 위치한다.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에서 대소면을 지나 삼성면으로 가는 국가지원 지방도 82번을 따라가다 보면 삼성휴게소 왼쪽으로 최성미 입구가 나온다. 이곳으로 500m쯤 들어가면 마을 초입에 토성이 있고 그 안에 쌍충재가 있다.


♣ 변천

1983년 함종어씨 문중에서 어재연·어재순 형제의 신도비와 더불어 재실을 세웠다.


♣ 형태

재실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와옥이다. 앞의 1칸은 툇간이고 양옆에 풍벽(風壁)을 달았으며, 재실 중앙의 처마 밑에는 ‘쌍충재(雙忠齋)’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재실의 방향은 서쪽이며, 재실 뒤에 어씨 형제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고 오른쪽 기슭에는 신도비가 있다.


♣ 의의와 평가

근래에 만든 건물이라 문화재적 가치는 없으나, 어씨 형제의 애국심이 반영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건물이다.

 

 

<성본리 숭모재>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성본1리에 있는 해주최씨(海州崔氏)의 재실.


♣ 위치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에서 대소면으로 가는 국도 52호선를 따라가다 보면 왼쪽으로 최성미 입구가 나온다. 이곳에서 1㎞쯤 들어가면 소탄 새마을회관이 보이는데 그 옆에 숭모재가 있다.


♣ 형태

정면 3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현대식 시멘트 청기와를 올렸다. 목조건물에 벽돌로 벽을 쌓았으며 주위에는 벽돌 담장을 둘렀다. 전면 처마에 ‘숭모재(崇慕齋)’라는 쓴 현판을 걸었다.


♣ 의의와 평가

최근에 지은 현대식 사묘로 청기와를 얹어 한옥의 모습을 갖추려 하였다. 조상을 숭모하는 후손들의 정성들이 집약된 재실로서 강학의 기능을 더한다면 가정교육의 산실이 될 가능성이 있다.

 

 

<정운영 효자각>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에 있는 조선 말기 정운영의 효자각.


♣ 개설

본관이 초계인 정운영은 일찍부터 공부를 많이 하여 학문이 깊었으나 과거를 보아 출사를 하게 되면 부모님을 봉양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오직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하여 과거를 보지 않았다. 어느 해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정성껏 간호하였으나 낫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잉어가 특효약이라는 말을 들었으나 겨울이라 잉어를 쉽게 구할 수 없었다.


이에 정운영은 장호원 청미천에 가서 얼음을 깨고 3일간 밤낮으로 애를 써서 끝내 잉어를 잡았다. 그리하여 푹 고와 아버지께 드리니 병이 깨끗이 치유되었다. 그후로도 정운영은 부모님이 병이 들면 변을 맛보아 가며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후에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3년간을 시묘하며 애통해하였는데, 이런 사실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1903년(고종 40) 효자 정려가 내려졌다.


♣ 형태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사면은 홍살로 막았으며, 양옆에 풍벽을 설치하였다. 편액은 '효자학생정운영지문숭정기원후사계묘명정(孝子學生鄭雲永之門崇禎紀元後四癸卯命旌)'이라 되어 있다.

 

 

<권국화 효자문>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에 있는 조선 말기 효자 권국화의 정려문.


♣ 개설

권국화에 대한 기록으로는 『순조실록(純祖實錄)』에 1831년(순조 31) “유생이 임금에게 글을 올려 증직되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 “무신년(1728) 당시 집에 역도가 난입하자 가로막으며 ‘차라리 내가 죽을지언정 어머니에게는 해를 끼치게 할 수 없다’라고 소리치니 물러났다. 글 읽기를 좋아하여 예학에 힘썼다. 이웃에 사는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불손하였는데, 그것을 보고 느낀 바가 있어 마음을 고쳐먹었으며, 여종은 시아버지가 아들 없이 죽자 늙은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재가하지 않았다”라고 실려 있다.


『순조실록』,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1831년의 권국화와 정려문 현판에 판각된 1899년 인물이 동일 인물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 형태

효자문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 기와집이다. 전후좌우 네 개 면은 홍살로 막았고, 앞면의 창방 위에 나무로 만든 용을 장식하였다. 효자문 안쪽에는 '효자증조봉대부동몽교관권국화지문성상기해오월일명정(孝子贈朝奉大夫童蒙敎官權國華之門聖上己亥五月日命旌)'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 현황

충청북도 음성군 향토문화재로 안동권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도통사>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산7번지에 있는 3성(공자, 주자와 안향) 및 9현을 봉안한 사우.


♣ 개설

공자, 주자, 안향을 비롯하여 국재(菊齋) 권부(權溥), 역동(易東) 우탁(禹倬), 동암(東庵) 이진(李瑱), 이재(彛齋) 백이정(白頤正), 매운당(梅雲堂) 이조년(李兆年), 덕재(德齋) 신천(辛蕆), 노당(露堂) 추적(秋適), 근재(謹齋) 안축(安軸), 경재(敬齋) 안보(安輔) 등의 위패를 봉안한 사우이다. 지금은 공자를 주 위패로 주자와 안향 및 9현을 봉안하고 있다.


♣ 변천

최초의 도통사는 1734년(영조 10)에 충주 지방 유림들이 충주시 신니면 화안리에 세웠다. 일제강점기 때인 1928년 사우를 중수하며 독립 정신을 함양하는 집합 장소가 사용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출입이 금지되고 1938년에는 사우가 강제로 철거되었다.


1954년 도에서 보조를 하여 사우를 복원하고 향사하기도 하였으나 군사 기지로 정해지면서 철거되었다가 1995년 도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현 위치에 복원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음성군 유림회와 충주유림회에서 위패를 보관하였다가 청주시 탑동에 사는 안찬이 보관하게 된다. 그러나 도통사는 2000년 10월 안찬으로부터 위패를 인수받고, 매년 음력 9월 10일 오전 11시에 고유제를 봉행하고 있다


♣ 형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 기와집으로 솟을삼문을 세우고 담이 둘러져 있다.


♣ 현황

2013년 현재 문화재로는 지정되어 있지 않고 도통사관리위원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문충공 부조묘>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 권근을 봉안한 사묘.

 


♣ 개설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 1352~1409)은 본관은 안동, 초명은 진(晉), 자는 가원(可遠)·사숙(思叔), 호는 양촌(陽村)이다. 고려 말엽의 정승 권박의 증손이며 검교정승 권희의 아들이다. 1409년(태종 9)에 58세로 별세하자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지은 책으로 『입학도설(入學圖說)』, 『양촌집(陽村集)』, 『사서오경구결(四書五經口訣)』,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 『동현사략(東賢事略)』 등이 있다.


♣ 변천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에 있던 권근의 묘소를 1440년(세종 22)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로 이장하면서 문충공 부조묘를 세웠다.


♣ 형태

정면 3칸, 측면 3칸 반으로 겹처마 맞배지붕 초익공계의 목조 기와집이다. 앞의 1칸은 툇간이다. 둘레에는 담이 둘러 있고, 앞에는 평삼문이 세워져 있다. 부조묘에는 ‘문충공부조묘(文忠公不祧廟)’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 현황

충청북도 음성군향토문화재이다.

 

 

<권준 묘비>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에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권준의 묘비.

 


♣ 개설

권준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오미(五美)로 양촌 권근의 4남이다. 1422년(세종 4)에 음보로 종묘서부승(宗廟署副丞)에 오른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453년(단종 1)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 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수충협찬정난공신에 오르고 안천군에 봉해졌다. 1457년(세조 3) 정헌대부(正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올랐다.


♣ 형태

대석을 제외한 비신과 상단 장식이 화강암 1매로 이루어졌다. 전체 높이 145㎝, 비신 높이 90㎝, 너비 56㎝이다. 상단에는 앞뒤 7개의 연꽃닢과 연닢을 3단으로 장식하였고, 꼭대기에 보주(寶珠)를 장식하였다. 앞면, 뒷면 모두 해서로 각자하였다.


♣ 금석문

묘비의 앞면 상단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이라 적혀 있고, 종서로 '수충협찬정난공신정헌대부호조판서안천군증시안숙공권준지묘(輸忠恊贊靖難功臣正憲大夫戶曹判書安川君贈諡安肅公權蹲之墓)'라 하였다. 뒷면에는 “공은 안동권씨로 자는 오미(五美)인데 양촌 문충공 권근(權近)의 아들이다. 정도공 정역(鄭易)의 딸에게 장가 들었는데 아들 권혜(權惠)는 행현감이고 권념(權念)은 판관이다. 딸은 차례로 봉례 허삼(許蔘)·녹사 최한로(崔漢老)·녹사 신상조(辛尙調)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어리다. 1459년(세조 5) 11월 12일에 장례를 치뤘다(公安東人字五美陽村先生文忠公陽村近之子 娶貞度公鄭易之女 男惠行縣監 念判官 女奉禮許蔘 錄事崔漢老 錄事辛尙調 鶴林令頤 餘幼 天順己卯十一月十二日葬)”라고 쓰여 있다. 서쪽 면에는 “우공(右公)”, 동쪽 면에는 “좌부인(左夫人)”이라 적혀 있다.


♣ 현황

권준의 묘소는 권근 삼대묘소의 서쪽 능선에 있다. 가파른 능선에 540㎡의 터를 닦아 묘소를 조성하였다. 평면 보주형 봉분은 앞쪽에만 호석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묘비와 상석, 장명등, 문인석 1조를 갖추었다.


묘비 동쪽으로는 1994년 새로 세운 묘비가 있다. 앞면에는 '수충협찬정난공신정헌대부호조판서안천군시안숙공권공준지묘 영춘현부인해주정씨부(輸忠恊贊靖難功臣正憲大夫戶曹判書安川君諡安肅公權公蹲之墓 永春縣夫人海州鄭氏祔)'라 기록되었다. 묘소 입구에는 1991년에 새로 만들어 세운 신도비와 신도비각이 있다.


<안양공 부조묘>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에 있는 안양공 권반(權攀, 1405~1459)의 사우.

 


♣ 개설

부조묘는 사당·사우와 같이 문중의 선대 조상 가운데 중요하게 기억하거나 기릴 만한 분을 대수에 상관없이 영원히 제향하라는 의미에서 건립한다. 부조묘라기보다는 사당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 위치

권근 삼대묘가 있는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능안 초입에 위치하며, 안숙공 권준의 부조묘 왼쪽에 있다.


♣ 변천

권반 사당은 70여 년 전에 건립되었다고 하며 원래 문충공 권근의 사당이었다고 한다. 새로 지으면서 문충공의 위패를 옮기고, 경기도 성남시 금토동에 있던 권반의 위패를 모셔와 봉안하고 있다.


♣ 형태

계단을 올라 홑처마의 솟을삼문 문지방을 넘어서면 팔작지붕 홑처마의 부조묘가 위치한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건물로 전면에 반 칸의 툇간을 두고 있으며, 왼쪽은 임좌병향(壬坐丙向)이다. 전면에는 ‘安襄公不祧廟(안양공부조묘)’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사당의 배치는 솟을삼문과 사당, 일곽을 둘러싼 석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은 시멘트로 만든 48㎝ 정도의 기단 위에 전면에는 팔각초석을 놓고 측면과 후면에는 사각초석을 놓은 덤벙주초이다. 초석 위에 전면에는 지름 23㎝의 원형 기둥을 세우고 측면과 후면에는 15×18㎝의 방형기둥을 세웠다. 사당의 구조는 5량집에 바닥은 마루이고 연등 천정이었으나 내부를 수리하면서 벽과 천정에 반자를 대고 가림으로써 고풍스러움이 다소 사라졌다.


♣ 의의와 평가

권근의 사당으로 쓰이다가 권반의 위패를 모셔오면서 사당을 새로 고쳤다. 조선시대 명문가 부조묘의 전형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민해준 효자각>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에 있는 조선시대 민해준의 효자각.

 


♣ 개설

민해준이 어머니와 함께 밭에서 김을 매다가 소낙비를 만났다. 이때 비를 피하기 위하여 바위 밑으로 들어갔다 무너지려 하자 어머니를 밖으로 밀어내곤 자신은 바위에 깔려 죽음을 당하였다. 이 같은 민해준의 효행을 기려 훗날 유림과 동리에서 효자각을 세웠다.


♣ 형태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효자민해준지려(孝子閔海俊之閭)’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 현황

현재 민해준의 후손들은 알 수가 없다. 민해준이 소유하였던 토지 일부만이 남아 있는데, 이를 마을에서 공동 관리하면서 수익금으로 매년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

 

 

<김선경 처 성주이씨 열녀문>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차평리에 있는 조선 후기 김선경의 처 성주이씨의 정절을 기리는 열녀문.

 


♣ 위치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으로 가는 국도 33호선 변인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차평2리에서 오른쪽 양재 쪽으로 난 농로를 따라 300m쯤 가면 왼편으로 열녀각이 보인다.


♣ 변천

성주이씨는 인문관 이휘의 딸로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임곡리에서 출생하였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자감 판관으로 있던 김선경은 싸움터로 나가고 이씨 부인은 집에 남아 있었다. 충주에서 이긴 왜적이 충청북도 음성군 지역에 들어왔다. 피난을 가던 이씨 부인이 왜적과 마주쳤다. 왜적은 부인에게 덤벼들었다. 부인은 딸을 껴안고 짐승과 같이 덤비는 왜적에게 반항했으나 여자로서는 적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왜적들은 이씨를 끌어안고 손목을 잡고 젖을 만지는 등 희롱을 하였다.


이때 힘센 장사가 나타나 단숨에 왜적을 쳐부수니 왜적은 모두 달아났다. 이 젊은 장사는 당시 주부 벼슬을 지내던 하건민이라는 사람이었다. 이씨 부인은 하건민에게 백배사례하고 딸을 아내로 삼아 주기를 청하고 왜적의 손이 닿았던 젖과 손목을 칼로 잘라 버리고 자결하였다. 부인이 자결하자 오색영롱한 구름 같은 기운이 수일 간 감돌아 세상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다. 훗날 이 사실이 알려져 임금께서 정려를 내렸다.


♣ 형태

성주이씨 열녀문은 정면, 측면 각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사면은 홍살로 막고 양옆에 풍벽(風壁)을 달았다. 정려 현판에는 '절부증가선대부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관행봉직랑군자감판관김선경처증정부인성주이씨지문(節婦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總管行奉直郞軍資監判官金善慶妻贈貞夫人星州李氏之門)'이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성상즉위삼년을축사월이십일이건후사십팔년임오오월오일중수우오십사년후을사사월이십구일이건우차평리통산전구묘(聖上卽位三年乙丑四月二十日異建後四十八年壬午五月五日重修又五十四年後乙巳四月二十九日移建又車平里通山前舊卯)'라고 기록되어 있다.


♣ 현황

임진왜란 때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 성주이씨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로 최근에 재건하였다.

 

 

<정국량 효자각>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에 있는 조선 중기 정국량의 효자각.

 


♣ 개설

본관이 초계(草溪)인 정국량에게는 정국주, 정국추, 정국노, 정국빈 등의 형제가 있었다. 모두 효성이 뛰어나 마을 사람들은 이들을 오효자라고 불렸으나 그중 정국량의 효성이 단연 돋보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 정국량의 부친이 오랜 질병 끝에 돌아가셨는데, 마침 장례도 치르지 못한 상황에서 왜병이 마을로 쳐들어왔다.


정국량은 할 수 없이 형제들이며 일가친척들을 모두 피신하게 하고는 혼자서 부친의 시신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을에 들어온 왜병들은 마을 사람 모두가 피난을 가고 없는 상황에서 유독 정국량이란 사람만이 아버지 시신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에 왜장 현몽(玄夢)이 정국량의 효성에 감동하여, 아무도 침범하지 말라는 표시로 물침기(勿侵旗)를 주어 정국량은 무사히 임진왜란을 넘길 수가 있었다. 훗날 이 소식이 조정에 알려져 선조가 특별히 참판 벼슬을 내려주고 효자비와 효자문을 세워 주었다고 한다.


♣ 형태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으로, 현판 대신 효자비가 있다. 효자비는 총높이 172㎝로, 비신의 높이는 110㎝, 폭은 44㎝, 두께는 23㎝이다. 개석은 높이 34㎝, 폭 85㎝, 두께 53㎝이며, 방부는 높이 28㎝, 폭 85㎝, 두께 58㎝이다. 비문의 앞면에는 '선묘조정려효자증참판정국량(宣廟朝旌閭孝子贈參判鄭國樑)'이, 뒷면에는 '묘갑방팔십보여차백삼십보계해오세손귀근서(墓甲方八十步閭次百三十步癸亥五世孫歸謹書)'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백련서재>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오궁리에 있는 조선 중기 문신 신후재가 수학하던 곳.


♣ 개설

백련서재는 조선 숙종 때 한성부판윤을 지낸 서암 신후재(申厚載)[1636~1699]가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던 장소이다. 신후재는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때 유배되었다가 1697년(숙종 23)에 석방되면서 이곳으로 옮겨와 살았다. 서재(書齋) 앞 연못에 백련 꽃이 있는데, 이는 신후재가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가지고 온 백련 뿌리를 심은 것이라고 한다. 백련서재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붙여졌다.


♣ 형태

1. 배치 형식

전체는 동향으로 3단을 정지한 후 첫째 단에 연못을 설치하고, 중앙에 둥근 모양의 섬을 하나 두었으며, 그 뒤로 둘째 단에는 정면 4칸·측면 1칸 반에 꺾이어서 정면 3칸·측면 1칸 반을 덧붙인 ‘ㄱ’자 형을 이루는 납도리 계통의 팔작 기와지붕으로 축조되어 있다.


맞은편에는 정면 3칸 반·측면 1칸 반에 꺾이어서 정면 3칸·측면 1칸 반을 덧대어 역시 ‘ㄱ’자 형을 이루며, 관리사가 납도리 계통의 팔작 기와지붕으로 위치한다. 전체적으로 민가 건축에서 나타나는 ‘ㅁ’자 형의 건물을 지나면 오른쪽 끝에 문이 있고, 이 문에 올라서면 오른쪽으로 일정 공간을 두고 자리 잡은 셋째 단에는 솟을삼문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중앙에는 정면 3칸·측면 2칸의 영당(影堂)이 개방형 평면으로 배치되어 있다.


2. 평면 및 구성형식

영당 바닥은 하나로 된 통간(通間)으로 하여 장마루를 깔았는데, 이는 근래에 마룻귀틀을 짜서 세로 방향에 짧은 널을 깔고 가로 방향에 긴 널을 깔아 ‘정(井)’ 자 모양으로 짠 마루인 우물마루에서 개조된 것으로 보인다.


창과 문은 정면 3칸에 모두 4분합 띠살문을 달았으며, 옆면과 뒷면은 흙벽으로 막음 처리를 하였다. 기둥의 간격은 정면 2칸 모두 2.53m로 나누고, 옆면의 퇴간부(退間部)는 1.34m로 좁게 나눈 뒤 나머지 1칸은 2.53m로 넓게 구획을 지었다.


구조는 높이 30㎝의 자연석으로 축조된 기단 위에 전면 퇴간부는 원형의 다듬돌 초석을 놓았으며, 나머지 부분은 사각형의 다듬돌 초석 위에 주경(柱俓) 25㎝의 둥근기둥과 21×21㎝의 네모진 기둥을 혼용하여 세웠다.


기둥 윗부분은 공포는 무출목(無出目) 이익공(二翼工) 계통의 형상을 보이나, 일반적인 익공(翼工) 양식에서와는 달리 익공 뿌리가 위치해야 할 곳에 짧은 네모반듯한 부재가 주두(柱頭, 대접받침)와 맞물려 있으며, 그 끝머리에 이익공 우설(牛舌, 전각의 기둥 위에 덧붙이는 소의 혀와 같이 생긴 장식)을 붙이고, 일익공(一翼工) 우설은 하부의 기둥에 위치하여 전체적으로 익공 양식에서 벗어난 형태를 띤다.


봉황의 머리 모양으로 만든 봉두(鳳頭)와 방초막이 못의 대가리를 감추기 위하여 연꽃 봉오리처럼 만든 연봉(連峰)의 조각 등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창방(昌防, 건물의 기둥 위에 건너질러 장여나 소로, 화반을 받는 가로재)으로 얼개를 만든 기둥 사이에는 소루(小累, 접시받침)가 6구(具)씩 비교적 많이 배치되어 주심도리(柱心道里)와 장설(長舌)을 받치고 있다.


가구(架構, 낱낱의 재료를 조립하여 만든 구조물)는 전방(前方) 툇기둥과 후방(後方) 평기둥 사이에 내고주(內高柱)를 세워 툇보[退樑]와 대들보를 일정한 형태로 얼개를 만든 형식으로, 대들보 윗부분에는 높이 30㎝의 동자주(童子柱)를 세워 마룻보를 받치게 되어 있다. 또 마룻보 윗부분에는 높이 62㎝의 사다리꼴 짧은 기둥을 놓아 마룻대와 함께 옥개석 무게를 지탱하는 1고주(高柱) 5량(樑) 집으로 처마 깊이가 90㎝인 겹처마 팔작 기와지붕을 이루고 있다.


♣ 현황

충청북도 음성군향토문화재이다.

 

 

<생리 선돌>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생리에 있는 선사시대의 선돌.

 


♣ 개설

선돌은 큰돌(巨石) 기념물의 한 종류로 자연석을 일부 다듬어 세워놓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선돌은 그 연대를 추정하기 어려우나 서유럽의 경우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시장하여 청동기시대에 유행한 것으로 나타난다.


생리 선돌에는 전설이 있다. 옛날에 박장수라고 불리던 사람과 그의 아내가 모두 쌀을 몇 가마씩 들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셌는데 그들이 큰 돌을 각각 하나씩 들고 와 마을의 입구에 세워놓았다 하여 박장수돌이라 부른다 한다.


♣ 위치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생리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마을 쪽으로 약 300m 정도 안으로 들어가면 길가에 선돌이 있다.


♣ 형태

우리나라 선돌의 형태는 주로 둥근 뿔 모양이 많고 비석 모양, 뾰족한 돌기둥 모양 등 다양한 편으로 남성의 성기와 닮은 것도 있다. 일반적으로 선돌은 쌍을 이루어 세워지는 예가 많은데 끝부분이 뾰족한 것은 남성을 상징하며 뭉툭한 것은 여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 선돌도 역시 남성 선돌과 여성 선돌이 쌍을 이루고 있다. 마을의 어귀에 세워진 위치까지도 전형적인 선돌의 일반 예에 충실하다.


1호 선돌은 자연석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크기는 150㎝×120㎝×25㎝ 정도이다. 1호 선돌에서 50여m 떨어진 2호 선돌은 돌결무늬가 있는 퇴적암으로 만든 것이다. 선돌의 끝부분이 1호 선돌보다 뾰족하게 처리되어 있으며 크기는 조금 작다. 남성 선돌로 120㎝×60㎝×30㎝ 크기이다.


♣ 현황

생리 선돌은 2기인데 마을 입구 길가에 위치한 1호 선돌은 끝부분이 뭉툭한 모양으로 돌이끼가 검게 슬어 있다. 그리고 이 선돌이 있는 길 건너 반대쪽으로 50여m 떨어진 인삼밭 주변에 끝부분이 뾰족한 선돌이 있다.

 

 

<조형 신도비>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생리에 있는 조선 중기 문신 조형의 신도비.


♣ 개설

조형은 자가 군헌(君獻)이고 호는 취병(翠屛)이다. 1603년(선조 36)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고, 1643년(인조 21)에 부교리를 역임했다. 1650년(효종 1) 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으로 『인조실록(仁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고,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왔을 때에는 당시의 일을 『부상일기(扶桑日記)』로 남겨 17세기 한일관계사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어서 병조참판, 경기도관찰사, 대사간, 예조참판을 거쳐 형조판서, 공조판서, 예조판서, 우참찬 등을 역임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조형 신도비는 1645년에 세워졌다.


♣ 형태

총 높이가 312㎝이며, 3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비신(碑身)의 경우 높이 208㎝, 앞면 88㎝, 측면 30㎝이고, 가첨석(加檐石)은 높이 45㎝, 앞면 144㎝, 측면 82㎝이며, 방부(方趺)는 높이 59㎝, 앞면 153㎝, 측면 90㎝이다.


♣ 금석문

전액(篆額)은 '숭록예조판서충정조공신도비명(崇祿禮曹判書忠貞趙公神道碑銘)'이다. 비제(碑題)는 '유명조선국숭록대부행예조판서겸판의금부사지춘추관오위도총부도총관증시충정조공신도비명병서(有明朝鮮國崇祿大夫行禮曹判書兼判義禁府事知春秋館五衛都摠府都摠管贈諡忠貞趙公神道碑銘幷序)'이다. 비문은 최석정(崔錫鼎)이 짓고, 글씨는 조상우(趙相愚)가 썼다.

 

 

<장충범 신도비>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삼용리에 있는 임진왜란 때 활동한 장충범의 신도비.


♣ 개설

장충범은 자는 효칙(孝則), 본관은 단양(丹陽)으로, 생원 장언구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 군자감주부로서 충주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부상당하여 향리인 삼생리로 피신하여 치료를 받았다. 1597년(선조 30)에 동지를 규합, 창의하여 삼생리 구진터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1605년(선조 38)에 교지로 녹권(錄券)이 하사되었고, 1857년(철종 8)에 충신의 정문이 내려졌으며,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생극면 생리에는 1971년 세워진 ‘임난공신장충범장군기념비’가 있고, 음성군 음성읍 삼생리에는 ‘장충범 충신문(張忠範 忠臣門)’이 있다.


♣ 형태

총 높이 363㎝이고, 비석의 규모는 비신(碑身)의 경우 높이 218㎝, 앞면 82㎝, 측면 37㎝이고, 가첨석(加檐石)은 높이 75㎝, 앞면 140㎝, 측면 80㎝이며, 방부(方趺)는 높이 70㎝, 앞면 140㎝, 측면 230㎝이다.


♣ 금석문

전액(篆額)은 '국난공신증이조참판장공신도비명(國難功臣贈吏曹參判張公神道碑銘)'이다.


비제(碑題)는'유명조선국선무원종공신군자감주부증가선대부이조참판장공신도비명병서(有明朝鮮國宣武原從功臣軍資監主簿贈嘉善大夫吏曹參判張公神道碑銘幷序)'이다. 비문(碑文)은 김학수(金鶴洙)가 글을 짓고, 김녕한(金寗漢)이 쓰고, 전서(篆書)는 윤용구(尹用求)가 썼다.

 

 

<민발 신도비>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에 있는 조선 전기 무신 민발(閔發, 1419~1482)의 신도비.


♣ 개설

민발 신도비는 민발의 사후에 평생의 행적을 담은 글을 돌에 새겨 세운 비로, 1707년 (숙종 33)에 세워졌다. 민발의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민수산(閔壽山)의 아들이며, 시호는 위양(威襄)이다. 1453년(단종 1)에 사복시대호군(司僕寺大護軍)으로 있으면서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사복시윤(司僕寺尹)이 되었는데, 세조 즉위에 공로를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책록(冊錄)되었다.


♣ 형태

비의 총 높이는 227㎝이며, 비신(碑身)의 높이는 162㎝, 앞면 70㎝, 측면 22㎝이고, 가첨석(加檐石)은 높이 25㎝, 앞면 105㎝, 측면 60㎝이며, 방부(方趺)는 높이 40㎝, 앞면 117㎝, 측면 65㎝이다.


♣ 금석문

전액(篆額)은 ‘위양공민발신도비명(威襄公閔發神道碑銘)’이며, 1707년(숙종 33)에 세워진 이 비의 비문(碑文)은 봉계 윤유(尹揄)가 글을 짓고 허사상이 쓴 것으로, 서자(書者)와 각자(刻者)는 기록되지 않아 알 수 없다. 비문에는 민발의 가계(家系)와 관력(官歷), 그리고 가족 사항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 현황

현재 철책을 둘러 보호하고 있으며, 약간 마멸되기는 하였으나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신후재 신도비>

1948년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상우리에 건립된 조선 중기 문신 신후재의 신도비.

 


♣ 개설

신후재(申厚載)는 조선 숙종 때의 문신으로, 호는 규정(葵亭) 또는 서암(恕庵)이고, 자는 덕부이다. 1660년(현종 1) 사마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다가 부교리를 지냈고,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제거될 때 삭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집권하자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사은겸진주주청부사(謝恩兼陳奏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강화부유수, 개성부유수, 한성부판윤을 지냈다. 1694년(숙종 20)에 갑술옥사로 남인이 실각했을 때 경기도 여주로 귀양 갔다가 3년 후 풀려나 오궁리 오갑으로 낙향한 뒤 학문에만 전념하며 여생을 보냈다.


♣ 형태

신후재 신도비는 일반적인 비의 형태로, 화강암으로 만든 방형 지대석 위에 작고 두터운 방형 대석을 놓고, 그 위에 비신을 올린 모습이다. 전자(篆字)로 비명을 우횡서(右橫書)하고, 비문은 해서체로 우종서(右縱書)하였다. 비신의 위에는 가첨석을 올려놓았다.


♣ 금석문

비 앞면에 ‘자헌대부한성부판윤신공신도비명(自憲大夫漢城府判尹申公神道碑銘)’라고 비제가 쓰여 있다. 비문은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지낸 연안(延安) 이병관(李炳觀)이 짓고, 여주군수를 지낸 연안 이병렬(李炳烈)이 글씨를 썼다. 전서체로 쓴 비제는 신후재의 11세손인 신동일(申東日)이 쓴 것으로, 신도비는 신후재 사후 248년이 지난 1948년에 세운 것이다.

 

 

<어재연·어재순 신도비>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있는 조선 후기 어재연·어재순의 신도비(神道碑).


♣ 개설

신도비는 보통 종2품 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의 묘소 입구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 건립경위

어재연·어재순 형제는 현직에 있을 때는 2품관에 이르지 못하였으나 순직 후 어재연은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오르고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받는 등 신도비를 세울 수 있는 신분이 되어 1983년 후손들이 건립하였다. 동생 어재순의 경우는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증직되어 신도비를 세울 수 있는 신분에는 조금 못 미쳤으나 그 충의가 빛나 형의 신도비와 더불어 문중에서 마련하여 세운 것이다.


♣ 위치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 최성미마을로 들어가면 성본리 토성이 있는데 이 토성 안에 어재연·어재순 형제의 무덤과 쌍충각이 있으며,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신도비가 있다.


♣ 형태

신도비는 2기로 어재연의 신도비는 높이 300㎝ 크기로 방형(方形) 지대석 위에 귀부(龜趺)를 만들고 그 위에 비신을 세우고 쌍용문을 장식한 이수(螭首)를 얹은 모습이다. 나란히 위치한 어재순의 신도비는 높이 280㎝로 형의 것보다는 약간 작고 나머지 형태는 동일하다. 방형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귀부를 올린 후 거북의 등에 비신을 세우고 쌍용을 장식한 이수를 올린 모습이다.


♣ 현황

1983년 함종어씨 문중에서 만들어 세운 것이라 깨끗하게 보존·관리되고 있다.


♣ 의의와 평가

신미양요 시 순국한 무장 형제의 묘소와 형제를 모시는 재실인 쌍충재, 신도비가 어울려 목숨으로 나라를 수호하려 한 무장의 혼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이지걸 묘비>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명 쌍정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이지걸의 묘.


♣ 개설

이지걸의 본관은 성주, 자는 수천(秀天), 호는 금호(琴湖)이고, 부친은 선교랑(宣敎郞) 이연(李堜)이다. 1654년(효종 5) 식년시에 생원 3등 49위로 입격하였다. 1684년(숙종 10)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고, 그 후 경상도 영덕현감(盈德縣監)으로 부임했다가 남형(濫刑)의 죄로 곤양(昆陽)에 귀양 갔다. 1689년 풀려나 1701년(숙종 27)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오위장(五衛將)이 되었다. 사후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이지걸은 특히 시문에 능하여 1,500여 수의 시가 전하고 있으며, 1712년(숙종 38) 목판본으로 편찬된 5권 1책의 『금호유고(琴湖遺稿)』에 실려 있다. 이지걸의 시문집은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이 편찬하였고, 최규서(崔奎瑞)가 발문을 지었다.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 형태

대좌 위에 비신을 세우고 가첨석을 얹은 일반적인 묘비이다. 묘역은 약 600㎡로 묘갈, 망주석, 상석 등의 석물을 갖추었다.


♣ 금석문

묘갈문은 “유명조선국증가선대부이조참판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행절충장군첨지충주부사겸오위장금호이공묘갈병서(有明朝鮮國贈嘉善大夫吏曹參判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行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五衛將琴湖李公墓碣幷序)”로 비제(碑題)하였다.

 

 

<백운사 사적비>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에 있는 조선 후기 백운사(白雲寺)의 내력을 적은 비.


♣ 건립경위

백운사는 사적비에 의하면 임진왜란 이전 작은 암자였으나 병화(兵火)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그 후 백운사가 중건되면서 사적비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절터는 잡목이 우거지고 서축 일부만 남아 있다.


1692년(숙종 18) 8월에 전 승지(承旨) 한구(韓搆)가 비문을 짓고, 면천군수(沔川郡守) 조전주(曺殿周)가 쓰고, 전 승장(僧將) 융식두안(戎湜斗安) 김재량(金哉亮)이 새겼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상명(尙明)이 화주(化主)가 되어 세웠다고 한다.


♣ 형태

비의 크기는 높이 201㎝, 너비 70㎝, 두께 30㎝로, 위가 둥글고 넓으며 아래가 좁은 묘갈형이다.


♣ 금석문

비 머리에는 '백운사 사적비명(白雲寺 事蹟碑銘)'이라 전서하였고, 첫 행에는 '조선국충주서운산백운사사적비명병서청강희삼십일년팔월일입(朝鮮國忠州瑞雲山白雲寺事蹟碑銘幷書淸康熙三十一年八月日立)'이라 하였다.


♣ 현황

현재 백운사의 사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백운사 법당지 북서쪽 50m 저점 대나무 숲에 있다. 산 위쪽에서 밀려온 토사로 사적비 주변이 높아 대석과 사적비 하단부가 흙에 묻혀 있다. 대체로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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